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밭에 다녀온 뒤로

우리집 간식과 후식은  무조건 사과.

어제 저녁도

밥상 물리자마자 디저트달라 아우성치는 아이들에게 쫓기듯

묵묵히 사과를 깍고 있을 때.

남편이 왔습니다.

집안에 들어서자마자 봉투를 하나 내밀더니

"안심하고 먹어도 될 거 같아."

그러더군요.

 

남편이 내민 봉투 안에는

방사능 검사결과가 적힌 자료가 들어있었고

굵은 글씨체로 '부검출'이라 쓰여있었는데

세상에, 이 남자,

그 새 사과밭에서 따 온 사과 몇 개를 들고가

시청, 환경센터를 전전하며 방사능 검사를 받아온 거였어요.

 

작년, 대지진 이후로

방사능 오염에 대한 걱정은

일본에 사는 사람들의 일상이 되었지만

시간이 조금씩 지나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크게 의식하지 않는 분위기입니다.

후쿠시마산 채소와 과일이 아무렇지 않은 듯 팔리고 있고

가끔은 아주 싼 값으로 나와있어 소비자를 유혹하기도 하구요.

우리집은 먹는 것은 생협을 거의 이용하고 있는데

이 생협이 원전을 반대하는 입장이라 방사능 검사를 전품목 대상으로

철저하게 하니, 그걸로 어느 정도는 안심하고 있었어요.

 

우리가 갔던 나가노의 사과밭은

후쿠시마와는 거리가 꽤 멀기도 하고

그저 사과 따는 재미만 생각했는데

남편이 가져온 방사능 검사결과는 현실을 다시 인식시켜주더군요.

세슘이 검출되지 않았다니, 다행스럽기는 하지만

사과 한 알 먹는데도 이런 걱정을 해야하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참...

얼마 전에 이시하라 도쿄 도지사가 이런 말을 했어요.

"원전 반대를 외치는 사람들, 그렇게 센티멘탈한 발언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아니,, 환경과 생명에 대해 말하는 것이 센티멘탈한 건가??

작년 대지진, 그 지옥을 경험한 나라의 정치인으로서 할 수 있는 말인지!

 

일본도 곧 선거가 있을 겁니다.

결과는 두고봐야 알겠지만,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게 될까 걱정이예요.

많은 문제들이 금방 해결되지 않는다해도

우리 삶 전체를 좀 더 진지하게 고민하는 정권이 되어야 할텐데.

이대로 가다간

영어교육이나 입시성적보다

더 무서운 것들이 우리 아이들의 생명을 위협하게 될 지도 모릅니다.

 

<<사과밭에서 얻어온 과일들. 여기 사는 한국친구들에게 한 상자씩 싸서 보냈는데

    이런 선물을 하면서도 방사능 오염걱정을 해야 하다니. 2년 전만해도 생각지도 못 한

    현실을 지금 겪고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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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희
배낭여행 중에 일본인인 지금의 남편을 만나 국제결혼, 지금은 남편과 두 아이와 함께 도쿄 근교의 작은 주택에서 살고 있다. 서둘러 완성하는 삶보다 천천히, 제대로 즐기며 배우는 아날로그적인 삶과 육아를 좋아한다. 아이들이 무료로 밥을 먹는 일본의 ‘어린이식당’ 활동가로 일하며 저서로는 <아날로그로 꽃피운 슬로육아><마을육아>(공저) 가 있다.
이메일 : lindgren707@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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