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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전에 모자에 얽힌 사연을 올린 후 정말이지 열화와 같은 반응들이 몰려왔다.
근래 이렇게 뜨겁게 댓글이 달렸던 적이 있었던가 싶게

내 블로그 이웃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는데 대부분 내 감정에 공감하는 내용이었다.
즉, 내가 겪은 감정들이 보통 부부사이에 아주 흔하게 일어나는 현상이었던 것이다.
더불어 내가 남편에게 요구한 '엎드려 절 받기'데이트에 대한 관심도 엄청났다.

다들 덧글 말미에 잠실에서의 데이트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려달라는 부탁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정말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며 바로 어제 9월 8일 목요일,

나는 잠실로 남편을 만나러 나섰다.
나가기 전에 옷장을 뒤져가며 최대한 멋지게 보일 수 있는 옷차림에 신경을 쓴 것은 물론이다.
뭐.. 내가 가진 옷이 다 거기서 거기인지라 특별할것도 없지만

그래도 이옷 저옷 걸쳐가며 나름 꽤나 신경을 썼다.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데이트인데.. 아무렴.. 이쁘게 하고 나가야지..
너무 화려한 것 같아서 거의 걸쳐보지 않았던 목걸이까지 하고,

물론 그 말많고 탈 많은 모자를 갖추어
쓰고 나는 용기백배하여 집을 나섰다.

전철에 오르자 자리에 앉아있던 몇몇 여자들이

내 옷차림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살피는 기색을 보니
남들 보기에도 제법 그럴듯 했나보다 싶어 목에 힘이 빳빳하게 들어갔다.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를 들여다보며 잠실까지 도착할때까지는 모든게 다 완벽했다.
개찰구를 빠져 나오려고 교통카드를 가져다 댔더니

'잔액부족입니다'라는 기계음이 들려왔다.
`아차!' 싶었다.


전철을 자주 이용하는게 아니다보니 교통카드 잔액엔 늘 무신경하다.

그래서 가끔 이런 일이 생긴다.
바로 옆에 있는 충전기계에 가서 현금을 넣고 충전하면 되는데

문제는 내가 항상 수중에 현금이 없다는거다.

체크카드 한 장과 남편 명의의 신용카드 한 장만 들고 다니는데다

대부분 동네에서 학교와 집을 오가다보니 현금 쓸 일이 거의 없다.

어쩌다 몇 만원 씩 찾아 놓으면 어느새 슬금 슬금 써 버리고 지갑이 비어 버린다.

그리고는 또 잊어 버린다.
신용카드가 몇 장이나 되면서도 지갑엔 늘 두둑한 현금을 챙겨서 다니는 남편은  

수중에 급할때 쓸 비상금 만 원 한 장 없는 나의 이런 허술함을 아주 싫어한다.
몇 번이나 난처한 상황을 겪었으면서도 내 덜렁대고 허술한 면은 나아지지 않았다.
그덕에 또 곤란한 지경이 된 것이다.
천원만 있어도 위기를 넘길수가 있었는데 내 가방엔 50원짜리 동전 두 개뿐 이었다.

아아... 잠시 망설였다.
`남편한테 말하면 엄청 짜증 내겠지. 그러면 가뜩이나 포스팅 때문에 심기가 어지러운 남편이
화를 많이 내겠지. 사방에 큰 소리 치고 나온 데이트는 시작도 전에 말짱 꽝 되겠구나.. 어쩌지..
지나가는 인상 좋은 남자한테 천원만 빌려달라고 해볼까..'
아주 잠깐 나는 이런 말도 안되는 생각까지
해 보다가 단념하고 겸손하게 남편에게 카톡을 보냈다.

"여보.. 나.. 잠실에 왔는데...
교통카드에 잔액이 부족해서 못 나가고 있네..
돈은 한 푼도 없고...^^
빨리 와서 나 좀 구해 주세요^^..."

최대한 비굴하게  나를 낮추어 내 상황을 알렸다.
잠시 후

"네..." 

라는 남편의 답글이 도착했다.
그 짧은 한 마디 안에 담겨있는

남편의 짜증과 분노, 어처구니없어서 굳어버린 얼굴표정이 고스란이
전해져 왔다. 남편은 이런 상황.. 아주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다.
쳇... 망했다...

잠깐의 시간이 흐른 후 고개를 들어보니 남편이 바로 개찰구 밖에 서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생긋 웃었는데 남편은 굳은 얼굴로 나를 외면하며 돈만 내민다.
나는 건네받은 돈으로 바로 충전을 하고 개찰구를 빠져 나왔다.

"여보.. 미안해.. 화 났어?"
"... 뭐 먹을래..."
"아이... 미안해.. 덜렁거리고 잘 못 챙기는 마누라땜에 화났지?
그래도 좀 웃어봐. 여보.. 마누라 보니까 좋지 않아?"
".. 안 좋아"
큭큭.. 난 웃었다. 신경질 날 만도 하지. 도대체 같은 실수 매번 하는 마누라가 답답하겠지.
그래도 어쩌나.. 내가 이런 사람이니...

표정 없는 남편 팔을 붙잡고 나는 살랑살랑 걸었다.
"여보, 나 어때? 잘 어울려? 나 엄청 신경쓰고 나왔잖아.."
남편은 대답이 없이 걸음만 서둘렀다.
"속으로는 이쁘다고 생각하는거지? 크크"
남편의 무반응과 상관없이 나는 기분 좋았다. 나쁠게 뭐 있나.
평일 점심에 한껏 꾸미고 잠실까지 나와 맛난 음식 먹으러 가는 길인데 당연 기분 좋지.

우리는 유명하다는 삼계탕집에 나란히 앉았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건네는 건 물론 나였다.

남편은
"응.. 그래... 뭐?.. 됐어... 빨리먹어... 아니...."
대여섯 단어로 한 시간 반의 대화를 이어 나갔다.

백 서른 두 마디의 마누라의 이야기를
단 여섯 단어로 갈무리 하는 놀라운 신공이여...
그러거나 말거나 오랜만에 먹는 삼계탕은 맛있었고,

나는 남편의 무뚝뚝함을 즐겼으며
식사 내내 수많은 이야기들을 쏟아 내었다.

다 먹고 나오면서 모처럼 부부 사진 셀카로 찍을까? 했더니 절대 싫단다.
흥.. 같이 찍은 사진 몇 장도 안되는데 이럴때 셀카라도 찍으면 좀 좋아.. 싶었지만
두 번 권하지 않았다.

싫다는데 할 수 없지.. 그럼 내 사진 좀 찍어줘.. 블로그에
후기 올려야한다고.. 잘 나오게 좀 찍어봐..


남편은 번화한 쇼핑센터 한 가운데 서서 나를 자기의 스마트폰 카매라로 찍어 주었다.
흐릿하게 나와서 이 지면에 올리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남편은 거부하지 않고
찍어주긴 했으니 다행이다 생각했다.

남편은 다시 직장으로 들어가고

나는 오래 벼르던 신발 한켤레 사러 롯데 백화점쪽으로 걸어 나왔다.
남편 직장이 잠실이라 해도 백화점을 들릴 일은 거의 없었다.

나는 그런 곳에서 쇼핑 자체를 안 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이번엔 마침 신발을 사야했고,

마침 지하 아케이드에 고급 브랜드화
할인 대잔치가 열리고 있어 맘 놓고 구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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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들 없이 여유있게 물건을 고르는 게 얼마만인지,

완전히 신난 나는 전시된 구두들을 다 신어 볼 뻔 했다.

수없이 신고 벗고 고르고 고르다 결국 두 켤레를 한꺼번에 샀다.
이런 곳에 자주 올 수 도 없는데다 제대로 된 신발이

하나도 없어서 망설이지 않고 한번에 질러 버렸다.
신발이고 가방이고 하나를 사면 그것만 쓰곤 했다.
옷에 맞추어 가방이나 신발을 갖춘다는 것은 애시당초 내 사전에 없었다.
여름 내내 샌들 한켤레로 지냈는데 가을이 되서 샌들을 치우려니 마땅한 신발이 없었다.
학부모회장이 되고보니 교육청 회의도 잦고

교육이며 행사도 많아 점잖은 차림새를 자주 하게 되는데

도무지 어울리는 신발이 없는 것이다.
사면 되는데 신을만한 멀쩡한 신발을 두고 또 산다는게 나는 참 되지 않았다.
그런데 지난번에 모자를 사면서 마음이 달라졌다.
이젠 필요한 거면 맘에 드는 좋은 것을 사고 ,

맘에 들면 한 켤레 쯤 더 사도 되지... 싶은 것이다.
그럴만한 능력도 있고, 그럴만한 나이도 들었는데

이런 생각 드는데 그토록 오랜 세월이 걸리다니..
나는 도대체 어떻게 살아온건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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굽이 그다지 높지 않지만 아주 편안한 단화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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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발이 아주 편한 구두를 사고 몹시 행복했다.
9만원짜리 신발을 한번에 두켤레나 사고 남편에게 미안해..돈 많이 써서.. 하며 톡을 보냈더니
잘 하셨어요.. 어련이 알아서 하셨겠어요.. 하는 답이 왔다.
남편은 늘 내게 필요한걸 사라고 한다. 망설이다 사지 못하는 쪽은 나였다.
이젠 그렇게 살지 말아야지..
지난번 모자를 산 이후.. 난 삶에서 제법 큰 방향을 바꾸었다.
내게 좋은 것을 주고 싶다는 마음을 허락한 것이다.

그렇다고 사치할 사람도 못 되지만 크지 않은 욕망은
건강하게 채우며 즐겁게 살아도 된다고 나는 내게 허락했다.
이 나이에 말이다.

새 신을 신고 나는 한층 신나서 돌아왔다.
사당에서 반대로 가는 전철을 타는 바람에 명동까지 갔다가

아차 하고 되돌아 오느라 무척 오래 걸렸지만

이 역시 남편이 아주 싫어하는 나의 덜렁거림이지만

나는 나의 이런 면이 여전히 재미있다.
덕분에 한강의 소설을 끝까지 다 읽었다.

한껏 갖춘 차림으로 두 딸들을 데리러 운동장에 나타났더니 사방에서 이렇게 멋지게 차려 입고
어딜 다녀오는 길이냐며 반색을 한다. 나는 또 신이나서 오늘의 무용담을 들려주고 깔깔 웃었다.
"울 남편.. 마주 앉아 한 시간 넘게 밥 먹는데 여섯 마디 하더라..푸하하" 했더니
그게 정상적인 부부라며 다들 고개를 끄덕인다.

딸들은 내 새 신발을 서로 신어보겠다며 차 안에서 한바탕 소란을 피웠다.
나는 집으로 돌아와 늘 입는 옷으로 갈아입고 부지런히 저녁 준비를 했다.
남편은 마을 회의가 있어 밤 열두시 가까이 되서 오는 바람에 모처럼의 데이트에 대한 소감도
물어볼 새가 없었다.

다시 남편은 새벽같이 출근을 했고, 금요일이 시작되었는데
한겨레신문사 육아 웹진 베이비트리 담당 기자가 전화를 걸어왔다.
내가 올린 모자 관련 글이 너무 재미있었다며 내 마음에 십분 공감한다는 거다.

그런데 남편 입장에서도 뭔가 할 말이 있지 않을까, 사정과 반론이 있지 않을까..

하는 얘기가 데스크 선배들께서 하셨단다.

그래서 남편과 얘기해보고 싶다는 것이다.

물론 사건이란 누구의 시각에서 재구성하느냐에 따라서 아주 달라질 수 있다.
남편도 분명 하고 싶은 말이 있을 것이다.

이런 요구에 잘 응하는 사람이 아니라 과연 말을 꺼낼까..
반신반의 했는데 남편과 통화를 한 기자가 톡을 보내왔다.

사랑을 표현하는 남편만의 방식이 있는데

마누라는 늘 자기 방식으로 표현할 것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더불어 남자들의 힘든 사회생활에 대해서도 토로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남편 입장에서 반론을 나와 상의해서 보내주기로 했단다.
오호.. 이건 완전 놀라운 일이다.
그리고 정말 재미있겠다.

항상 나는 내 글에 대해서 남편이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표현해주길 바랬는데

남편은 늘 입을 다무는 쪽이었다.

직접 글로 쓰지 않더라도 내가 정리해서 쓸 수 있게 말로 해준다니 정말 기대된다.
그리하여 한 편의 글이 일으킨 동그라미는 또 새로운 물결로 이어진다.
그 물결이 일으키는 다양한 파문들을 나는 아주 흥미롭게 지켜보는 중이다.

오늘 남편이 퇴근하면 나는 남편의 입장에 대한 인터뷰를 할 예정이고,

정리를 해서 글을 올릴 것이다.

어떤 이야기가 되든 남편과 나는 서로를 더 많이 이해하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
그것만으로도 이 유쾌하고 신나는 소동은 아주 큰 의미가 될 것이다.

기대하시라..
이야기는 계속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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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순화
서른 둘에 결혼, 아이를 가지면서 직장 대신 육아를 선택했다. 산업화된 출산 문화가 싫어 첫째인 아들은 조산원에서, 둘째와 셋째 딸은 집에서 낳았다. 돈이 많이 들어서, 육아가 어려워서 아이를 많이 낳을 수 없다는 엄마들의 생각에 열심히 도전 중이다. 집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경험이 주는 가치, 병원과 예방접종에 의존하지 않고 건강하게 아이를 키우는 일, 사교육에 의존하기보다는 아이와 더불어 세상을 배워가는 일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고 있다. 계간 <공동육아>와 <민들레> 잡지에도 글을 쓰고 있다.
이메일 : don3123@naver.com      
블로그 : http://plug.hani.co.kr/don3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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