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새도래지가 있는 주남저수지 인근.
제법 깡촌에서 자랐다. 초
등학교 4학년때인가 문득 집을 나와 처음으로 완행버스에 몸을 싣고
마산시 큰엄마를 보러 나섰는데 주남저수지를 보고선 집근처에 바다가 있구나라고 생각했다.
초등학교때 신작로에 아스팔트가 깔렸고
마을최초의 전화가 점빵을 했던 우리집에 놓였는데
버튼도 다이얼식도 아니고 연필깎이 손잡이식의 손잡이를 잡고 한참을 돌려야 통화가 되는 구식전화기였다.
서울서 온 전화를 옆집 아주머니에게 연결시켜야 했는데 교환원 이야기를 듣고
수화기를 그대로 놓아두어서 끊겼던 기억이 난다.
그런 깡촌에서 커가는 내내 본 것이 바로 단감이다.
창원단감.
남들은 맛있다고 난리지만 초중고때 먹은 단감이 채 15키로 두박스도 되지 않을 것이다.
단감 맛을 알게 된 것은 15년이 훌쩍 흘러 나이 서른,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였다.
단감이 달게 느껴지지 않았던 것은 '일'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겨울에는 냉동창고에 보관된 단감을 재작업해서 늦어도 2월달 안에 팔아야 했고
초봄엔 감나무 껍질을 벗겨야 했다.
그리고 전정작업.
일년에 7번 정도의 약치기.
그리고 본격적인 감따기와 출하.
우리집은 법인도 운영했으니 인근 동네 단감이 모두 모여
멀리 가락동이니 영등포니 전주니, 안산이니 전국으로 보내졌다.
중2때부터 누나들과 자취를 시작했는데 공부를 핑계삼아 일이 많은 시골집을 자주 가지 않았다.
집을 떠나 도회지로 가는 버스를 타러 나올 때
그 짧은 동네길을 아버지와 함께 걷다 마중하고 뒤돌아서는 아버지 뒷모습을 보곤
어찌나 눈물이 났던지.
어렵게 굴러온 가계형편이지만 초등학교때 아버지가 구해온 귀한 바나나 맛을 아직 잊지 못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이제 8년이 흘렀다.
멀리 전주출신의 아내와 서울에서 만나 지금은 세 살인 이쁜 딸아이를 제주에서 낳았다.
아버지가 하고 있던 일을 멀리 제주 시골에서 딸아이를 보며 하고 있다.
힘들게 농사지어 멀리 서울까지 보내 가르쳤는데
청개구리도 이런 청개구리가 없다.
먼지가 나는 일터에서 아이 볼 정신도 없이 일을 하다보면
한편으로 내 아버지가 나에게 오버랩되고,
일하는 동안 아이 얼굴에 먼지가 묻고 넘어지는데도 뒤돌아볼 수 없이 바쁜 아빠가 늘 미안하다.
진정으로 마음이 쓰이는 것은 내가 선택한 것이긴 하지만,
자라온 환경이 결국 내가 현재 살아가는 모습을 결정지었다는 사실이다.
내 부모가 흙을 만지며 나를 키웠다는 것을 무시할 수 없듯
내 아이 또한 그 사실을 원초적으로 받아들이리라.
오늘 아버지가 바나나를 가져왔듯 나는 퇴근하며 망고를 가져왔다.
뽀뇨가 너무나 맛있게 먹었다.
언젠가 이 아이도 내 뒷모습에 눈물을 흘리고 또 내가 가는 것을 지켜볼 것이다.
그리도 아버지, 나, 자기자신을 똑 닮은 아이를 낳아 기르겠지.
그때는 어떤 모습으로 무슨 과일을 먹이게 될 것인지..
<마을에 갔다가 가져온 망고>
사진을 누르면 '치카치카하는 뽀뇨모습을 보실 수 있어요' 별 탈없이 잘 자라고 있어 감사합니다.
우리,블로그밖에서도만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