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규의 진학식.jpg


지난 토요일 아들이 다니는 대안학교에서  진학식이 열렸다.
상위 과정으로 진학을 하는 아이들과 가족, 교사들이 모두 모여 진학하는 아이를 축하해주고

격려해주는 자리다.
진학식의 가장 중요한 의식은 아이가 읽는 '자기 이야기'다.
진학을 맞이하는 마음을 정리해서 모두 앞에서 발표한다.
매년 이 시간이 정말 감동스러웠다. 스스로 자신의 성장을 정리하고 돌아보는 아이들의

솔직한 글들이 마음을 울리기 때문이다.

필규가 저 자리에 서면 어떤 이야기를 할까.. 궁굼하기도 했다.
예상보다 빨리 그런 순간이 왔고 필규는 쉬는 날 하루 종일 끙끙대며 이 글을 완성했다.
그리고 내게 먼저 보여주었다.

아래는 아들이 쓴 글이다.

- 나는 엄마하고 자주 싸운다. 그리고 자주 화해한다. 지금까지 살면서 거의 매일 그래왔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엄마하고 각별한 사이다. 그것 때문인지 나는 나이에 안 맞게 엄마에게
응석을  많이 부린다.
이러는 내가 바람빛 학당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것의 의미는 나하고 엄마하고 떨어지게 된다는 뜻이다.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제일 긴 시간을  엄마하고 보내면서 많은 것을 같이 하고, 보고, 다녔다.
이제 이런 일을 더 이상 많이 못한다. 아쉽다.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더 잘했을 텐데... 후회된다.
아빠와 동생들한테도 미안하다. 맨날 열 여섯살이나 먹은 놈이 동생들하고 싸우는 것을

보는 게  쉬운 일이 아닐 텐데 다 받아주셨다.

특히 아빠는 나를 제일 많이 참아주시고 내가 잘못할 때도  항상 나를 믿어주셨다.

내가 엄마와 동생들과 싸울 때마다 가장 화가 나는 사람은 지켜보는 아빠 일 텐데 

누구편도 들지 않고 침묵을 지켜주셨던 것이 너무 고맙다
아빠와는 단둘이 많이 못 있어봤다. 회사 때문에 새벽에 나가셔서 밤에 들어오시기 때문이다.
이제 공동생활 수련에 들어가면 더 못 볼 것이다. 그걸 생각하면 마음이 좀 쓸쓸해진다.
 
이렇게 맨날 싸우고, 화해하며 가족들과 살아오다 이제 다른 사람들과 같이 지내야 한다.
지금까지 익숙한 생활을 버리고 낮선 곳에서 처음 하는 공동생활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 같다. 내가 지금 그런 상황 앞에 서 있다.
공부도 어려워지고, 숙제도 많아지고, 해야 할 것도 커질 것이다.
잘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직 부족한 것이 많다.
내가 과연 몫에 맞게 행동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돌아보면 초등학생일 때는 정말 말 그대로 놀기만 했다. 그것 때문에 공부도 똑바로 안 했다.
그리고 무엇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친구도 못 사귀었다.
새들학교에 들어오고 나서부터 조금 달라졌다.
공부도 열심히 하게 되고 친구도 많이 사귀고 말이다.
그런 내게 새들에서 만난 사람들은 내가 내 모습을 바라볼 수 있게 큰 도움을 준 것 같다.
예전에는 그냥 내 멋대로 행동을 했는데 선생님, 선배들이 내 잘못된 행동을 얘기해 준 것들이
그때는 잘 못 느꼈는데 생각해보면 그런 얘기들이 나를 알아가는데 도움이 많이 되었다.
특히 선배들을 보면서 정말 멋있다 라고 생각한다. 노래도 척척 지어내고, 운동도 잘 하고,
그밖에도  거의 모든 것을 잘 해낸다. 나로선 꿈도 꾸기 어려운 일인데 말이다.
이제 내가 그 선배들과 같이 지내게 되었다. 걱정도 되고 설레기도 한다.
빨리 선배들에게 동화되었으면 좋겠다.
 
내 단점은 고집이 세다는 것이다. 한번 습관을 들이면 쉽게 바꾸지 않는다.
점 역시 고집이 센 것이다. 한 번 하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끝까지 해 내려고 노력한다.
내게 어떤 일이 주어지면 처음에는 하기 싫어서 툴툴대면서도 결국에는 끝까지 한다.
장점인지는  모르겠지만 조금 더 철 들면 처음부터 좋은 마음으로 잘 해내게 될 지도 모른다.
공동생활을 하게 되면서 내 단점과 부족한 면들이 더 나아지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
 
새들학교에 와서 2년을 보냈다. 즐거운 일도 있고, 하기 싫었던 일들도 있었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축제때 한 연극이.
내가 그렇게 큰 무대에 올라간다는 것은 예전의 나라면 상상도 못하는 일이었는데
올라가서 생각보다 잘 해낸 것 같다. 사실 말 한마디도 못 할 줄 알았다.
 
이제 가족들과 떨어져 다른 사람들과 지내게 된다는 것이 아직은 많이 낯설다.
그래도 기대가 되는 것은 아직 한번도 다른 사람들과 같이 지내본 적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집에서처럼 늦잠을 못 자는 것이 공동생활에 대한 걱정의 절반이다.
 
바람빛 학당에 들어간다는 것은 부담이 크다. 그렇지만 내가 이 자리에 서 있을 수 있는 것은 선
생님들이 나를 믿어주셔서 일 것이다.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
마음의 부담만큼 커지는 그 큰 책임을 잘 지고 갈 수 있으면 좋겠다.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서 있을 수 있도록 잘 키워주신 엄마, 아빠, 같이 싸우면서 자란 동생들,
함께 놀고 공부해온 친구와 동생, 선배들, 그리고 가르쳐 주신 선생님들께 감사드린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나를 도와주고 응원해준 만큼 열심히 하겠다. -

- 나는 엄마와 각별한 사이다 -
라는 문장에서 눈물이 터졌다.
아들의 마음이 고스란했다. 아들은 그렇게 가깝게 지냈던 가족과 떨어져 살게 된 것이
슬프기도 하고, 새 생활이 기다려지기도 하는 마음을 담담하게 적었다.
이 글은 아들이 태어나서 적은 가장 긴 글이었다.

진힉식이 열리는 곳, 단상에 앉아 있는 아들이 가장 잘 보이는 앞자리에 앉아

아들이 글을 낭독하기도 전 부터 나는 울고 있었다.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기쁘고, 대견하고, 뿌듯한데 자꾸 눈물이 났다. 아들은 나와 눈을 마주치고는 고개를 숙였다.

애써 참았을 것이다. 붉어진 얼굴만 보아도 마음이 보인다.

아들은 나처럼 울지않고 제 글을 다 읽었다.
우리가 지나온 시간이 그 글 속에 다 있었다.

아이들이 낭독이 끝나면 부모가 나와 소감을 전하는 시간이 있다.
나는 단상에 올라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목부터 메었다.

' 제 인생에 많은 남자들이 있었으나 제 뒤에 앉아 있는 이 남자만큼 나를 많이 크게 한 남자는
없었습니다. 자식을 여럿 낳으면 그 중에 꼭 나를 가르치는 스승이 한명 있다는 말이 있는데
내게는 아들이 그런 스승이었습니다.
이 아이를 키우며 내 사람됨의 모든 낱낱을 볼 수 있었습니다. 너무 힘들었지만
내가 이만큼의 사람이 된 것도 모두 아들 덕분 입니다.

너무 엄마에게 매달리는 아들이어서 언제쯤 내 품을 떠날까, 언제쯤 벗어날 수 있을까.. 바래왔는데
늘 아들이 내게 너무 의지한다고 생각했었는데 아들의 진학을 갑작스레 마주하고 보니
내가 그동안 아들에게 얼마나 의지하고 있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아들로부터 떨어지는 연습을 저도 하게 되었습니다. 두 사람 모두 반듯하게
잘 설 수 있게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제가 아들을 키우는 시절은 끝났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아들은 다른 관계가, 다른 만남이 키울 겁니다.
제 아들을 잘 부탁드립니다.'

울며 웃으며 이런 말들을 나는 늘어 놓았다.
따뜻한 박수 속에서 진학식은 끝났고 아들과 나는 서로 오래 안아주었다.

다음주부터 아들은 공동생활에 들어간다.
새로운 많은 시간들이 아들과 나에게 올 것이다.
아들도 나도 잘 크고 싶다.
역시 좋은 시간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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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순화
서른 둘에 결혼, 아이를 가지면서 직장 대신 육아를 선택했다. 산업화된 출산 문화가 싫어 첫째인 아들은 조산원에서, 둘째와 셋째 딸은 집에서 낳았다. 돈이 많이 들어서, 육아가 어려워서 아이를 많이 낳을 수 없다는 엄마들의 생각에 열심히 도전 중이다. 집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경험이 주는 가치, 병원과 예방접종에 의존하지 않고 건강하게 아이를 키우는 일, 사교육에 의존하기보다는 아이와 더불어 세상을 배워가는 일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고 있다. 계간 <공동육아>와 <민들레> 잡지에도 글을 쓰고 있다.
이메일 : don3123@naver.com      
블로그 : http://plug.hani.co.kr/don3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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