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03831_20170417.jpg » 지난 2월6일 세종 온빛초교 대강당에서 ‘아하! 헌법마당’ 교육을 마친 학생들이 헌법 1조 1항을 활용해 카드섹션을 펼치고 있다. 우리헌법읽기국민운동본부 제공

 

2016 11, 이곳 한인들과 시국선언이란 걸 했다. 멀리 있다는 이유로 가만히 보고만 있기엔 너무한 일들이 벌어졌다. 먼 곳에서도 모든 것을 똑똑히 지켜보고 있다는, 광장에 선 사람들과 함께 하겠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다. 몇몇 사람들과 시국선언문 초안을 작성하는 일을 함께 했는데, 그 과정에서 어딘지 불편한 지점들이 속속 드러났다. 다른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쓰는 시국이나 국민으로서라는 말에, 사진 촬영을 위해 펼쳐 든 태극기에 나는 왜 깊은 거부감을 느끼게 되는지 궁금했다. 그 불편함과 궁금증을 확인하고 해소하기 위해, 시국 선언을 마친 후 생전 처음으로 <대한민국 헌법>을 읽었다.

 

헌법을 읽어내려 갈수록 불편함은 더해갔다. 헌법 10조에는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고 쓰여 있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아동의 행복지수가 OECD국가 중 30위에 머무는 나라에서 아동은 국민이 아니다. 장애인이 교육도 취업도 문화생활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나라에서 장애인은 국민이 아니다. 헌법 12 2항에는 모든 국민은 고문을 받지 아니한다고 쓰여 있는데, 그럼 지금껏 국가 기관에 의해 고문 받고 거짓 자백 강요 받은 사람들은 국민이 아니어서, ‘빨갱이여서 그랬다는 걸까? 이런 의문들은 이내 반감으로 이어졌다. 헌법 30조를 넘어가면 헌법 조문에서 국민으로 규정되는 사람들은 신체적/정신적/물질적으로 그럴 만한 능력이 되는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떨칠 수 없었다. 31 1항은 모든 국민은 능력에 따라 균등하게 교육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라고 되어 있는데, 능력에 따라라는 말이 특히 내 눈에 몹시 거슬렸다. 여기서 능력이란, 어떤 능력을 말하는 걸까? 읽고 쓰는 능력? 신체 활용 능력? 경제적 능력? “능력에 따라 균등하게라는 말은 결국 능력에 따라 차별적으로권리를 갖게 된다는 말과 같아 보였다.

 

이처럼, 대충 보면 그럴듯해 보여도 자세히 뜯어보면 특정 단서를 달아 제한을 가하고 있는 대목들이 헌법 전문 전반에 걸쳐 자주 눈에 띄었다. 예를 들어 34 1항은 모든 국민은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가진다고 쓰여 있지만, 뒤이어 나오는 항목들을 살펴보면 여자, 노인, 청소년, 장애인은 국가가 아량을 베풀어 보호해야 하는 존재에 불과한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한 글자 때문에 어감과 의미가 달라지는 듯 보이는 헌법 조문도 있다. 예를 들어 39 2항은 누구든지 병역의무의 이행으로 인하여 불이익한 처우를 받지 아니한다고 되어 있다. 하지만 이 대목은 누구든지 병역의무의 불이행으로 인하여 불이익한 처우를 받지 아니한다가 되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군대문화가 그대로 사회의 조직 문화로 자리잡은 한국 사회에서는, 병역의무를 이행한 자가 아니라 병역의무를 불이행한 자가 사회적 차별을 받는다. 물론 병역과 관련된 부당한 거래, 비리는 차별이 아니라 처벌을 받아 마땅한 문제다. 문제는 병역 비리는 그저 지탄의 대상이 되기만 할 뿐 사회적 차별의 대상은 전혀 되지 않고, 양심적 병역 거부를 인정하지 않는 법률 탓에 처벌받는 사람들, 질환으로 인한 것인데도 병역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다며 집단에서, 사회 생활에서 배제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처음 읽어본 <대한민국 헌법>은 법적으로 대한민국 국민인 나에게 어떤 의미도, 어떤 약속도 던져줄 수 없는 빈껍데기 활자에 불과했다. 완전히 처음부터, 새로 논의되어야 할 헌법 조문들이 이렇게나 많은데, 어째서 정계에선 개헌 논의를 했다 하면 그저 70, “대통령의 임기는 5년으로 하며, 중임할 수 없다만을 놓고 얘기하는지 분통이 터졌다. 특정 기준에 따라 세계를 구분짓고, 그 세계 바깥에 해당하는 사람들을 배제하거나 차별하는 행위를 하지 못하도록 하는 강력하고 깊이 있는 말. 그런 것들이 헌법에 담겨야 하는 게 아닌가? 우리의 삶을 안정적으로 지탱할 근본적인 믿음, 가치, 우리 사회가 끝없이 도달하고자 하는 지향점. 그런 것들이 헌법에 담겨야 하는게 아닐까?

 

<헌법의 약속>은 바로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이 책을 쓴 에드윈 캐머런(Edwin Cameron)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헌법재판관이다. 남아공은 극심한 흑백분리주의, 백인우월주의적 체제로 수십년간 고통 속에 살던 사람들이 투쟁으로 성취해낸 민주주의의 정신을 새 헌법에 담기로 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남아공의 헌법은 이렇게 시작된다. “우리 남아프리카 인은 과거의 불의를 인정하고, 우리 땅의 정의와 자유를 위해 고통을 당한 이들을 기리며, 우리나라의 건국과 발전을 위해 노력한 이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남아프리카가 이 나라에 거주하는 모든 이에게 속하며 다양성 속에서 하나됨을 믿는다.” (270)

 

이 전문 속에는 내가 우리 헌법을 읽을 때 가졌던 의문에 대한 답이 고스란히 들어 있다.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고, 정의를 위해 일어선 사람들에게 감사와 경의를 표하는 것. 이 나라가 그런 바탕 위에 만들어졌다는 것. ‘국가가 있고, 국가의 기준에 맞는 국민이 그에 소속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있고 그 사람들이 살아가는 땅이 있으며 그 땅이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속한다는 것. 그리고 그 모든 사람들은 각자 다른 모습, 다른 방식으로 살아간다는 것. 그런 요소들을 모두 담은 이 헌법 전문은,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지탱할 근본적인 믿음을 담아냈다고 볼 수 있다. “모든 시민의 삶의 질을 개선하고 각자 잠재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게 하고라는 대목을 읽을 때 아름답다는 생각마저 품었을 만큼, 이 나라의 헌법 전문은 나를 매료시켰다.

 

나를 매료시킨 것은 전문 뿐만이 아니었다. 남아공의 헌법 제 9 3항은 이렇게 말한다. “국가는 누구든지 인종, 젠더, , 임신, 혼인 상태, 민족적 또는 사회적 출신, 피부색, 성적 지향, 연령, 장애, 종교, 양심, 신념, 문화, 언어 및 태생 등 하나 또는 그 이상의 이유로 직접적 또는 간접적으로 부당하게 차별해서는 안 된다.” 이렇게 세세하게, 가능한 모든 차별 요소들을 하나 하나 열거한 것도, 국가는이라고 명시함으로써 차별에 대한 책임이 가장 먼저, 가장 크게는 국가에 있다는 걸 적시하고 있다는 것도 모두 인상적이었다.   

 

이런 헌법이 만들어지고, 그 실행을 이뤄내는데 기여한 사람이 에드윈 캐머런이다. 에드윈 캐머런은 게이이며, HIV 감염인이기도 하다. 성소수자와 HIV 감염인에 대한 편견과 차별의 경험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그이기에, 그의 경험은 모든 형태의 차별에 대해 판단할 때 도움이 되었다.”(282) 그는 이 책에서 인종, 빈곤, 국가적 상황, , 성정체성, 질병 등 한 사람이 삶을 살며 맞닥뜨리게 되는 다양한 요소들로 인해 일어나는 여러 모순과 갈등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그러다보니 그의 개인적인 경험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등장하는데, 나는 그가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대목을 읽으며 어린아이를 둔 엄마로서, 내 아이의 존엄, 남의 아이의 권리, 그리고 타인의 행복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다양성의 가치를 헌법에 명시하는 것이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했다. 그것은 결국, 내 아이와 남의 아이를 모두 품는 사회를 만드는 데 가장 먼저 필요한 일이었다. 내 아이가 보통과 다른 신체적, 정신적 능력을 가졌어도, 내 아이가 타고난 생물학적 성별과 다른 성적 지향을 가졌어도, 내 아이가 질병에 걸리거나 빈곤의 수렁에 빠졌어도, 그 아이를 내치지 않고 품어줄 그런 사회를 만드는데 필요한 일이 헌법 만들기라는 걸, 나는 이제야, 아이 엄마가 되어서야 알았다. 특별한 일이 없다면 아이보다 먼저 세상을 떠날 것이 분명한, 그런 필연적인 숙명을 가진 엄마라는 이름. 그 이름 덕분에 나는 훗날 내가 없는 그 세상 속에서 살아갈, 그 속에서 꿈꾸고 사랑하며 살아갈 아이에게, 그 아이와 함께 살아갈 무수히 많은 다른 아이들에게 무슨 약속을, 어떻게 해 두어야 할지 처음으로 생각해보았다.

 

2016 11월 빗속의 시국선언 이후 한국에선 새 정부가 들어섰고, 마침내 87년 이후 처음으로, 헌법을 고칠 준비가 시작되었다. 시국선언문을 다듬으며 가졌던 그 의문을 잊을 수 없는 나는, 무엇보다도 지금 우리가 손보려는 이 헌법에 어떤 가치를 담아야 하는지, 우리 아이들에게 어떤 약속을 하고 싶은지부터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다. 그래서인지 나는, 헌법개정을 위해 제시된 여러 안 중에 특히 기본권의 주체를 국민에서 사람으로 바꾸자는 제안(https://www.constitution.go.kr/main/caView?number=7#;) 에 마음이 간다. 누구의 아이든, 어디에서 왔든, 어떤 모습을 하고 있든, 지금 이 땅에 살고 있는 모든 아이들을 우리의 아이로 품어 길러내는데 국민이라는 범주는 방해가 된다. 그리고 아동, 청소년, 노인, 장애인, 성소수자 등 사회적 약자를 보호해야 할 대상이 아닌 권리의 주체로 명시하자는 제안(https://www.constitution.go.kr/main/caView?number=6)에도 역시, 같은 이유로 마음이 간다. 에드윈 캐머런은 이렇게 썼다. “헌법은 우리 모두 인간으로서 가진 복잡함을 더욱 풍부하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돕는다.” 새로이 다듬어질 우리의 헌법도, 우리가 가진 복잡함을 풍부하게, 섬세하게 이해하고 포용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든든한 나침반이 되어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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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은 책: 에드윈 캐머런, <헌법의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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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이슬
'활동가-작가'가 되는 것이 꿈이다. 막연했던 그 꿈에 한발 더 가까워진 것은 운명처럼 태어난 나의 아이 덕분이다. 아이와 함께 태어난 희소질환 클리펠-트리나니 증후군(Klippel-Trenaunay Syndrome)의 약자 KT(케이티)를 필명으로 삼아 <이상한 나라의 케이티> 라는 제목의 연재글을 썼다. 새로운 연재 <아이와 함께 차린 글 밥상>은 아이책, 어른책을 번갈아 읽으며 아이와 우리 가족을 둘러싼 세계를 들여다보는 작업이다. 내 아이 뿐 아니라 모든 아이들을 함께 잘 키워내는 사회를 만들어 가는 데 도움이 되는 글과 삶을 꾸려내고 싶다.
이메일 : alyseul@gmail.com      
블로그 : http://plug.hani.co.kr/alyson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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