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방학을 맞아 서점에 들렀다.
다엘이 좋아하는 경찰직업 관련 책 한 권을 사고
그 어렵다는 초등수학 문제집들을 살펴보았다.
음…보기만 해도 눈이 어지럽고 머리가 아팠다.

 

난이도나 편집 구성이 맘에 드는 책을 찾기가 어려웠다.
여백이 많아 눈이 피곤하지 않아야 하고
페이지당 문제 수가 적고 복잡하지 않을 것,
원리 위주로 명료한 문제를 실어야 함.
이런 조건들에 대략 맞아 보이는 책 한 권을 골랐다.

 

계산대에 서있으니 옆에서 보던 분이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아니 왜 1학기 문제집을 사요? 이제 2학기가 되는데?”
“아 네, 복습하려고요. 우린 선행학습 같은 거 없어요. 오직 후행학습이죠.”
그는 신기하다는 듯 웃었다.
이런 당연한 일을 신기하게 보는 게 나로선 문화충격이다.

 

지금껏 전심전력 놀기에 바빴던 다엘이
고학년이 되면서 조금씩 공부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다엘의 학습 동기는 매우 단순하다.
다른 아이들이 자신보다 잘 하는 게 샘 난다는 것.

 

다엘의 학교에서 영어는 4학년부터 주당 1시간씩 배정돼 있다.
수업 시수가 많지 않고 다엘의 영어 관심도도 낮았으므로
그 방면에 태평인 나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나 먼 옛날, 다엘에게도 어학 실력의 전성기(?)가 있었다.
유치원에서 매일 30분씩 하는 영어수업에 대해,
나는 ‘우리말이나 잘하면 되지’ 하는 마음에
별로 탐탁지 않았었다.

 

그런데 웬일인가.
다엘이 영어를 너무나 좋아하는 거였다.
전철에서 외국인을 만나면
“Where are you from?”을 외치며
한두 마디 아는 영어로 한참을 대화(같은 것)를 하질 않나,
집에 오면 유치원에서 나눠준 영어CD를 틀어놓고
혼자 박수 치며 노래했다.
나는 시끄럽다며 끄라 했고.

 

현재 다엘은 알파벳을 겨우 알아보는 수준으로 퇴화했다.
무지한 어미 탓에 언어영재의 싹이 꺾인 것이다.
나름 위안을 삼자면,
공부에 있어서는 그야말로 순백의 원시 생명체이니
가능성이 무한할 수도.

 

뒤늦게 다엘의 언어본능을 발굴하고자 시동을 건다.
영어방송과 자막 없는 영화를 통해 일단 감각을 익히고
조금씩 공부라는 걸 해볼까 한다.
와중에 한국의 영어교육 시장이

엄청나게 화려하고 세련되게 발전한 걸 알고는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다엘의 큰 재산은 사람 좋아하고 말하길 즐기는 것.
누군가를 만나서 영어로 떠들 기회가 생기면 절반은 성공이다.

 

다엘이 자는 침대의 맞은 편 벽에 낡은 세계지도를 붙여놓았다.
어떤 언론인이 가난했던 어린 시절에 세계지도를 보면서
자신이 가게 될 나라들을 꿈꾸곤 했다는데
실제로 지금 그는 세계를 무대로 뛰는 사람이 됐단다.
나는 약간의 기회주의에 기대어 큰 투자 없이도
다엘이 세계인이 되는 꿈을 꾼다.

 

지도.jpg » 다엘이 날마다 들여다보는 세계지도

 

수학 문제집은 매일 1장씩 풀기로 했지만
워낙 공사다망하여 건너뛰곤 한다.
그래도 나름대로 시간표를 짜고 스스로 하려는 모습이 대견하다.
아들의 학습에 동참하다 보니 공부의 왕도가 무엇인지 알 것 같다.

 

두려움을 동력 삼아 쫓기듯 해왔던 나의 학창시절 공부에 비해
새로운 것을 알아가는 것 자체에 의미를 두면서
공부의 세계에서 노니는 느낌이 드니 내게도 치유가 된다.
이 나이에도 잠 잘 때 꿈을 꾸면
준비 없이 보는 시험의 공포를 가끔 겪는다.
공부노동의 트라우마가 너무 깊었던 탓이다.

 

이번 방학에 다엘은
경기도의 학교 밖 청소년을 위한 프로그램에 참석하고 있다.
이름하여 ‘꿈의 학교’.
주제는 요리와 유기견 돌보기다.
첫 수업으로 스콘과 브라우니를 만들어
제과제빵 분야에 발을 디뎠다.
수업의 결실로 두 봉지 가득 빵을 들고 왔는데
그 맛이…실로 환상적이었다.

 

빵.jpg » 다엘이 ‘꿈의 학교’에서 만든 빵

 

다엘이 들어갈 중등 대안학교는 중3이 되면 인도로 평화여행을 간다.
여행을 통해 현지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거나 놀아주는 봉사를 하고
안나 푸르나 등정도 한다.
갠지스강의 시체 태우는 광경이 그곳 사람들의 일상임을 아이들은 배워온다.

 

미래를 꿈 꾸는 아이들의 모습에 다엘의 몇 년 후가 겹쳐진다.
입시가 아닌 공부 자체의 즐거움을 누리는 삶이 가능할 거라고
교사시절 나는 상상하지 못했다.
다엘이 내 상상 너머의 삶을 살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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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주
딸이 뇌종양으로 숨진 후 다시 비혼이 되었다. 이후 아들을 입양하여 달콤쌉싸름한 육아 중이다. 공교육 교사를 그만두고 지금은 시민단체 '사전의료의향서 실천모임'의 상담원이자 웰다잉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일산지역의 입양가족 모임에서 우리 사회의 입양편견을 없애기 위한 공부를 하고 있으며 초등 대안학교에 다니는 아들과 함께 대안교육 현장의 진한 경험을 쌓아가고 있다.
이메일 : juin9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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