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규 29.jpg

 

열세 살 아들과 요즘 꽤 잘 지내고 있다.

우리가 잘 지내고 있다는 것은 큰 소리 내며 싸우는 일 별로 없고 학교 갈 때

끌어안고 뽀뽀하고, 집에 같이 있을 때 수시로 오가며 부비부비 한다는 뜻이다.

내가 집안일을 부탁하면 전엔 단칼에 거절하더니만 요즘엔 불평하면서도 들어준다.

녀석..., 제법 의젓해졌다.

 

남들은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아들이 예민하게 군다는 둥, 틱틱거리며 반항한다는 둥,

아예 말이 없어진다는 둥 힘들게 한다는데 우리 아들은 그 정도 반항이라면 이미

일곱 살 때부터 줄곧 해왔던 것이다.

그때마다 속으로 생각했다.

 

우리 아들은 지금이 사춘기다, 지금이 사춘기다..., 미리 겪고 있으니 나중엔

수월해지겠지....

 

그렇다. 나는 '지랄 총량의 법칙'에 의지했던 것이다.

한 사람이 평생 떨어야 할 지랄의 총량이 있다는데 먼저 시작하면 나중이

수월할 테니 나는 지금이라고 생각하자, 하며 마음 다스리며 살았다.

 

정말 그 말이 맞는 것인지 아들은 나이가 들수록 나와 부딪히는 일이 줄어들었다.

그렇다고 자기 주장이 약해지거나 한 것은 절대 아닌데, 뭐랄까...

말이 통한다는 느낌이 늘었다고나 할까...

자기가 잘못한 것을 받아들이는 게 조금씩 되어가니까

크게 다투어도 화해가 되고, 앙금이 남지 않게 되었다.

 

이런 밀월 속에도 물론 티격태격 하는 때가 있다.

며칠 전에는 이룸이 때문에 아들과 싸웠다.

발단은 늘 그렇듯이 참 사소했다.

 

아들: 엄마, 나 어제 공룡 나오는 꿈 꿨는데요, 꿈에서 막 티라노랑 렉터가

      저를 쫒아오는 거예요.

이룸 : 나도 어제 공룡 나오는 꿈 꿨다요?

아들 : 야, 너 거짓말이잖아. 내 꿈 얘기 듣고 바로 지어낸 거 다 알거든?

이룸 : 아니야, 공룡 꿈 꾼 거 맞아.

아들:  거짓말 하지마, 너는 맨날 내가 꿈 꾼거 따라 꿨다고 거짓말하잖아!

이룸 : 아니야.

아들 : 이 거짓말쟁이야.. 입만 열면 거짓말이야!!

 

이런 설전을 듣고 있다가 내가 이 대목에서 한 마디 했다.

 

엄마 : 필규야, 이룸이가 가끔 거짓말을 할 때가 있긴 하지만 거짓말쟁이는 아니야.

       입만 열면 거짓말 하는 것도 아니고.. 그건 너무 심한 표현이야.

아들 : 거짓말쟁이 맞거든요. 맨날 없는 말을 지어낸다고요!

엄마 : 니가 하는 말이 재미있어서 그 대화에 끼고 싶어서 말을 지어낸거야.

       그걸 꼭 거짓말이라고 할 필요는 없어. 그냥 이룸이의 귀여운 상상력이라고

       생각해주면 어떨까?

아들 : 엄마가 그런 식으로 이룸이를 싸고 도니까 이룸이가 맨날 거짓말하는 거라구요.

       그렇게 키우면 나중에 정말 이룸이가 거짓말쟁이가 될거라구요.

엄마 : 엄마가 너를 그렇게 키워봤는데 너, 거짓말쟁이 안 됐어.

       너도 어렸을 때 상상력을 동원해서 엄청 없는 말 지어냈거든!

       그때마다 엄마, 아빠는 그저 웃어 넘겼지, 그 모든 것들을 거짓말한다고 혼내지

      않았어. 그러니까 이룸이도 걱정 할 필요 없어.

 

아들은 내 말을 들으면서 주먹을 불끈 쥐고 부르르 떨며 내 앞에 서서 나를 노려 보았다.

나보다 키가 큰 녀석의 불타는 눈을 마주하고 있자니 영 기분이 좋지 않았다.

무엇보다 녀석의 시선이 높은 것이 맘에 안 들었다.

 

엄마 : 야, 뒤로 한 발 좀 가서 쳐다봐. 눈높이가 높으니까 엄마 기분 나빠진다.

 

아들은 잠시 그 상태로 있다가 뒤로 한 발 물러났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푹 웃음이 터졌다. 아들은 여전히 나를 노려보고 있었지만

한풀 꺾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필규야, 어린 아이들은 거짓말과 상상력의 차이를 맘대로 사용해.

나쁜 의도를 가지고 하는 말이 아니면 다 상상력이라고 봐도 괜찮아.

그냥 오빠가 멋진 꿈 얘기 하니까 자기도 주목받고 싶고 끼고 싶어서 순간적으로

지어내는 거라고.... 참 재치 있지 않니?

너도 이룸이만했을 때 그랬어. 정말 기발하게 지어낸 꿈 이야기를 들려줬어.

엄마, 아빠는 그게 지어낸 거라는 걸 다 알면서도 신나서 맞장구 쳐 줬지.

그 덕에 니가 이렇게 잘 큰거야.

이룸이도 그렇게 좀 키워보자"

 

"쳇... 내가 멋진 오빠라서 참아준다"

 

그날의 다툼은 그렇게 지나갔다. 전 같으면 끝까지 동생 편만 든다는 둥,

엄마는 늘 자기만 잘못했다고 한다는 둥, 억지를 부리며 소리를 지르고 난리를

쳤을 것이다. 

도무지 싸움이 될 것 같지 않은 상황을 끝내 싸움으로 몰고 가는

아들 때문에 무던히도 속을 끓였는데 이젠 불끈하고 부르르 해도 

더 이상 나가지 않고 수그러든다. 

나도, 녀석도 그만큼 자란 것이다.

 

아들과 수없이 싸우고, 다투고, 티격태격하며 살아왔다.

오죽하면 얼마 전 생일 카드에도 아들은 이렇게 적었더라.

- 엄마.. 맨날 다투고, 삐지고, 티격태격하지만 그래도 엄마를 사랑해요 - 라고.

 

우린 참 열심히 싸웠다.

싸우고, 울고, 소리지르고, 서로 생채기 내고, 그리고 나서 사과하고, 보듬고,

끌어안으며 지내왔다.

서로를 믿기 때문에 싸울 수 있다는 말이 있다. 

밀어낸 만큼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탄성을 믿기 때문에 싸울 수 있다는 것이다.

신뢰의 탄성이 없으면 쉽게 싸울 수 없다.

우린 징글징글하게 싸웠지만 그렇게 싸우고도  여전히 서로를 좋아할 수 있었으니

생각해보면 참 잘 지내온 시간들이다.

 

초등대안학교 졸업반 아이들에게 이 시기는 중등대안학교를 알아보는 시간들이다.

필규도 엄마 아빠와 여러 곳의 학교를 돌아보며 탐험하며 체험을 했다.

자기의 미래가 달린 중요한 선택을 부모와 함께 해 나가는 과정을 겪는 동안

부모에 대한 신뢰도 더 생긴 듯 하고, 자기를 염려하고 좋은 학교를 선택해주고 싶은

마음을 이해하는 것도 같다. 

스스로도 졸업 이후의 모습에 대해서 이런 저런 생각이 많아졌을 것이다.

함께 있을 땐 자주 싸우지만 중요하고 큰 일 앞에서는 변함 없이 우린 한 팀이라는 것을

아들은 이제 알고 있다. 믿고 있다.

 

필규 28.jpg

 

커 갈수록 고맙고 든든하다.

그래도... 앞으로는 조금씩 덜 싸우자 아들아.

니 키가 엄마 키를 넘어서면서부터는 엄마 버럭도 약발이 잘 안받는 것 같다고 녀석아...ㅠㅠ

몸도 마음도 나날이 쑥쑥 커가는 아들을 보면서

신체의 성장은 멈췄지만 인격 성장은 부단히 노력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그러니까 서로 좀 잘 커 나가자.. 아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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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순화
서른 둘에 결혼, 아이를 가지면서 직장 대신 육아를 선택했다. 산업화된 출산 문화가 싫어 첫째인 아들은 조산원에서, 둘째와 셋째 딸은 집에서 낳았다. 돈이 많이 들어서, 육아가 어려워서 아이를 많이 낳을 수 없다는 엄마들의 생각에 열심히 도전 중이다. 집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경험이 주는 가치, 병원과 예방접종에 의존하지 않고 건강하게 아이를 키우는 일, 사교육에 의존하기보다는 아이와 더불어 세상을 배워가는 일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고 있다. 계간 <공동육아>와 <민들레> 잡지에도 글을 쓰고 있다.
이메일 : don3123@naver.com      
블로그 : http://plug.hani.co.kr/don3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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