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방학을 하면 부모는 개학을 한다. 개학을 한다는 건 아침부터 해야 할 시간표에 따라 몸을 움직여야 한다는 걸 의미했다. 기상 시간이 있고,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식사를 한 뒤 방학 숙제를 하고, 함께 놀 친구를 구하고, 더운 여름 오후를 어떻게 보내야 할지 계획을 짜야 했다.
 학기 중에는 대학원에 다녔으니 늦깎이 심리학도인 아빠는 그래서 1년 365일이 개학인 셈이었다. 학기 중에는 학과 수업 시간표에 따라야 했고, 방학 중에는 아이 시간표에 따라야 했다. 주부에겐 방학이 없다. 특별한 금요일 저녁도 없고 그렇다고 휴가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인간은 하루 세끼 밥을 먹도록 태어났고 그래서 주부는 하루에 세 번 밥을 차려야 하고, 집안이 더러워 먼지라도 쌓이면 알레르기와 싸우기 위해 집안 구석구석 청소를 해야만 했다. 아이 옷이 더럽거나 가족들이 몸이라도 아프면 그 책임도 고스란히 주부에게 돌아갔다. 남자는 정년 퇴직이라도 있지만 주부에겐 정년이 없다. 그러니 퇴직 이후에도 꼬박꼬박 밥을 챙겨 달라는 남편이 있다면 아내는 희망 퇴직이라도 해달라며 남편에게 짜증을 낼 것도 같았다. 살림을 하다보니 예전에 보이지 않았던 여자의 삶이 이제는 조금씩 보였다.

 아이가 학교 가는게 주부에게 무척 고마운 일이라는 걸 방학을 해 보니 더 깊이 깨달았다. 아이가 학교를 간다는 건 주부에겐 자유가 생긴다는 걸 의미했다. 읽고 싶은 글을 읽거나, 보고 싶은 영화를 보거나, 하고 싶은 쇼핑을 하며 자유시간을 만끽할 수 있던 건 다 학교라는 제도 덕분이었다. 방학에는 그 자유 시간마저 사라졌다. 그래서 방학 때면 아이가 부르는 아빠란 목소리보다 내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이 더 그립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아빠 소리를 들어야 했으니까. 아이 앞에서는 항상 아빠여야 했으니까. 방학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해야 할 일과 그 책임들로 가득했다.


 책임감에 허덕일 즈음 휴대폰에 내 이름을 불러주는 문자 하나가 도착했다. 예상하지 못한 때에 평소에 호감을 갖던 분이 이름을 불러주면 한 마디 말조차 고마웠다. 우연히 뵀던 전문 상담가이시면서 모 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신 상담 선생님이 문자로 인사말을 건넸다. 가끔식 단체 문자를 받으면 그 내용이 아무리 반갑더라도 반갑지 않았다. 단체 문자는 여러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나 자신을 똑 같은 평범함으로 대하는 섭섭함이 들었다. 하지만 내 이름을 붙여준 문자를 보면 오롯이 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는 것 같아 반가웠다.
 그 분은 한 달여 전 여름 방학 중 상담 워크숍을 진행한다는 이메일을 보냈었다. 심리 상담가들은 방학 때면 내로라하는 심리 상담 교수들을 찾아가 수련을 받는다. 심리 상담은 머리로 이해하는 이론보다 직접 수련을 받으며 지도를 받는 과정이 중요했기 때문에 전문 상담실 곳곳에서 수련을 위한 실습이 열렸다. 좋은 의사가 되기 위해선 많은 환자를 만나야 하는 것처럼, 유능한 야구 선수가 되기 위해선 많은 시합을 치러야 하는 것처럼, 깊이 있는 심리 상담가가 되기 위해서도 상담에 직접 참여하거나 상담 과정을 지켜보며 사람들의 마음 속 상처들을 ‘자주’ 만나야 했다. 이름을 불러준 그 문자에 기억해 주셔서 감사하다며 워크숍 때 찾아 뵙겠다고 답장을 남겼다.

 워크숍을 가는 날에도 아침밥을 차려야 했다. 아내 없는 아침 식사 자리, 책임을 미룰만한 사람도 없다. 이날 아이 돌봄은 가족의 몫이었지만 오히려 하루 자유로워진다고 생각을 하면 오히려 마음은 더 다급해졌다. 현관문을 나서면 아빠란 수식어로부터 자유로울 것만 같았다. 주부 생활을 시작한지도 5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아침밥을 차리는 내 모습이 익숙하지 않았다. 앞치마를 두른 내 모습이 거울 속에 비치면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다가다도, 워크숍처럼 중요한 일정이 있는 날이면 앞치마를 두른 내 모습이 반갑지 않았다. 주방에 있는 내 모습이 잘 어울린다는 기분이 들든지 혹은 반갑지 않든지, 해야 할 일 앞에선 그저 하나의 기분일 뿐이었다. 사람들은 긍정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라고 했지만 불현듯 찾아오는 불편한 감정은 의지의 문제가 아니었다. 세상에서 가장 먼 길은 머리에서 가슴으로까지 가는 길이라고 했던 것처럼 머리보다는 가슴이 더 빨리 움직였고 더 크게 나를 흔들곤 했다.

 민호에게 밥을 먹자고 했다. 이왕하는 거 잘하자는 마음에 어젯밤 먹고 남은 소고기를 꺼냈다. 언제부터인가 ‘이왕 하는 거’란 생각에 사로잡혔다. 이왕 여행하는 거 즐겁게 또 기억에 남게 가고, 이왕 공부하는 거 좋은 성적을 거두고, 이왕 살림하는 거 깨끗하게 하자는 생각들은 끊임없이 게으른 몸을 움직이게 했고 쉴 수 있는 머리 속엔 계획을 짜 놓았다.
약한 불로 프라이 팬에 고기를 얹었다. 고기나 전류를 볶을 때는 기름을 따로 두르지 말라던 한 친구의 말이 떠올랐다. 고기와 전에는 이미 기름이 배어 있으니 굳이 기름을 프라이팬에 두를 필요가 없다는 조언이었다. 건강 관리를 잘하는 친구의 말에 따라 약한 불로 고기를 볶다 다진 당근을 넣었다. 야채를 볶을 때에는 단단한 순서대로 넣어야 익힌 정도가 알맞는다. 그래도 소고기 볶음밥으로 아침을 차렸으니 힘들어도 흐뭇했다.
“민호야, 밥 먹자.”
 아이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민호야, 밥 먹자.”
 목소리가 조금 커지자 민호가 물어봤다.
 “반찬이 뭔데?”
 밥을 차리고 먹자는 말에 아이는 뭐를 차렸느냐고 물어왔다. 짜증이 밀려왔다. 맛있게 잘 먹겠습니다 란 말까지는 바라지 않더라도 밥을 차리면 자리에 앉아 숟가락을 들어야 하는 게 밥차린 사람을 위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했다. 버럭 소리를 질렀고 아이는 깜짝 놀랐다.

 

 심리 상담 워크숍으로 가는 길에서 기대감보다는 불편한 감정을 발끝으로 밀어내며 걸어갔다. 굳이 아이에게 화를 낼 필요가 없었으니까. 화를 내고 나면 아이에겐 미안했다. 좀 더 참을 걸이란 후회가 그렇게 발걸음과 함께 나를 따라다녔다.
 “각자 간단하게 소개를 할까요?”
 강의실 앞에 선 상담 선생님이 먼저 각자 소개를 부탁했다. 사흘동안 함께 수련을 할 심리 상담 동료들이었으니 짧게나마 자기 소개를 해야 서먹한 분위기를 조금이라도 누그러뜨릴 것만 같았다.
 “안녕하세요, 강릉에서 온 OOO입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청주에서 왔습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춘천에서 왔습니다.”
 각자 자신을 소개할 때마다 나는 조금씩 작아졌다. 타인을 돕고 싶어하는 열정으로 가득 찬 상담가들은 저 멀리 강릉에서 청주에서 춘천에서 기차를 타고 올라왔다. 교수님 문자를 받고 뒤늦게 합류한 나와는 열정에서 큰 차이가 있지 않을까 란 생각이 스쳤다. 열정은 먼 지역에서 온 거리에 비례할 것만 같았다.
 “안녕하세요, 저는 강남이 아닌 과천에서 온 강남구입니다.”
 사람들과 어색한 첫 만남에서 내 이름은 자주 어색함을 깨는 웃음을 만들어 준다. 이름을 공개하는 순간 웃음과 함께 인지도도 올라갔다. 과천에 사는 강.남.구. 간단히 인사를 주고 받은 뒤 수련 시간에 들어갔다.

 상담 권위자가 상담을 하는 과정을 사흘 동안 지켜보는 수업이었다. 요리를 잘 하기 위해선 책을 읽는 것보다 요리사가 하는 음식을 옆에서 지켜보고 따라하는 게 가장 빨리 많은 걸 배우는 것처럼, 심리 상담을 가장 빠르고 깊게 배울 수 있는 길은 상담 권위자의 상담을 곁에서 지켜보는 길이었다.
새내기 상담가부터 수련 중인 상담가에 이르기까지 상담가의 수준은 천차만별인데 최고의 전문가 과정으로 가기 위해선 10년 가까운 이론 수업과 수련 시간이 필요했다. 이제 고작 2년 차인 그것도 대학원생이었으니 앞으로도 갈 길은 멀고 멀었다. 들판의 풀을 베기 위해서는 허리를 들지 말라던 조언처럼 그냥 내 앞에 있는 시간과 수업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베어야 할 풀의 양을 생각하는 순간 포기하고 싶어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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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혹시 저에게 상담을 받고 싶으신 분 있으시면 앞으로 나오세요.”
 먼저 상담받고 싶은 이를 찾았다. 상담을 진행하려면 상담을 하는 이와 상담을 받는 이가 있어야 했다. 상담 내용은 철저하게 비밀이었다. 개인 사생활이기 때문에 동의없이 상담 고민을 누설하는 건 상담가 자격과 윤리에 크게 어긋나는 일이었다. 모두가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그리고 먼 지역에서 올 만큼 열의 가득찬 상담가들이기에, 누가 상담을 받든 그 고민을 지켜주리라는 신뢰가 있었다.

손을 들고 앞으로 나섰다. 소규모 강의실 앞에 상담 선생님이 앉아 있는 의자 맞은 편에 앉았다.
 “어떤 고민이 있으신가요?”
 아침에 있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나도 모르게 아이에게 짜증을 냈던 감정이 고민이었다.
 “아이에게 짜증 섞인 화를 내고 나니 좀 이상했어요.”
 “뭐가 이상하시다는 거죠?”
 괜히 나섰나? 이런 것도 상담거리가 될 수 있을까 란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좋은 상담가가 되기 위해서는 직접 상담도 많이 받아야 한다며 생각을 고쳤다. 상담을 해 보는 것처럼 상담을 받는 경험도 소중했다. 그래야 상담을 받는 이의 마음을 더 빨리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으니까. 고민을 하나씩 풀어놓았다.
 밥 차렸다는 말을 부모로부터 들으면 아이는 그 반찬이 무엇인지 당연히 궁금할 것 같았다 고 말했다. 오늘 반찬이 뭐냐는 그 질문에 그저 차린 반찬이 무엇인지 알려주면 그만이었으니까. 민호야, 오늘 소고기 볶음밥이야 라고 말하면 아이는 그렇구나 란 표정으로 식탁에 앉았을 테니까. 그런데 반찬이 뭐냐는 질문에 짜증이 올라온 내가, 그리고 목소리를 키운 내가 낯설었다 고 했다.

조용히 그리고 편안한 모습으로 전문 상담가는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그리고 그는 나의 삶을 하나씩 물어봤다. 내 삶을 평가하는 질문이 아니라 내 삶을 이해하기 위한 질문이었다. 같은 말이라도 묻는 이의 태도는 느낌으로 전해진다. 상대의 눈빛과 목소리 어조 그리고 몸동작 하나하나 모두 나의 말과 삶을 향하고 있었다. 진심으로 나를 받아주는 사람에겐 모든 걸 털어놓는다. 직장을 그만 둔 이야기, 인간극장에 출연했던 이유와 최근 근황까지 하나씩 들려주었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 동안 선생님은 어느덧 내 삶 속으로 조금씩 들어왔다.
“요즈음 어떨 때 짜증이 나시나요?”
나지막하게 물어봤다.
 “마치 아빠를 하인처럼 대하는 느낌이 들 때 짜증이 났어요. 아마 존중받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 때 인 것 같아요. 아이가 엄마가 없다보니 애틋해서 아이에게 맞춰준 것도 있었던 것 같고요. 애가 안쓰럽고 그래서 억눌렀던 것 같아요.”
 맞은편에 앉은 상담 선생님은 내 마음의 문 앞에서 서서 하나씩 나에 대해 물었봤다. 그 묻는 말에 대답을 한껏하고 나면 그 마음의 문을 열리거나 허물어졌다. 한참 내 말을 들어주던 선생님은 나도 몰랐던 내 말 속의 감정 하나를 찾아냈다.
 “계속 억누른다고 표현을 하시는군요.”
 한참 말을 하다보니 내 말 속에는 억누름이라는 단어가 많았다. 일상 생활 속에선 내가 내 감정을 억누른다는 걸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평소에 내가 감정을 억누르고 있다는 걸 선생님의 도움으로 알아챘다. 선생님은 내가 했던 문장들을 기억하고 있다가 다시 내게 들려주면서 언제 억눌린다는 표현을 썼는지 확인해 주었다.
 “집안일을 하다 보면은 순간적으로 화가 날 때가 있어요. 그냥 해야되니까 하는 거지 하다가도 순간적으로 화가 나요. 이 일이 내 일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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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 마음으로 이야기를 들어주던 선생님은 손바닥보다 조금 작은 크기의 여러 인형들을 책상 위에 올려 놓았다.
 “이 가운데 “너는 억눌러야만 해”라고 말하는 것 같은 인형 하나를 고르세요.”
 남자 인형 하나를 골랐다. 인형 하나하나마다 표정과 생김새가 달랐다. 나와 닮았다고 생각했던 그 남자 인형은 “억눌러”란 말을 잘 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러면 이제 “자유롭고 싶어”라고 말하는 것 같은 인형 하나를 고르세요.”
 이번엔 머리를 풀어헤친 여자 인형이 자유로워 보였다. 상담 선생님은 “억눌러”라고 말하는 인형을 내 가슴 가까이에 가져다 댔다. 억눌러라는 인형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 맞은편에는 자유롭고 싶어 라고 말하는 인형이 나와 억눌러야만 한다고 말하는 듯한 인형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 자유로워 라고 말하는 인형에게 말을 걸어보세요. 너는 “억눌러야만 해” 라고요.”
 “넌 억눌러야만 해.”
 “더 크게 말해보세요.”
 “너.는. 억.눌.러.야.만.해.”
 그리고 선생님은 기분이 어떠느냐고 물었다. 난 즉시 대답했다. 짜증이 난다고.
 “짜증은 억눌림하고 연결이 되어 있군요.”
 억눌러 라는 인형의 말에 난 몹시 짜증이 났다.
 “자, 이제 왜 억눌러야 하는지 말해보세요.”
 억눌러야만 한다는 인형과 나는 같은 심정으로 우리를 마주보고 있는 자유로워 인형에게 쏘아붙였다.
“그래야지 아이가 예쁘게 크고 그래야지 옷도 깨끗이 입고 공부도 잘할 거잖아. 아이들과 주변사람들과 관계를 좋게 하기 위해서도 너가 해야 할 것이 되게 많은 걸 알고 있잖아.”
 다소 큰 목소리로 자유롭고 싶어하는 인형을 향해 꾸짖었다.
 “넌 이제 알고 있으면서 왜 그래. 아이를 돌본다는 게 얼마나 정서적으로 지적으로 신경과 관심을 쏟아야 한다는 걸 알면서 왜 그래.”
 말을 멈추자 다시 선생님이 덧붙이며 말했다.
 “억눌러야 한다는 이유를 더 설명해 주시겠어요?”
 다시 목소리가 커졌다. 자유롭고 싶다고 하는 인형을 향해 더 분명하게 말했다.
 “너가 선택했잖아. 너가 책임져. 너가 선택한 것에 대해서 다 책임져야지. 그리고 너도 너의 선택이 맞다는 걸 증명해야지. 직장까지 나왔잖아. 방송기자 앵커였지 사회부 기자였지. 사람들이 다 말렸는데도 나왔잖아. 그렇게 좋은 것을 포기하고 왔으니까 책임져야지. 너가 선택했으면 책임져야지.”
 “강력한 부담과 책임감을 부여하네요.”
 이제 선생님의 말도 들리지 않았다. 난 계속 자유롭고 싶다는 인형을 향해 책임을 명령했다.
 “너가 책임져. 너가 선택했으니까, 너가 책임져.”
 주변 사람들은 무척 집중을 했지만 잠깐 집중 받는 나의 모습을 의식했다가 지금은 수련의 과정이라는 걸 다시 떠올렸다. 최대한 상담에 몰입했다.
 “네 결혼도 마찬가지였잖아. 아픈 사람하고 결혼해서 세상을 떠났으면 그것도 너가 책임져야 하는 거야. 모든 것은 네가 선택했으니까 네가 책임져야지. 그 선택에 책임을 지는 게 어른이라고 생각해. 애를 낳은 것도 너가 선택한 거고. 어른이라면 자신의 선택과 행동에 책임을 져야지, 너가 좋다고 너 하고 싶은대로 살면 그게 어른이야?”
 갑자기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맺힌 눈물은 서서히 앞을 가리며 차올랐다.
 “강력하게 책임을 요구하네요.”
 여러 상담 수련과정을 거쳤지만 눈물이 차오른 건 처음이었다. 상담 선생님은 북받힌 감정을 조용히 받아주었다.
 “강한 책임을 져야 하는 게 버거우시지요. 책임감이 강한 건 미덕이지만 그걸 짊어지는 건 분명히 힘들고 부담스러운 일이지요. 많이 힘드셨을 것 같습니다. ”
 강하게 책임을 몰아붙이니 자유롭고 싶어하는 난 주저 앉아 울 수밖에 없었다. 그 책임이라는 말이 가슴에 와 박혔다. 상담 선생님은 계속 나를 위로했다. 그 책임이라는 짐을 함께 지고 있는 느낌이었다. 이제 눈물이 아니라 입가에선 눈물 섞인 소리가 새어 나왔다.
  “쉬고 싶어요.”
 쉬고 싶다고 했다. 나무 그늘 아래에서 아무런 책임도 없는 곳에서 지나가는 공기를 몸으로 느끼며 자유롭고 싶다고 했다. 한참을 울었다. 책임감에 울고 있는 아빠를 선생님은 마음으로 꼭 안아주었다.
내가 내 감정을 억누르는 이유는 바로 선택과 책임에 있었다. 막대한 책임감은 내가 불편한 감정이 올라올 때마다 나를 억누르게 했다. 그리고 그 억누르는 감정은 짜증으로 순간 변했다. 짜증이란 감정은 그렇게 나에게 말을 걸었다. 뭔가를 억누르고 있고 그 억누룸 속에는 스스로 한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내면의 목소리가 짜증이란 감정으로 나왔던 셈이다.
 
“자 이제 자유롭고 싶다는 인형 편에서 맞은편에 있는 억눌러야 한다는 인형에게 말을 걸어보세요.”
 “그만 억누르라고 해. 내가 너무 힘들 것 같거든. 내가 힘든 게 아이에게도 좋지가 않고 나에게도 좋지가 않아. 그리고 많은 책임감을 주는 게 일을 잘하게 하는 것 같지도 않아. 단기적으로는 잘 할 수도 있지만 금방 지쳐 떨어질 것도 같거든.”
 말이 멈추자 다시 더 이야기를 하라고 했다.
 “할 만큼만 하면서 오래하는 게 더 좋아. 내가 나를 잘 아는데 나는 목표를 높게 잡지 않고 할 만큼만 잡아. 그리고 오랫동안 지속하지. 그게 성공하는 지름길이라는 걸 알고 있어.”
 “한 마디 더 해보세요.”
 “그만해! 짜증나!”
 마지막에 억누르라고 말하는 인형을 향해 짜증난다고 하자 상담 수련생들은 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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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담을 받아보니 짜증을 내는 감정은 내 감정을 억눌렀을 때 나타났다. 그리고 억눌렀던 이유는 나의 의식 저편에서 내가 나에게 “책임을 지라”고 강하게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심리학을 공부를 하면서 깨달은 가장 놀라운 사실 가운데 하나는 세상에서 가장 잘 모르는 사람은 부모님도 아니고 친구도 아니고 자녀도 아니고 바로 나라는 사실이었다. 상담은 몰랐던 나를 되돌아보게 하고 나의 마음을 이해하도록 돕는다. 누군가를 이해를 하면 그 사람을 받아들일 수 있다. 내가 나를 이해하지 못하면 짜증은 계속됐지만 내가 왜 짜증을 내는지 알고나니 상담을 받고 나선 이제 아이에게 덜 짜증을 냈다. 간혹 짜증이란 감정이 올라오면 내가 나에게 이렇게 말을 건다. 책임지라는 내면의 목소리가 너를 억누르고 있다 라고.

  사람들은 화를 낼 만하니까 화를 내고, 짜증을 낼 만하니까 짜증을 내며, 부끄러운 일이니까 수치스러워 한다며 자신의 감정을 상황이나 상대를 탓한다. 상담과 심리학을 통해 배운 건 모든 내 감정은 바로 내가 선택한 감정이라는 사실이었다. 
 

 불편한 감정은 아이나 가족이나 상황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내가 나에게 보내는 위험한 신호였다. 지금 나의 내면의 목소리가 나를 힘들게 하고 있다는 신호. 모든 감정의 주인은 바로 나이기 때문에 나를 이해하면 다른 감정을 선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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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구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를 만들고 다듬느라 35년을 흘려보냈다. 아내와 사별하고 나니 수식어에 가려진 내 이름이 보였다. 해야 할 일보다 하고 싶은 일을 찾으려고 기자 생활을 접고 아이가 있는 가정으로 돌아왔다. 일 때문에 미뤄둔 사랑의 의미도 찾고 싶었다. 경험만으로는 그 의미를 찾을 자신이 없어 마흔에 상담심리교육대학원에 진학했다. 지은 책으로는 '지금 꼭 안아줄 것' '나의 안부를 나에게 물었다'가 있다.
이메일 : areopagi@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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