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회가 열리기 며칠 전, 나는 뽀뇨와 함께 잠자리에 들며 어린 시절 기억을 떠올렸다.

“뽀뇨야, 아빠가 초등학교 때 운동회를 하면 늘 속상했어. 왜냐면 달리기 시합을 하는데 맨날 3등 안에 못 들어서 노트를 못 받았거든. 어릴 때 손목에 찍는 등수도장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몰라”

 

회전_IMG_2498.JPG » 뽀뇨와 함께 한 운동회

 

운동회 하면 떠오르는 몇 가지 중에 나는 등수도장이 먼저 떠올랐다. 고학년 때는 매스게임도 떠올랐고 악대연주도 떠올랐다. 아마도 부모님이 오시면 보여드리려고 했던 연습이었던 것 같다. 몇 번을 맞추고 또 연습하고 하는 과정이 어렵기도 했지만 기억에는 남는다.

몇 년 전 뽀뇨 유치원 학예발표회 때 아이들의 재롱잔치가 있었는데 그 때는 내 어릴 적 기억을 떠올리지 못했다. 난 유치원을 다녀본 적이 없기에. 첫째가 초등학교에 가고서야 오랫동안 잠재되었던 유년시절의 기억이 겹쳐졌다.

1학년 때 학교가기 싫었던 기억, 입학 후 며칠 동안 늦게 등교하여 복도에서 벌을 서던 기억, 선생님의 이름 정도밖에 기억이 나질 않는다. 언제였는지 모르지만 서울 친척이 내게 사준 야광 헬리혜성 캐릭터가 부착된 가방도 기억이 난다.

초등학교 운동회 당일, 뽀뇨에게 첫 경험은 우리 부부에게도 첫 경험이기에 어떻게 진행되는지도 모르고 아침 9시가 다되어 학교에 갔다. 비가 올지 모르는 구름 잔뜩 낀 날씨여서 운동회를 진행할까 조마했는데 진행한다는 메시지를 받고서야 안도했다. 추석 명절 앞두고 어렵사리 휴일을 정했는데 하루가 밀리면 아빠의 운동회 참석여부가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운동장에 도착하니 전 학년이 다들 모여 있고 엄마 아빠들도 와 있었다. 거의 학생수 만큼 학부모들이 온듯한데 가족단위로 온 곳도 있고 아빠들도 제법 와 있었다. 다들 추석 전이라 바쁠텐데 운동회 휴가를 어떻게 뺐을까 신기하기도 했지만 도농복합도시의 특성이라 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다.

제주는 공동체의 행사참여를 이유로 휴가를 내거나 잠시 외근을 내는 것에 관대하다. 특히 아빠들이 ‘둘러보아야 할 일’이 많다보니 정작 아이 볼 시간은 덜 하지만 그걸 남성가장의 역할로 보기에 직장 내에서도 허용범위가 넓다. 예를 들면 경조사 참석, 벌초, 아이들 운동회 참석까지.. 특히 아이들 운동회는 가족끼리 참석하는 경우가 많은데 뽀뇨 유치원 재롱잔치 때 3대가 참여하는 분위기를 보고 놀란 적이 있다. 어찌 보면 가족지향적인 사회인 듯한데 ‘왜 아빠들은 지역과 공동체 돌아보느라 아이들 돌보는 걸 챙기지 못하는 걸까? 아이들을 데리고 지역 사회를 둘러보는 것은 어려운 것일까?’ 제주 아빠육아 토크쇼에서 사회를 진행하며 이 질문을 던져 본 적이 있다.

 

IMG_2501.JPG » 엄마아빠와 함께 한 에어로빅 시간, 운동회 중 제일 즐거웠다     

 

운동장에서 아이들과 부모들이 머뭇거리는 동안 교장선생님의 말씀이 들렸다. 예나 지금이나 교장선생님의 이야기를 참 길었는데 교장선생님은 학부모들에게 현재 추진하는 주요 사업에 대해 설명할 좋은 기회이기에 놓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힘주어 외치는 여자 교장선생님의 긴 말씀이 끝나고 바로 이어지는 에어로빅 시간. 체육 선생님이 아니라 사설 에어로빅 과정을 운영하는 여자분이 올라오셔서 엄마들을 운동장에 불러 모았다. 특유의 율동과 목소리를 듣다보니 운동회가 아니라 에어로빅 모임에 온 게 아닌가 싶었고 엄마들은 다들 익숙한 듯 따라했다. 나 또한 뽀뇨와 짝을 맞췄고 아내는 아직 부모가 오지 않은 뽀뇨반 친구와 짝을 이뤘다.

 

IMG_2505.JPG » 사진을 클릭하면 공 맞는 아빠영상이 나옵니다. 그 중에 젤 겁많은 아빠가 바로 저에요.

 

웃으며 몸을 풀고 나니 이제 본격적인 운동회가 시작되었다. 운동회 경기는 협동과 경쟁의 게임으로 진행되었는데 협동은 공을 던져서 바구니에 많이 담기, 블록 높이 쌓기 등이 있었고 경쟁은 주로 달리기였다. 경쟁은 순위가 정해지는 방식이어서 깃발이 1위부터 3~4위까지 있었고 역시나 도장을 찍었다. 경쟁하여 순위를 정하는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등외는 없어서 그나마 다행이다 싶었다.

한 가지 참신했던 점은 게임 팀을 묶을 때 반 대항이 아니라 티셔츠 색깔로 묶은 것이다. 티셔츠는 청색과 흰색 중 아무거나 입고 오라고 했고 해당 색깔을 입고 온 아이들이 같은 팀에 편성되었다. 다른 반 아이들과 어울릴 수 있는 기회랄까.

반별 게임은 뽀뇨가 과자를 따먹고 돌아오는 달리기 경주에 참여했는데 3등을 했다. 아빠랑 게임하면 1등을 하고 싶어해서 혹여 울지나 않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도 개의치 않아했다. 다만 2등까지 선물을 준다고 아쉬워하긴 했다. 나와 아내가 늘상 하는 이야기가 있다. 1등하려고 하지 마라. 1등 안 해도 행복하게 살 수 있다.

IMG_2521.JPG » 뽀뇨는 3등을 했다. 하지만 내겐 등수가 중요하지 않다. 열심히 노력했다면 그걸로 족하다.

 

학교에서 만큼은 경쟁이 아니라 협력하는 게임을 더 많이 했으면 좋겠다. 우리 사회가 무한경쟁 사회로 진입하며 얼마나 많은 것을 잃었는지 모른다. 특히 농업은 마을 단위의 협동이 근간을 이루었는데 현재는 가족농사로 좁혀졌고 그나마도 점점 더 줄어들고 있다. 기업은 어떤가? 좁은 문에 들어가려다 보니 탈락하는 많은 사람들은 불행하게 생각하고 인생에서 패배자로 인식된다. 탈락자들이 대다수인 사회인데 도대체 1등이 무슨 의미가 있으며 1등은 또 행복할까?

예전에 비해 학교운동회 규모가 많이 줄어들고 있다. 학생수가 줄어드니 어쩔 수 없는 일인데 앞으로는 체력증진을 목표로 경쟁을 유발하는 ‘체육대회’가 아니라 친구와 가족들이 함께 어울려 조화로운 시간을 보내는 ‘가족행사’가 되었으면 좋겠다. 운동회에서 프로그램을 보조하는 역할을 운영위원이나 엄마들이 많이 돕는데 아빠들도 함께 참여하면 좋지 않을까 . 나는 키카 크다는 이유로 ‘바구니에 공 많이 담기’게임의 장대드는 아빠 역할을 했는데 게임 내내 공을 무지 맞았다. 아마 뽀뇨에게 좋은 추억이 되지 않았을까?

IMG_2515.JPG » 아빠와 함께 한 시간.. 아이의 정서발달에 큰 도움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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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창욱
세 가지 꿈 중 하나를 이루기 위해 아내를 설득, 제주에 이주한 뽀뇨아빠. 경상도 남자와 전라도 여자가 만든 작품인 뽀뇨, 하나와 알콩달콩 살면서 언젠가 가족끼리 세계여행을 하는 소박한 꿈을 갖고 있다. 현재 제주의 농촌 마을에서 '무릉외갓집'을 운영하며 저서로 '제주에서 아이를 키운다는 것', '제주, 살아보니 어때?'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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