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세 살 아들과 요즘 꽤 잘 지내고 있다.
우리가 잘 지내고 있다는 것은 큰 소리 내며 싸우는 일 별로 없고 학교 갈 때
끌어안고 뽀뽀하고, 집에 같이 있을 때 수시로 오가며 부비부비 한다는 뜻이다.
내가 집안일을 부탁하면 전엔 단칼에 거절하더니만 요즘엔 불평하면서도 들어준다.
녀석..., 제법 의젓해졌다.
남들은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아들이 예민하게 군다는 둥, 틱틱거리며 반항한다는 둥,
아예 말이 없어진다는 둥 힘들게 한다는데 우리 아들은 그 정도 반항이라면 이미
일곱 살 때부터 줄곧 해왔던 것이다.
그때마다 속으로 생각했다.
우리 아들은 지금이 사춘기다, 지금이 사춘기다..., 미리 겪고 있으니 나중엔
수월해지겠지....
그렇다. 나는 '지랄 총량의 법칙'에 의지했던 것이다.
한 사람이 평생 떨어야 할 지랄의 총량이 있다는데 먼저 시작하면 나중이
수월할 테니 나는 지금이라고 생각하자, 하며 마음 다스리며 살았다.
정말 그 말이 맞는 것인지 아들은 나이가 들수록 나와 부딪히는 일이 줄어들었다.
그렇다고 자기 주장이 약해지거나 한 것은 절대 아닌데, 뭐랄까...
말이 통한다는 느낌이 늘었다고나 할까...
자기가 잘못한 것을 받아들이는 게 조금씩 되어가니까
크게 다투어도 화해가 되고, 앙금이 남지 않게 되었다.
이런 밀월 속에도 물론 티격태격 하는 때가 있다.
며칠 전에는 이룸이 때문에 아들과 싸웠다.
발단은 늘 그렇듯이 참 사소했다.
아들: 엄마, 나 어제 공룡 나오는 꿈 꿨는데요, 꿈에서 막 티라노랑 렉터가
저를 쫒아오는 거예요.
이룸 : 나도 어제 공룡 나오는 꿈 꿨다요?
아들 : 야, 너 거짓말이잖아. 내 꿈 얘기 듣고 바로 지어낸 거 다 알거든?
이룸 : 아니야, 공룡 꿈 꾼 거 맞아.
아들: 거짓말 하지마, 너는 맨날 내가 꿈 꾼거 따라 꿨다고 거짓말하잖아!
이룸 : 아니야.
아들 : 이 거짓말쟁이야.. 입만 열면 거짓말이야!!
이런 설전을 듣고 있다가 내가 이 대목에서 한 마디 했다.
엄마 : 필규야, 이룸이가 가끔 거짓말을 할 때가 있긴 하지만 거짓말쟁이는 아니야.
입만 열면 거짓말 하는 것도 아니고.. 그건 너무 심한 표현이야.
아들 : 거짓말쟁이 맞거든요. 맨날 없는 말을 지어낸다고요!
엄마 : 니가 하는 말이 재미있어서 그 대화에 끼고 싶어서 말을 지어낸거야.
그걸 꼭 거짓말이라고 할 필요는 없어. 그냥 이룸이의 귀여운 상상력이라고
생각해주면 어떨까?
아들 : 엄마가 그런 식으로 이룸이를 싸고 도니까 이룸이가 맨날 거짓말하는 거라구요.
그렇게 키우면 나중에 정말 이룸이가 거짓말쟁이가 될거라구요.
엄마 : 엄마가 너를 그렇게 키워봤는데 너, 거짓말쟁이 안 됐어.
너도 어렸을 때 상상력을 동원해서 엄청 없는 말 지어냈거든!
그때마다 엄마, 아빠는 그저 웃어 넘겼지, 그 모든 것들을 거짓말한다고 혼내지
않았어. 그러니까 이룸이도 걱정 할 필요 없어.
아들은 내 말을 들으면서 주먹을 불끈 쥐고 부르르 떨며 내 앞에 서서 나를 노려 보았다.
나보다 키가 큰 녀석의 불타는 눈을 마주하고 있자니 영 기분이 좋지 않았다.
무엇보다 녀석의 시선이 높은 것이 맘에 안 들었다.
엄마 : 야, 뒤로 한 발 좀 가서 쳐다봐. 눈높이가 높으니까 엄마 기분 나빠진다.
아들은 잠시 그 상태로 있다가 뒤로 한 발 물러났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푹 웃음이 터졌다. 아들은 여전히 나를 노려보고 있었지만
한풀 꺾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필규야, 어린 아이들은 거짓말과 상상력의 차이를 맘대로 사용해.
나쁜 의도를 가지고 하는 말이 아니면 다 상상력이라고 봐도 괜찮아.
그냥 오빠가 멋진 꿈 얘기 하니까 자기도 주목받고 싶고 끼고 싶어서 순간적으로
지어내는 거라고.... 참 재치 있지 않니?
너도 이룸이만했을 때 그랬어. 정말 기발하게 지어낸 꿈 이야기를 들려줬어.
엄마, 아빠는 그게 지어낸 거라는 걸 다 알면서도 신나서 맞장구 쳐 줬지.
그 덕에 니가 이렇게 잘 큰거야.
이룸이도 그렇게 좀 키워보자"
"쳇... 내가 멋진 오빠라서 참아준다"
그날의 다툼은 그렇게 지나갔다. 전 같으면 끝까지 동생 편만 든다는 둥,
엄마는 늘 자기만 잘못했다고 한다는 둥, 억지를 부리며 소리를 지르고 난리를
쳤을 것이다.
도무지 싸움이 될 것 같지 않은 상황을 끝내 싸움으로 몰고 가는
아들 때문에 무던히도 속을 끓였는데 이젠 불끈하고 부르르 해도
더 이상 나가지 않고 수그러든다.
나도, 녀석도 그만큼 자란 것이다.
아들과 수없이 싸우고, 다투고, 티격태격하며 살아왔다.
오죽하면 얼마 전 생일 카드에도 아들은 이렇게 적었더라.
- 엄마.. 맨날 다투고, 삐지고, 티격태격하지만 그래도 엄마를 사랑해요 - 라고.
우린 참 열심히 싸웠다.
싸우고, 울고, 소리지르고, 서로 생채기 내고, 그리고 나서 사과하고, 보듬고,
끌어안으며 지내왔다.
서로를 믿기 때문에 싸울 수 있다는 말이 있다.
밀어낸 만큼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탄성을 믿기 때문에 싸울 수 있다는 것이다.
신뢰의 탄성이 없으면 쉽게 싸울 수 없다.
우린 징글징글하게 싸웠지만 그렇게 싸우고도 여전히 서로를 좋아할 수 있었으니
생각해보면 참 잘 지내온 시간들이다.
초등대안학교 졸업반 아이들에게 이 시기는 중등대안학교를 알아보는 시간들이다.
필규도 엄마 아빠와 여러 곳의 학교를 돌아보며 탐험하며 체험을 했다.
자기의 미래가 달린 중요한 선택을 부모와 함께 해 나가는 과정을 겪는 동안
부모에 대한 신뢰도 더 생긴 듯 하고, 자기를 염려하고 좋은 학교를 선택해주고 싶은
마음을 이해하는 것도 같다.
스스로도 졸업 이후의 모습에 대해서 이런 저런 생각이 많아졌을 것이다.
함께 있을 땐 자주 싸우지만 중요하고 큰 일 앞에서는 변함 없이 우린 한 팀이라는 것을
아들은 이제 알고 있다. 믿고 있다.
커 갈수록 고맙고 든든하다.
그래도... 앞으로는 조금씩 덜 싸우자 아들아.
니 키가 엄마 키를 넘어서면서부터는 엄마 버럭도 약발이 잘 안받는 것 같다고 녀석아...ㅠㅠ
몸도 마음도 나날이 쑥쑥 커가는 아들을 보면서
신체의 성장은 멈췄지만 인격 성장은 부단히 노력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그러니까 서로 좀 잘 커 나가자.. 아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