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GP6430.JPG » 신혼여행 사진. 파타야에서의 행복한 시절.

 

 

“맥주 한잔 하는데 치킨이 부족하네. 지금 갈테니 굽네치킨 먹을까?”

 

남편은 치킨을 좋아한다. 삼계탕으로 먹고, 닭볶음으로 먹어도 또 치킨으로 닭을 먹고 싶은가보다. 전생에 닭과 아주 깊은 인연을 맺은 게 틀림없다. 남편은 중년의 뱃살을 빼야한다고 항상 말은 하지만 치킨의 유혹을 쉽게 떨치지 못한다. 남편의 유혹을 나 역시 물리치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러나 이 날은 공교롭게도 이 문자를 보낸 시간이 밤 11시 반. 모처럼 아이들과 신나게 놀아주고 아이들과 함께 잠들어 문자를 보지 못했다.
 
그런데 새벽 3시께 눈이 자동으로 떠졌다. 남편이 들어왔는지 확인해보려 남편 방을 보니 불이 환하게 켜져있다. 들어가보니 남편이 잠을 자지 않고 뭔가 하고 있다.

 

“여보~ 왜 잠도 안 자고 그러고 있어? 나 문자를 못봤네. 잠들어버렸어.”
“어. 술자리에서 기분이 별로 안좋아서 자리 뜨려고 문자 보냈지. 그런데 당신 답도 없으니까 좀 있다 나왔어.”
“왜~ 무슨 일 있었는데~ 누가 당신 기분 나쁘게 만들었어?”
 

 

그렇게 시작된 얘기는 2시간이 넘게 진행됐다.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무수한 사람들로부터 상처를 받을 수 있다. 남편 역시 자신이 상대방을 생각하는 만큼, 상대방이 자신을 배려하고 생각해주지 않아 어떤 사람에게 많이 섭섭했던 모양이다. 사람으로부터 받은 상처는 사람에게 치유받아야 한다. 왠지 이 날은 내가 남편의 편이 되어주고 싶었다. 객관적으로 상황을 분석해서 설명해주기보다 그저 남편의 편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실컷 남편에게 상처준 자를 욕해주고, 배고프다는 남편에게 수박을 잘라줬다. 자신의 마음에 들어있던 섭섭한 마음을 누군가에게 얘기하고 나니 남편은 기분이 한결 좋아진 듯 보였다. 수박도 맛있게 먹었다.
 

마침 전날 ‘한겨레-마포구 부모특강’에서 나는 좋은 얘기를 많이 들었던 날이다. 나는 남편에게 일어서기 전 이렇게 말했다.
 

“여보, 오늘 특강에서 취재하면서 들은 얘긴데 말야. 모든 사람의 인생에는 번뇌의 총량의 법칙이 있대~. 한 사람이 자신의 인생에서 겪을 수 있는 번뇌는 총량이 정해져 있다는 거지. 그래서 지금 자기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이 나를 힘들게 하려고 하는 게 아니고, 내 번뇌의 총량을 채우기 위해 그렇구나 라고 생각하면 된대. 이렇게 번뇌를 겪고 나면 나중에 겪게 되는 번뇌가 줄어들거야. 그러니까 힘내요. 그리고 그런 말도 들었어. 복은 하늘에서 내려온다네. 그 복을 받으려면 사람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가야 있어야 된대. 이렇게. 웃고 있어야겠지. 시옷자처럼 입을 이렇게 하고 있으면? 복이 미끄러져나간대요. 나이가 들수록 입에서 턱까지의 관상이 중요하대요. 잘 웃으면 턱 아래쪽이 발달해서 관상이 좋아진대요. 웃으면 건강도 좋아지고. 이런 저런 생각하지 말고 푹 자요.”
 
평소 같으면 내가 옆에서 주저리주저리 얘기하는 걸 귀찮아하고 주의깊게 듣지 않는 남편이 내 얘기를 듣더니 피식 웃는다.
 
“당신 입꼬리는 안 올라갔는데? 난 이렇게 올라갔다. 뭐.”
“어머. 무슨 말야. 나처럼 웃고 사는 사람이 어딨다고? 별꼴이야 정말. 당신 입이나 관리 잘해. 말년 운수 좋아지게.”
 
남편의 기분이 좀 풀어진 것 같아 내 마음도 뿌듯했다. 잠을 자러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가면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야~ 양선아. 많이 컸다. 이렇게 남편과 대화도 잘 할 줄 알고. 제법 철이 들었어.’ 라는 생각이 들었다.

 

IMGP6744.JPG » 신혼 여행 때 사진. 요트 위에서 한가롭게 여유를 만끽할 때의 사진이다.
 
아침에 일어나 남편에게 선물을 하나 안겼다. 바로 한겨레 근속 10주년 기념으로 회사에서 내게 준 10만원짜리 백화점 상품권을 남편에게 내밀었다.
 
 
“여보. 오늘 백화점 가서 여름 티라도 하나 사요. 오랜만에 쇼핑하면서 기분 풀어요. 내가 10년동안 열심히 일한 댓가인데, 당신에게 선물하는거야.”
 

남편은 말없이 웃으며 그 상품권을 받았다.
 
“야~ 나 청바지가 다 안 맞아서 청바지 하나 사야겠다는 생각했는데 말야. 고마워.”

아침에 출근하면서 저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누군가에게 마음을 베풀고, 호의를 베푸니 내 자존감이 쑥 올라갔다. 오늘 남편에게 보여준 내 행동은 정말 멋졌다고 스스로 생각했다.
 

아침에 출근해 회사 선배에게 이 얘기를 했더니, 선배 내게 이렇게 말한다.
 
“어제 선아는 바자회에서 5천원짜리 여름 티셔츠 사더만, 남편한테는 백화점에서 티 사서 입으라고 했단 말야? 너무한 거 아냐?”라고 핀잔을 준다. 나는 선배를 보고 씩 웃었다. 속으로 난 ‘난 멋진 아내인걸요~’라고 중얼거렸다.
 
 
양선아 기자 anmadang@hani.co.kr

 

# 남편이 "치킨 먹을래?"라고 물어보는 것은 "나 속상한 일 있는데 얘기 들어줄래?"라는 또다른 표현임을 알게 됐다. 남편이 보내는 신호를 평소에 놓치지 않아야겠다. 나 역시 남편이 내가 보내는 신호를 잘못 수신하면 섭섭하므로. 내가 남편에게 바라듯, 남편에게 나도 잘해야겠단 생각이다.

 

# 가끔씩 신혼 여행때 사진을 보면 그때 그 마음이 되살아나기도 한다. 혹시라도 남편이 밉고, 결혼생활이 시큰둥하다면 신혼여행 때의 사진을 들춰보자. 이 글에 사진을 넣으려고 신혼여행 사진 폴더를 오랜만에 열어보니 나 역시 매우 새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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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선아 기자
열정적이고 긍정적으로 사는 것이 생활의 신조. 강철같은 몸과 마음으로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인생길을 춤추듯 즐겁게 걷고 싶다. 2001년 한겨레신문에 입사해 사회부·경제부·편집부 기자를 거쳐 라이프 부문 삶과행복팀에서 육아 관련 기사를 썼으며 현재는 한겨레 사회정책팀에서 교육부 출입을 하고 있다. 두 아이를 키우며 좌충우돌하고 있지만, 더 행복해졌고 더 많은 것을 배웠다. 저서로는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자존감은 나의 힘>과 공저 <나는 일하는 엄마다>가 있다.
이메일 : anmadang@hani.co.kr       트위터 : anmadang21      
블로그 : http://plug.hani.co.kr/anmad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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