잠을 자다 눈을 떴다. 한밤중이었다. 쫓기는 꿈이었다. 가쁜 숨을 몰아 쉬며 앞으로 뛰다가 잠이 깼다. 최근 자주 잠을 자다 깬다. 꿈 속 가쁜 숨은 잠을 깨고 나서도 이어졌다. 고개를 돌리니 잠을 자는 아이 얼굴이 보였다. 이렇게 부담스럽나? 두 번째 책을 내겠다면서 원고를 출판사에 보내면서 악몽은 시작됐다. 첫 번째와 달리 두 번째 책을 내는 건 자신이 없었다.
처음에 책을 낼 때에는 이런 부담이 없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세상에 대고 할 말이 많았고 들어주는 사람이 없어 글을 썼다. 두려움도 없었다. 책을 내 본 경험이 없었으니 아는 게 없었고 그래서 무서울 것도 없었다. 그저 소리지르고 싶은 마음에 냈던 책이었다. 사람들에게 하고 싶었던 말. 미래에 살지 말고 현재 살라는 말.
지금은 하고 싶은 말이 나오다가도 걱정이 앞선다. 사람들이 읽어줄까? 란 불안.

 

아내와 이별은 나에겐 큰 사건이었다. 사고는 잊혀지지만 사건은 현재의 나에게 말을 건다. 미래에 살지 말고 현재에 살아. 나에게 아내의 죽음은 오늘 지금 이 순간에도 그렇게 말을 건다. 내 삶이 언젠가 끝나는구나, 라는 걸 가슴으로 배웠던 사건. 머리로 배우는 건 이해가 필요했지만 가슴으로 배우는 건 눈물이 필요했다. 그 때부터는 하루하루가 다르게 다가왔다. 언젠가 볼 수 없는 내 일상이니까. 두 번째 책에는 큰 사건이 없다. 그게 부담이었다.

 

이번 이야기엔 별다른 사건 없이 아이와 지내는 이야기였다. 사람들이 읽을까? 자신이 없었다. 초고를 다 보낸 날이었다. 담당 편집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처음부터 원고를 다시 쓸게요.”
편집자는 주저했다. 계약서엔 원고를 넘기는 기간이 정해져 있다. 중요한 건 마감 시간이 아니라 완성도라는 확신에 그렇게 부탁스런 통보를 했다. 구성을 바꾸고, 문체를 바꾸고, 마음에 들 때까지 다시 쓰면 나아지겠지. 예전에는 그렇게 퇴고하는 게 귀찮았는데. 사실 그만큼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람들과 만남도 다 뒤로 하고 혼자 골방에 박한 사람처럼 지낸 시간을 보상받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사건이 없으면 이를 대체할 게 필요해 보였다. 원고를 다 뜯어고치기 시작했다. 다시 정해진 시간에 원고를 보내는 작업이 진행됐다. 20페이지가 넘는 글을 3페이지로도 줄였다. 긴박한 사건이 없으면 문체와 구성을 빠르게 하자는 의도로 속도감을 높였다.

 

전화가 왔다. 편집자였다. 점심을 함께 하자는 내용이었다. 출판사 대표도 온다고 했다. 바쁠 텐데 왜 두 사람이 올까, 궁금해하다가 관심이려니 했다. 출판사 대표는 나와 같은 연배였고 오랫동안 나와 아이를 지켜봐 준 고마운 사람이었다. 신뢰할만한 에세이 편집 경력까지 갖춘데다 뽐내지 않고 수수하고 검소한 모습에 믿음이 더 갔다.
약속 날,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항상 혼자였는데 간만에 점심을 먹기 위해 도심으로 향했다. 중식당 작은 공간에 세 사람이 모였다.
“어떻게 지내셨어요?”
오랜만에 만난 대표가 먼저 물었다.
“아이 방학이라 힘들었어요.”
유독 집 밥을 좋아하는 아들 덕에 방학이 힘겹긴 했다. 삼시 세끼. 덕분에 음식 실력은 좀 늘었다.
. 앞에 앉은 두 사람으로부터 원고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초고이긴 하지만 내 앞에 앉은 두 사람은 내 책의 가장 첫 번째 독자였다.

“솔직히 이야기해주세요.”
언제부터인지 하나의 믿음이 있다. 배움과 성장은 현재의 나의 모습을 흔들고 깨뜨려야지만 따라온다는 믿음. 잔잔한 파도는 훌륭한 뱃사공을 만들지 못한다고 했으니까.

대표는 먼저 물었다.
“먼저 궁금한 게 있어요. 왜 원고를 다 고치시려고 하는 건가요?”
계약기간을 맞추지 못해 마음에 들지가 않았나? 아니면 진짜로 궁금한 건가? 말 한 마디를 듣더라도 여러 생각을 하게 된 건 심리상담을 공부하면서 생긴 일종의 부작용이었다. 그냥 있는 그대로 말하기로 했다. 여긴 상담소가 아니니까.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뭐가요?”
“전체 느낌이요. 뭐랄까, 심심했어요.”
책 한 권에는 느낌이 담긴다. 문장은 남지 않더라도 느낌은 남는다. 한 사람이 지니는 느낌처럼.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고 수다를 떨어도 수많은 상대의 말은 대부분 기억에 남지 않았다. 하지만 그 사람의 느낌은 고스란히 기억했다. 이번 원고의 내 느낌은 심심하다는 느낌이었다.
“그런 면이 있죠. 전작에 비해서는요.”
그도 인정을 했다.
“그런데 삶이 그러시잖아요. 그냥 잔잔하죠.”
내 삶이 잔잔하다…
“지금 모습이 그렇잖아요. 기자 생활을 하는 것도 아니고, 아이와 단 둘이 지내는 생활이 어떻게큰 사건이 있겠어요.”

 

듣고 보니 그랬다. 아이는 학교에 가면 난 도서관에 간다. 조용한 도서관. 책을 좋아한다기 보다는 딱히 만날 사람이 없다. 사건 현장만 쫓아다닐 때 모습은 더 이상 찾을 수 없다. 이웃집 아이 친구 엄마와 만나 커피 한 잔을 한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도 적지 않게 신경을 쓰는 나로서는 적어도 홍상수 감독과 같은 용기는 없다. 그러다 보니 오전 내내 책상에 앉아 책을 읽고 말을 걸 사람이 필요하면 말을 할 수 없어 글을 쓴다. 가끔 카톡이 오면 몇 마디 주고받는 게 전부였다. 나의 하루는 집과 도서관 가끔 수영장을 간다. 처음엔 그 시간이 참 좋았다. 여유가 있고 남들과 다른 삶을 사는 기분. 하지만 그런 느낌은 곧 혼자라는 느낌으로 바뀌었다. 남들이 일하러 나가면 자유로워지고, 남들이 퇴근을 하면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와 바빠지는 삶. 직장인과 내 삶의 자유시간은 정확히 반대다. 심심할 수밖에.
퇴고를 하겠다는 용기. 원고를 내면서 자주 있었던 불안. 그건 나의 일상이 탄핵정국과 맞물리면서 더 못마땅해져 갔다. 세상과 동떨어진 느낌. 탄핵 정국이여도 촛불을 단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난 주말이고 휴일이면 글쓰기 수업을 하고 밤에는 아이를 돌보아야만 했다. 그게 혼자 아이를 키우는 아빠의 삶이었다. 페이스 북에 올라오는 촛불을 든 익숙한 얼굴들. 그 광장에 나가 취재를 하는 동료들 얼굴도 보고 싶었고, 거리에서 우연히 반가운 얼굴을 만나면 술 한잔 기울이고도 싶었다. 하지만 내 시간은 집을 둘러싼 공간에서만 흘렀다.
책 속의 느낌이 바로 당신이에요. 그런데 그게 뭐 어때서요? 친구 같은 대표의 말을 듣고 내 삶을 되돌아 보니 그랬다. 그리고 그게 뭐 어쩌냐는 그의 말.

그게 너야. 그게 어때서..jpg

(사진출처 : http://www.lifeofpix.com/wp-content/uploads/2015/11/Life-of-Pix-free-stock-photos-sea-boat-man-MikeWilson.jpeg )

 

원고를 뜯어 고치는 일을 멈췄다. 억지로 바꾸지 말자는 생각에서 말이다. 어쩌면 내 삶을 뜯어고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대표의 말대로 그게 내 삶이라고 생각을 하니 불안과 초조함도 사라졌다. 이젠 악몽도 꾸지 않는다. 어쩌면 그 불안과 초조함은 조용한 내 일상을 무척 못마땅하게 여긴 결과란 생각마저 들었다. 사건 현장을 쫓아다니며 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살던 내가 이제 아이를 혼자 키우며 보내는 시간이 많다면, 가끔 못마땅하는 것도 당연한 일일게다. 오죽했으면 그랬을까 란 생각.

난 내 자신을 인정하며 생활한다고 여겼는데, 악몽과 원고를 뜯어고치는 일은 내가 알지 못하는 나의 모습을 비춰주며 말을 건 셈이다. 그게 너거든. 그런데 그게 뭐 어때서,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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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구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를 만들고 다듬느라 35년을 흘려보냈다. 아내와 사별하고 나니 수식어에 가려진 내 이름이 보였다. 해야 할 일보다 하고 싶은 일을 찾으려고 기자 생활을 접고 아이가 있는 가정으로 돌아왔다. 일 때문에 미뤄둔 사랑의 의미도 찾고 싶었다. 경험만으로는 그 의미를 찾을 자신이 없어 마흔에 상담심리교육대학원에 진학했다. 지은 책으로는 '지금 꼭 안아줄 것' '나의 안부를 나에게 물었다'가 있다.
이메일 : areopagi@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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