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휴가를 다녀와서 간만에 인터넷을 열어보니

<뽀뽀뽀>폐지에 대한 기사가 계속 마음에 남아

아무래도 그냥 지나갈 수가  없어 몇 마디 남기려 한다.

 

"괜히 슬퍼지는 이 기분은 뭐지?

 

어린시절 <뽀뽀뽀>에 출연한 적이 있다는

빅뱅의 지드래곤의 말이라는데

10년이 훨씬 더 넘게 <뽀뽀뽀> 방송을 보지못한 나도

기사를 읽고는 웬지 허전하고 슬퍼지는 기분이 들었다.

한국 사람이라면 남녀노소 모두가 다 아는 장수 어린이 프로그램

하나를 잃은 듯한 이 허무함은 정말 뭐지?

 

문득 언젠가 영화잡지에서 읽었던

"잘 빠진 할리우드 영화 제쳐두고 다소 미진한 한국 영화를 보는 이유는

애국심 때문이 아니라 친숙함 때문이다."

라는 글이 떠오른다.

 

70년대에 유아기를 보낸 나는 10대가 되어서야 <뽀뽀뽀>를 볼 수 있었지만

그 프로와 연관된 아주 많은 것들이 어린시절 추억과 함께 오랫동안 남아있다.

뽀미언니였던 왕 언니, 뽀식이 뽀병이와 같은 친숙한 이름의 아저씨들이 나와서

따뜻한 웃음을 주던 80년대의 한국 아이들의 아침시간...

 

어린이들이 실컷 즐길 수 있던 대중문화가 부족했던 그 시절,

초등학생들이 주인공으로 나오던 <호랑이 선생님>도 떠올리면

또 웬지 마음이 아련해진다.

구체적인 에피소드가 뚜렷하게 기억나진 않아도

우리말을 쓰고 우리나라에서 동시대를 살고 있는 아이들과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려줬다는 것만으로도, 또 그런 기억을 어른이 되어서도

이렇게 아련하게 떠올리며 웃음지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따뜻해진다.

 

90년대엔 <사춘기>라는 중학생이 주인공인 드라마가 있었다.

내가 스물이 넘어서야 볼 수 있었던 청소년 드라마였지만,

평범한 한국의 가정집을 배경으로 펼쳐지던 사춘기 아이들의 이야기는

20대 초반에게도 잔잔한 웃음과 공감을 안겨주었고

친구들을 만나 수다떨 때면  "걔네들 너무 귀엽지 않아?"하며 키득거렸던 기억이 난다.

<케빈은 12살>도 너무 좋았지만, 내용과 형식이 완벽하지 않더라도

순수 국산 드라마가 주는 따뜻함과 친숙함은 뭐라 비교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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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인기를 얻은 장수 프로그램이라고 무조건 유지되는 게 맞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하지만, 인기가 없어졌다면 왜 그런지에 대해 정확히 분석하고 좀 더 재밌게, 잘 만들려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시대가 달라졌고 사람들이 외면한다 해도

30년 넘게 한국 유아들의 일상과 사회화에 큰 영향을 끼친 프로그램을

좀 더 근사하고 재밌는 명품 유아 프로그램으로 키워볼 순 없었을까.

 

얼마전에 우연히, 예전에 아이돌 그룹이었던 <신화>가 15주년을 맞으며 다시 활동한다는

기사를 읽었다. 컴백  기자회견에서

"오래된 것이 꼭 낡은 것만은 아니다, 명품이 만들어지기까지는 그만큼의 시간이 걸린다..."

는 리더의 말 때문에 그들도 보는 이들도 웃음이 터졌지만,

오랜 시간동안 유지되어 온 것들에는 분명 그만큼의 경험과 노하우과 가치가 담겨있다.

드라마 <응답하라 1997>에서 H.O.T팬들에 대한 이야기를 보며 우리가 그리워하는 것은

어쩜 그 아이돌 스타 자체보다 그들이 전성기를 누렸던 '그 시절의 문화와 나'를

떠올리기 때문이 아닐까.

90년대 고딩들이 쓰던 삐삐 음성확인서비스에서 흘러나오던 노래 가사처럼

"슬프도록 아름다웠던"  90년대의 감성을 말이다.

 

폐지와 해체없이 꾸준하게 존재하는 문화 코드가 있다는 것은

그 시절의 나와 지금의 나를 그 문화와 함께 연결해서 확인하며

어떤 위안이랄까, 안정감같은 걸 경험할 수 있게 된다.

 

일본에는 오랜 시간에 걸쳐 성장하고 진화해 가는

어린이 텔레비젼 프로그램과 문화가 아주 풍성하다.

<뽀뽀뽀>처럼 유아들이 노래와 이야기, 생활습관을 배울 수 있는 아침 프로

<어머니와 함께>는 마흔이 넘은 일본인 남편이 어렸을 때부터 봐왔다하니

50년 아니 어쩜 그보다 더 긴 역사를 가졌을 지도 모른다.

프로그램 제목도 다소 고전적?인 느낌이 나지만, 한번도 바뀐 적없이 <어머니와 함께>로

예나 지금이나 일본 유아들의 아침 친구가 되어주고 있다.

이뿐 아니라, 초등학생들이 주인공인 버라이어티 프로그램도 있고

남녀노소 누구나 다 알고 작년인가 일본 최고의 가수가 주제곡을 부른 <도라에몽>은 40년,

엄마도 아빠도 주제가를 함께 따라부르는 <울트라맨>도 40년,

일본 아기들은 호빵맨이 키운다고 할 만큼 유아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으며 인기가

사그러들지 않는 <호빵맨>도 태어난지 벌써 몇 십 년째다.

 

 

DSCN0117.JPG

<호빵맨이 그려진 옷을 입은 둘째의 생일날, 누나도 한참 호빵맨에 빠져있을 때 입던

  옷이었다. 만1-3세 시기의 일본 아이들이라면 누구나 이 호빵맨에 열광하는 시기를 거친다>

 

 

이렇게 오랫동안 장수 프로그램이 되는 비결이 뭘까.

어린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다해서 대충 만들거나 인기가 좀 떨어진다고

금방 폐지하거나 하지 않는다. 프로그램의 기본이 되는 교육적이거나 철학적인 바탕이

든든하고 각 분야의 전문성을 갖춘 스탭들이 참여하는 것은 물론이고,

주제가 등은 당대 최고 인기가수들이 전문음악프로에 나와서까지 부르기도 한다.

 

이런 오랜 역사 덕분에 어린이 문화의 질과 수준이 지금까지 점점 향상되어  왔다.

여느 나라와 다름없이 각종 게임과 인터넷에 노출되어있는 일본 아이들이지만

그들의 한편에는 이렇게 수준높은 어린이문화도 함께 존재하고 있다.

 

<뽀로로>도 지금은 전성시대를 누리고 있지만

언젠가는 <뽀뽀뽀>처럼 되지 않기를

제작진도 시청자도 함께 잘 지키고 키워나갈 수 있기를.

인기가 있다고 해서 한때 소모되고 마는 상품이 되지 않기를,

지금처럼 지식위주의 교육이 판치는 때일수록 질좋은 어린이 문화가

든든하게 존재할 수 있도록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

 

하루 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전통있는 명품 어린이프로그램을

이제 우리 아이들도 하나쯤은 가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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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희
배낭여행 중에 일본인인 지금의 남편을 만나 국제결혼, 지금은 남편과 두 아이와 함께 도쿄 근교의 작은 주택에서 살고 있다. 서둘러 완성하는 삶보다 천천히, 제대로 즐기며 배우는 아날로그적인 삶과 육아를 좋아한다. 아이들이 무료로 밥을 먹는 일본의 ‘어린이식당’ 활동가로 일하며 저서로는 <아날로그로 꽃피운 슬로육아><마을육아>(공저) 가 있다.
이메일 : lindgren707@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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