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jpg

 

북촌의 한 공방에서 모자를 샀다.

디자이너가 만든 제품이다. 물론 비쌌다.

 

나는 두상이 예쁘다.

얼굴 대신 두상이 예쁘다고 말 하는 건 참말로 가슴이 쓰리지만 사실이다.

그래서 늘 멋진 모자를 갖고 싶었다.

이 나이에 야구모자를 쓰겠다는 것일리도 없으니 `내 나이에 맞는 우아하고 멋들어진 그런 모자 하나 장만해야지'하는 마음을 오래품고 있었다.

그전까지는 검정 헌팅캡을 자주 쓰곤 했는데 그것도 퍽이나 어울리긴 하지만 아무래도 우아와는 거리가 멀어서 근사한 패도라를 갖고 싶었다.

 

몇 번 쇼핑센터의 모자코너들을 들러 봤지만 내 머리에 딱 맞춤한게 없었다.

앞 뒤 짱구인 나는 보기보다 머리가 커서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들어가는 기성품 모자를 구하기 어려웠다.

 

그러다가 친언니가 북촌의 한 카페에서 여행 사진전을 겸한 행사에 참여하게 되어

모처럼 북촌 나들이를 하게 되었다. 행사 참가 후 시간 여유가 있어 북촌 골목을

거닐다가 모자 공방을 만나게 되었고, 그 가게에서 내 맘에 꼭 드는 모자를 만나버렸다.

고급 소재에 편안하게 들어가고 무엇보다 아주 멋진 핏을 가지고 있었다. 

몇 번을 벗었다 써 보기를 반복하는 동안 일부러 가격을 물어보지 않았다.

완전히 맘에 들면 가격 상관없이 내것으로 하리라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가격을 알았을때 속으로 입이 딱 벌어졌다.

19만원이나 나가는 물건이었다.

 

궁핍했던 어린 시절부터 사회복지사로 일하며 늘 쪼들렸던 직장 생활에 이르기까지

정말 갖고 싶은 물건에 과감하게 투자해 볼 일이 드믈었다.

적은 월급으로 적금 붓고 집에 생활비도 보태다보면 얼굴에 바르는 화장품 하나

비싼 걸 살수 없었다. 사회복지사로 일하며 매일 대하는 빈곤도 내 소비를

위축시켰다. `이렇게 어렵게 사는 사람들이 있는데' 라는 생각이 들면 카페에서 편하게

커피 한 잔 시켜먹는 일에도 마음이 조여들었다.

 

남편을 만나 가정을 이루고 14년간 살면서 경제적으로 비교적 안정적이었다.

적긴 하지만 나도 글을 쓰며 돈을 벌기도 하니 이젠 사치는 아니라도

정말 갖고 싶은 물건쯤 장만하는게 어려운 일도 아니다.

그러나 나는 그게 되지 않았다.

막상 물건 앞에 서면 내 마음보다 가격이 먼저 보이고

그리고는 비싼 물건을 살 때는 죄책감이 바로 들었다.

세상의 가난을 모두 구할것도 아니면서 머릿속으로 그렇게 살면 안된다는

말들이 쏟아지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참 피곤하게 사는 삶이었다.

물욕을 다스리지도 못하면서 맘 놓고 원하는 것을 사지도 못하고

결국 마음에 덜 들고 저렴한 물건을 사 온 후에 몇 번 쓰다 후회하고

내내 그렇게 살아왔다. 그러면서 내 안의 아이는 늘 아쉬웠고 속상했다.

 

그런데 무려 19만원이나 하는 모자를 산 것이다.

내겐 정말이지 어마어마한 사건이었다.

가방도 2만원이 넘지 않는 구제품이거나 동네 바자회에서 몇천원 주고 산 것을 들고

다니는 내가, 외투 정도가 아니면 10만원이 넘는 옷은 엄두도 안 내는 내가, 정말 필요한

물건도 아니고 그저 패션 아이템에 이렇게 고가의 돈을 쓴 것은 태어나서 처음 이었다.

그것도 한 푼 에누리 없이 더 싼 제품을 찾지도 않고 한번에 그 가격으로 사 본 일도 처음이었다.

그런데 계산을 하고 머리에 모자를 쓰고 나오면서 나는 너무 너무 행복했다.

`이런 기분... 정말 좋구나..' 싶을 만큼 벅찼다.

 

진작에 해 줘도 되는 것을 내가 내 자신에게 이런 선물 하나 기꺼이 해 주는게 왜 그렇게 어려웠을까. 나도 이쁘고 좋은 물건에 왜 탐이 안 나겠는가. 그런 마음 아주 가끔은 채워주며 살아도 되었을 것을.. 생각하니 스스로가 안스럽기도 하고, 짠하기도 했다.

 

9월에 생일도 있으니 47년을 열심히 살아온 나를 위한 근사한 선물이라 생각하고 날아갈 듯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남편이 퇴근하기만을 기다렸다.

모자 하나 사기까지 마누라의 마음속에 휘몰아쳤던 목잡한 감정이며,

소비에 얽힌 내 짠한 사연이며,

이젠 조금씩 내게도 선물해가며 살고 싶은 소망까지 남편에게

해주고 싶은 얘기들이 산더미같았다.

 

늦게 퇴근한 남편이 저녁을 다 먹을때까지 기다렸다가 나는 참지 못하고 말을 꺼냈다.

"여보, 오늘 내가 모자 하나 샀거든? 한 번 볼래?"

"아니.."

"아니라고? 마누라가 무슨 모자 샀는지 안 궁금해?"

"응.."

난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왜 안궁금해. 어디서 샀는지 어떤 걸 샀는지, 잘 어울리는지 당신이 봐주고 물어봐야지

왜 안 궁금해"

"알아서 샀겠지 뭐..."

 

내내 들떴던 마음이 서늘하게 식어버렸다.

매일 늦게퇴근 하는 남편이다.

저녁상을 물리고나면 애들 씻기고 집안 정리하고 잠자리 들기에 급급한 일상이었다.

주말에는 농삿일이며 집을 돌보는 일로 또 하루가 고단했다.

같이 살아도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눌 시간이 없었다.

생활은 하지만 소통은 없고, 필요는 나누지만 공감은 없는 날들이 계속

이어지는 동안 나는 허전하고 외로왔다.

 

그 날은 금요일이었고, 모처럼 북촌 나들이를 했고, 맘에 드는 모자도 샀으니

그 날만큼은 모자를 계기로 밀렸던 수많은 이야기들을 나누고 싶었다.

사소하지만 친밀하고 서로에 대한 관심과 공감과 애정을 나누는 그런 시간을

나는 간절하게 기다려왔던 것이다.

 

그런데 도무지 무심하고 무감각한 남편의 반응에 마음이 얼어붙었다.

꾸역 꾸역 모자를 가져와 남편 앞에서 써 보았지만 남편은 형식적으로

힐끗 쳐다보곤 끝이었다. 속에 품어왔던 이야기는 단 한 마디도 꺼내지 못했다.

 

직장 생활에 피곤한 남편은 퇴근하면 집안이 휴식과 재충전의 공간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 안다.

그냥 쉬고만 싶은데 마누라가 공감과 동의와 반응을 요구하는 것이 더 피곤할 수 도 있다.

비싼거 샀다고 잔소리 안 하는 것 만으로도 다행이라고 말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래, 안다.

그렇지만 부부란 과연 무엇일까. 부부를 이어주는 것이 무엇일까.

아이들과 생활, 역할, 도리, 책임.. 이런것들 말고 존재와 존재를 긴밀하게 이어주는

것들은 무엇일까.

 

사소하고 작지만 계속 이어지고 주고받는 마음과 감정, 생각과 느낌이

그런 관계가 부부관계 아닐까.

사람은 결국 끝없는 관심에 의지할 수 밖에 없는 존재다. 관심을 주고 관심을 받으며

살아간다. 가장 가까운 관심, 가장 속에 있는 마음.. 그런 것을 주고 받는 관계가

부부 아닐까.

 

연애 3개월만에 결혼하고 바로 첫 아이를 가지고 육아와 출산, 또 출산, 출산으로

이어지는 14년동안 우리 앞에는 늘 함께 해결해야 할 일들이 있었고, 맡아야 할

역할들이 넘쳐났다. 그 틈에 남편과 단 둘이 뭘 더 해보려는 것은 꿈도 못 꾸고 살았다.

단 둘이 여행을 가 본 일도 , 단 둘이 공연을 본 일도 없다. 영화도 딱 두편 같이 보았을

정도다. 애들이 어리니까, 여유가 없으니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워낙 표현이 없는 사람이니까, 마음은 아닐테니까, 이 다음에 여유가 생기면 남편도

달라지겠지.. 그러면서 살아왔다.

 

이제 세 아이들 모두 어느정도 컸고, 마음을 먹으면 우리 둘이 나눌 수 있는 시간도

만들 수 있는데, 그걸 다 떠나서 그저 서로의 생각과 감정을 나누는 일에도

아직 남편은 관심이 없다.

나는 원래 그런 사람이잖아.. 하는 말로 숨는다.

내겐 핑계같다.

 

내가 남편과 지구 온난화 문제를 토론하자는 것도 아니고 사드배치에 대해

논하자는 것도 아니다. 그저 서로의 하루를 물어주고, 작은 변화에 관심을 가져주고

소소한 표현들을 주고 받으며 같이 느끼며 살기를 바라는 것이다.

내 바램이 지나친 것일까.

 

어떻게 이런 것들을 시작해야 할지 서툴 수 있다. 그럼 그저 마누라의 말에

조금 더 성의있게 반응만 해주어도 좋다.

그 다음 대화가 이어질 수 있도록, 그저 맞장구라도, 한마디 질문이라도 말이다.

 

주말 내내 나는 화가 났고, 남편은 마누라가 도대체 왜 저렇게 입이 나와있는지

몰라서 화를 냈다.

나는 심각한데 남편은 도무지 알아채지를 못한다.

 

이 다음에 이 다음에 우리 사이를 채워주던 아이들이 다 떠나고

역할과 책임도 느슨해지고 그야말로 우리 둘만 같이 살게 될때

그때 나는 이 사람과 무엇을 나누며 살게 될까. 우리 사이엔 무엇이 있을까..

작은 기미로 10년 앞 걱정을 땡겨 하는 나는 이런 상상까지 하며 몹시

공허해졌던 것이다.

 

내 사진.jpg

 

그러니 남편님아...

제발 긴장 좀 하시라. 슬슬 갱년기를 향해가는 마누라를 조금 더 돌아봐주시라.

그냥 한 두마디라도 마누라의 생활을 기분을 물어봐주시라.

마누라의 기분과 설렘, 속상함과 쓸쓸함에 동참해주시라.

난 여전히 당신이 궁금하고 당신을 알고 싶단 말이다.

 

한바탕 눈물 바람을 하고, 마음 속으로 막장 소설 여러편 쓴 후에

나는 내 비탄의 핵심을 남편에게 낱낱이 털어 놓았다.

그리고 노력해줄것을 요구했다. 남편은 그저 또 알았다고만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진심으로 받아들인건지, 지켜볼 일이다.

 

그리하여...

나는 이 사연 많은 모자를

한 여름만 제외하고 주구장창 쓰고 다니기로 했다.

남편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열정적인 찬사를 보내준 이 모자를 말이다.

그리고 남편에게 요구했다.

멋들어진 모자 쓰고 나타날테니 점심에 날 직장 근처로 초대하라고 말이다.

엎드려 절 받기라도 난 꼭 그래야겠다.

 

그래서 내일.. 난 이 모자쓰고 잠실의 남편 회사 앞으로 맛난 밥 먹으러 간다.

 

남편님아... 우리, 좀 사이좋게 지내자,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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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순화
서른 둘에 결혼, 아이를 가지면서 직장 대신 육아를 선택했다. 산업화된 출산 문화가 싫어 첫째인 아들은 조산원에서, 둘째와 셋째 딸은 집에서 낳았다. 돈이 많이 들어서, 육아가 어려워서 아이를 많이 낳을 수 없다는 엄마들의 생각에 열심히 도전 중이다. 집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경험이 주는 가치, 병원과 예방접종에 의존하지 않고 건강하게 아이를 키우는 일, 사교육에 의존하기보다는 아이와 더불어 세상을 배워가는 일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고 있다. 계간 <공동육아>와 <민들레> 잡지에도 글을 쓰고 있다.
이메일 : don3123@naver.com      
블로그 : http://plug.hani.co.kr/don3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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