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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시절, 아빠를 따라 '화진포'에 다녀온 일이 있었다고 들었지만 기억은 거의 없다.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동해바다는 고등학교 2학년때 수학여행에서 만난 경포대 바다였다.

관광버스에서 내린 수백명의 여고생들이 한꺼번에 몰려든 바닷가는 그래도 그래도 넓었다.

그 넓은 바도에 완전히 압도당했다. 대단했다.

보이는 끝까지 바다였다.

인천에서 자랐지만 바닷가를 거의 가보지 못하고 자란 내게 그 날의 동해바다는

처음 만난 시퍼렇고 살아있는 젊은 바다였다.

그래서였을까.. '바다'라는 이야기만 들으면 내 기억이 달려가는 곳은 경포대다.

 

대학시절 친구들과 낡은 차를 끌고 한밤중의 경포대를 찾은 적이 있다.

겨울이었다. 온 세상이 얼어붙었는데 바다는 여전히 시퍼렇게 살아서 몸부림치고 있었다.

검은 어둠 저편에서 끝없이 몰려오는 파도앞에 서서 난 또 할말을 잃었다.

힘 넘치는 밤 바다는 무서웠고, 동시에 너무나 근사했다.

잊을 수 가 없었다.

직장에 다니던 때도 휴가때 제일 많이 갔던 곳이 동해바다였다.

'경포대', '낙산', ' '하조대'....

그 바다들을 사랑했다. 늘 그리워했다.

그래서였을까... 결국 나는 강릉이 고향인 남자를 만나 가정을 이루었다.

그리고 바다를 좋아하는 세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첫 아이를 품에 안고 처음으로 동해바다를 보여주었던 때가 언제였을까.

"아빠는 이 바다의 기운을 받고 태어나서 자랐지. 니 몸 속에도

동해바다의 시퍼런 기운이 숨 쉬고 있을꺼야"

이런 말들을 들려주던 기억이 난다.

그 아이를 처음으로 모래사장 위에 내려 놓던 날, 아이가 그 모래 위를

아장아장 걸어 파도쪽으로 향해 가던 날, 처음 제 발등을 적시던 바닷물에

놀라서 소리지르던 순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어린 딸 아이를 안고 천천히 바닷물에 몸을 담그던 젊은 남편의 모습도 떠오른다.

아이가 웃었고 남편도, 나도 웃었다.

막내에게 바다를 느끼게 해주자고, 막내 손을 잡고 함께 바닷물에 들어가겠다고

나서던 큰 아이는 이제 어른만큼 자랐지만 여전히 바다를 좋아한다.

 

강릉에 오면 아무리 바빠도 바닷가에 들리는 일은 빼 놓을 수 없다.

어머님 기일로 내려와 새벽까지 제사를 모시고 고단했던 다음날, 어김없이

아이들과 바닷가를 찾았다. 이번엔 송정해변이었다.

 

흐리고 바람이 많이 불었다. 파도는 거세게 몰아치고 있었다.

바다를 제일 먼저, 제일 신나게 즐긴 건 막내 이룸이였다.

 

바다2.jpg

 

아이를 셋쯤 낳고 보니 아이마다 물에 대한 감수성이 다 다르다는 것을 알겠다.

첫 아이는 바다를 좋아했지만 그만큼 무서워해서 세 돌쯤 되어서야 파도가 제 발을

적시게 했다.

둘째는 물을 너무 무서워해서 어릴땐 머리감기는 것도 전쟁이었다.

그래도 바다는 좋아했다.

막내는 어릴때부터 물을 좋아했다. 샤워를 하다가 눈에 물이 들어가도 까르르 웃었다.

올 여름 마당에 쳐 놓은 대형 풀장에서 매일 노는 동안 물 속에서 눈을 뜨고 놀 줄도

알게 되었고, 잠수도 즐기에 되었다.

이날 파도가 너무 거세서 나도 무서워 가까이 가지 못했는데 이룸이는 제일 먼저 신나게

파도 속으로 뛰어 들었고 몸을 적시며 즐거워했다.

 

바다 4.jpg

 

셋이서 번갈아 파도와 장난치고, 우르르 몰려와 다리를 적시고 밀려가는 바닷물을 따라가며

웃는 모습도 이뻤지만 엄마 눈에 오래 남는 풍경은 바닷가에서 노는 동안 내내

동생 손을 꼭 잡고 있던 윤정이의 뒷모습이었다.

어딜 가나 오빠와 동생을 챙기는 둘째의 마음이었다.

 

바다3.jpg

 

나보다 커졌지만 여전히 엄마와 어깨동무 하는 것을 좋아하는 아들과

바다를 좋아하는 두 딸들이 있어 참 좋다.

 

그렇게 바다에 열광하던 시조카들도 중학교, 고등학교에 들어가자 바다에 시들해졌다.

올 여름 가족 휴가때에도 바닷가에 갔지만 그늘막 안에 앉아 휴대폰을 들여다보거나

지루한 표정으로 파도를 바라볼 뿐 누구하나 선뜻 물 속으로 뛰어들지 않았다.

발에 모래 묻는 것도 싫고, 옷이 젖는 것은 더 싫은 아이들은 우리 아이들이 바다에 들어가

노는 모습을 이따금 바라만 보았다.

모든 것이 다 한때구나. 바다에 열광할때, 바다가 시시할때 다 그런 때가 있겠지.

내 아이들은 아직 바다가 좋은 시절에 있고, 너희들은 이미 그 시절을 지나온 것 뿐이지.

 

그래서 좋다.

아직 바다를 좋아하는 아이들이 있어, 이 나이에도 옷 입은채 바닷물에 몸을 적실 일이

생기는 것이 좋다.

큰 아이가 시들해져도, 바닷가에 와서도 스마트폰에 더 열중하게 되는 날이 와도

내겐 아직 어린 두 아이가 있으니 더 오래 이 바다를 누릴 날이 있겠지.

늦게 아이를 낳아 기르는 일도 나쁘지 않구나.

 

먼 길을 달려, 높은 산을 넘어 비로소 만나는 바다..

해마다 우리의 모습도, 바닷가의 풍경도 조금씩 달라지지만 바다는 변함없이 넓고

파도는 끝없이 밀려오고 수평선은 아득하다.

매년 다른 추억들을 만들어가며 넓은 바다를 항상 마음 속에 품고 자라는

아이들이었으면 좋겠다.

 

추석엔 가을바다를 보러 오자.

 

바다색이 또 깊어져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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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순화
서른 둘에 결혼, 아이를 가지면서 직장 대신 육아를 선택했다. 산업화된 출산 문화가 싫어 첫째인 아들은 조산원에서, 둘째와 셋째 딸은 집에서 낳았다. 돈이 많이 들어서, 육아가 어려워서 아이를 많이 낳을 수 없다는 엄마들의 생각에 열심히 도전 중이다. 집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경험이 주는 가치, 병원과 예방접종에 의존하지 않고 건강하게 아이를 키우는 일, 사교육에 의존하기보다는 아이와 더불어 세상을 배워가는 일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고 있다. 계간 <공동육아>와 <민들레> 잡지에도 글을 쓰고 있다.
이메일 : don3123@naver.com      
블로그 : http://plug.hani.co.kr/don3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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