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말 아내가 집에서 디지털 건반을 연주하고 있길래 무슨 일인지 물었더니 뽀뇨에게 피아노를 가르쳐 주기 위해 유튜브로 독학을 한다고 하였다. ‘피아노 학원에서 배우면 될텐데’라고 생각했는데 ‘우리 집 형편이 여유롭지 않아서 그런가’하고 생각하니 괜히 짠해졌다. 올해는 좀 더 벌어야겠다고 다짐도 해보았다.

 

한편으로 어릴 때 피아노 치던 기억을 떠올리는 아내를 보면서 부러웠다. 내게 ‘피아노’는 가진 사람들의 악기이거나 배운 사람들의 악기였다. 적어도 내 고향 인근 마을에서 집에 피아노를 가진 집은 하나도 없었고, 피아노를 배운 아이도 없었다. 피아노를 칠 수 있는 친구가 생긴 건 남고 시절로 그 친구는 서울말을 썼다. 여자 친구들은 어릴 때 피아노를 쳤는지, 현재 치고 있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피아노는 큰 악기인데다 구입 가격이 비싸고 별도의 레슨을 받아야만 연주가 가능하다보니 집안 불문하고 시골에는 교회를 빼고는 피아노가 없었다(인근 마을엔 교회도 없었다). 지금은 교습소도 많고 피아노도 흔해져서인지 피아노를 배우는 아이들이 많은 편인데 대부분 여자 아이들이다. 여자 아이들은 피아노, 남자 아이들은 태권도가 정해진 공식이다보니 재능이나 관심에 관계없이 아이들을 방과후 그냥 저냥 학원에 보내게 된다.

   

뽀뇨 또한 ‘언젠가는 배우게 되겠지’ 생각하게 되었는데.. 며칠 전 페이스북에서 간편하게 피아노를 배울 수 있다는 광고를 보고 바로 스마트폰 앱을 다운 받았다. 그리곤 마치 무엇엔가 홀린 사람처럼 휴대폰을 디지털 건반 위에 두고 건반 연습을 시작했다. 농촌에서 일하면서도 뽀얗고 부드러운 내 손이 피아노를 치기위해 40년 간 아껴둔 것 같았다.

 

앱을 보면서 피아노를 치는 건 어렵지 않았다. 키보드 자판에 양손을 두고 타이핑을 하듯 피아노도 양손을 쓰며 열 손가락을 옮기는 것이기에 마찬가지가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낮은 도에서 높은 도로 옮겨갈 때는 ‘내 손가락은 피아노를 치기 위해 이렇게 길었구나’라는 자아도취를 하게 하였다.

앱의 악보를 보고 건반을 치면, 건반의 소리를 듣고 악보가 체크되며 기술이 숙달되는 시스템인데 누구나 알만한 아주 유명곡의 쉬운 버전을 아주 기초부터 익힌 후에 점점 난이도를 높여가는 식이다. 한번 맛에 들리니 퇴근하면 제일 먼저 건반 앞에 앉기 일쑤고 아이들이 시끄럽게 굴면 방을 옮겨가며 연습을 했다.

 

그러다 보니 피아노에 관심이 많은 뽀뇨가 옆에 앉아서 건반을 누르며 장난을 치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연습에 몰두하였고 간혹은 피아노를 차지 하기 위해 신경전을 벌였다. 건반을 치다보니 손목이 조금 아프기도 하고 진짜 피아노는 소리가 어떨까 상상하게 되었다. Y브랜드 피아노 중고가가 대략 50만원, 디지털피아노 신상품도 대략 그 가격인데 ‘이걸 질러야 하나’ 생각을 하고 있는데 아내가 “뽀뇨가 곧 피아노학원 가게 되면 건반이 긴 피아노가 있어야 해서 새로 하나 살까봐요”라고 하는게 아닌가. 야호! 하며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피아노를 보름 정도 연습했을까, 갑자기 띵동 하고 문자 메시지가 왔다. 해외 사이트에서 무려 10만원이 넘는 돈이 결제되었다는 메시지였다. ‘이게 무슨 일인가’ 하고 자세히 봤더니 피아노 앱 결제액이었다. 처음으로 큰 맘 먹고 한 앱 결제인데, 9.5달러와 95달러를 혼동하였고 결국 ‘0’하나가 추가되어 돈이 빠져나간 것이다. 아내가 피아노 한달 강습료 보다 2만원이나 적다고 위로하였고, 나는 1년 뒤에 피아노 독주할 실력을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참고로 우리 집엔 통기타가 한 개, 일렉 기타가 한 개, 플라스틱 대금과 단소가 각 한 개, 대나무로 만든 진짜 대금이 한 개, 하모니카가 한 개, 흙으로 만든 오카리나 한 개 있다. 이 중에 대금과 오카리나는 우리 가족이 해외여행을 갔을때 혹시 비상금이 필요할지 모르니 악기를 배워두자고 해서 샀고 나는 무려 이생강 선생님의 수제자인 이광훈 선배에게서 대금 기초를 배웠다. 그리고 다들 기억날지 모르겠지만 뽀뇨 돌잔치때 사람들 앞에서 대금으로 ‘아리랑’을 연주하겠다고 했다가 10분이 지나서도 소리가 나지 않아 사람들이 웅성거렸고 장모님은 다시는 대금불지 말라고 했다. 이번에도 그렇게 끝날지 모른다. 피아노는 내게 지나가는 바람일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대금이 그러했고 통기타가 그러했듯 내 인생의 악기로 남을 것이다.

건반.jpg » 뽀뇨가 건반에 계이름 스티커를 부착해두었다. 아빠도 요긴하게 잘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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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창욱
세 가지 꿈 중 하나를 이루기 위해 아내를 설득, 제주에 이주한 뽀뇨아빠. 경상도 남자와 전라도 여자가 만든 작품인 뽀뇨, 하나와 알콩달콩 살면서 언젠가 가족끼리 세계여행을 하는 소박한 꿈을 갖고 있다. 현재 제주의 농촌 마을에서 '무릉외갓집'을 운영하며 저서로 '제주에서 아이를 키운다는 것', '제주, 살아보니 어때?'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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