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규 18.jpg

 

애들 키우다보면 꼭 이런 궁굼증이 든다.
우리 애가 좋아하는 여자친구, 남자친구가 있나? 아니면 우리 애를 좋아하는 애가 있나?
이런거 말이다.

 

유치원을 다니면 엄마들끼리 누가 누구를 좋아하느니 어쩌니 하는 즐거운 수다도 떨 수 있으련만
큰 아이부터 여섯살인 둘째도 유치원을 안 다니니 아이들 입에서 누구를 좋아한다거나, 누가 나를
좋아한다거나 하는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없었다.
그래서 첫 아이의 초등학교 입학을 은근히 기대했었다. 과연 우리 아들이 여자들에게 인기가
있으려나.. 궁금했던 것이다.
잘생겼다 소리는 듣곤 했지만 1학년때는 이성친구에 눈 뜰 나이가 아니어서 아들은 그저 남자와
여자를 가리지 않고 어울려 놀기에 바빴다. 그러나 2학년때는 처음으로 내게 좋아하는 여자아이가
있다는 고백을 들려주어 나를 놀라고 또 설레게 했었다. 그 여자아이가 누군가 했더니 아쉽게도
반의 모든 남자 아이들이 다 좋아하는 그런 아이였다. 누구에게도 이쁘게 보이고 근사해 보이는
그런 타입의 여자애였던 것이다. 아들은 속으로만 좋아하고 내색도 못해보고 2학년을 마쳤다.
그리고 그 학교를 떠나 대안학교에 입학했다.


전교생이 서른명이 조금 넘는 미니 학교였고 아들이 들어간 3학년은 고작 남자 셋, 여자 넷뿐이어서
이 안에서 누가 누구를 좋아하고 어쩌고 하는 일이나 생길까.. 싶었는데, 별 생각없이
'3학년 여자친구들은 어때? 괜찮니?' 물었더니 '별로요... 딱 한 명만 빼고..'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딱 한 명?
'어머, 그 한명이 누굴까? 혹시... S?
'아니요' 아들은 정색을 했다.
'아하.. 그럼 A?'
'아이참, 아니예요'

3학년의 네 명의 여자애들을 다 알고 있어서 그중 내가 예쁘장하다고 여기던 두 명을 물었더니
아니란다. 그럼 누구야???
'... D요'
'어머, 정말? D라고?'
나는 깜짝 놀랐다. 아들의 대답은 내 예상을 완전히 빗나가 있었다.
사실 D라는 여자애는 의외였다. D는 키가 나 만한, 필규보다 머리 하나가 더 큰 여학생 이었기
때문이다. 워낙 커서 처음엔 6학년인가 착각했을 정도다. 키가 중요한 건 아니지만 자기보다 훨씬
큰 여학생을 좋아한다는게 조금 놀라웠다.
아들은 비밀이라며 남편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했다.
그러더니 며칠 후 3학년들만 여의도 공원에 놀러갔던 날, 돌아와서 내게 할 말이 있다며 불렀다.
'오늘 S가 나를 놀렸어요'
'왜?'
'야, 최필규, D가 너 좋아한대! 이렇게요'
'어머, 그거 아주 잘된 일이네? 그래서 뭐라고 했어?'
'..그런데?' 라구요'
아이고, 아주 절묘한 대답이구나. 당연한 일을 왜 얘기하냐는 듯 한 투였으니..

그 다음날 필규를 데리러 학교에 갔더니 필규는 나를 본 척도 않고 D랑 칠판앞에 나란히 서서
그림을 그려가며 킥킥거리고 있었다. 뒷 모습은 영락없는 누나와 동생인데 둘은 내가 봐도
서로 좋아하는게 보인다.

 

'D는요, 내가 자기가 좋아하는 책을 다 읽었다는게 되게 신기하대요'
'D는 아주 아주 책벌레래. 해리포터는 열 번도 더 읽었고.... 글도 아주 잘 쓴다더라?'
'그러니까 내가 좋아하는거지요'
'너는 정말 운이 좋구나. 네명 밖에 안 되는 동기중에서 통하는 것이 많은 여자애를 만났으니..'
'그럼요. 나는 왜 이렇게 운이 좋을까?'
아들은 넉살을 부렸다.
초등학교 2학년때 자기 이상형은 머리가 길고, 글을 잘 쓰고, 소설을 좋아하고, 공상과학 영화도
좋아하는 여학생이라고 얘기했었는데, D가 딱 거기에 맞는 아이인 셈이다.

아들은 학교에 다녀오면 오늘 D랑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내게만 소근소근 얘기해 준다.
'오늘은 D 옆에 앉아 점심을 먹었어요' 오늘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10초간 고백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D는 내가 착하고 멋있대요'
'너는 누구한테 뭐라고 했어?'
'물론 D한테 착하고 이쁘다고 했지요'

 

아들이 손 아래 여섯살 여동생과 싸움이 붙어 '지옥에나 가 버려!' 어쩌고 하며 막말을 해대길래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아무리 화가 나도 그렇게 심한 말을 하는게 아니야. 상대방이 상처받으면
너도 싫어하게 된다고... 너는 D한테도 화 나면 그럴꺼니?' 했더니
'아니요, D한테는 절대 그렇게 말 안할꺼예요. 내가 참으면 되니까요..' 한다.
여자친구에겐 화가 나도 꾹 참고, 여동생에게는 화 나면 막말을 해 대시겠다고? 흥, 벌써부터
제 여동생보다 여자친구가 더 소중하다 이거구만, 나원 참...
아이를 훈계하다가 기가 막혔다.
언제부터 좋아한다고 벌써 저렇게 챙기는거야, 제 동생에게는 함부로 하는 녀석이...

 

그 후로 남편과 나는 아들에게 여자친구가 생겼다는 것을 필요한 상황에 적절하게 이용하곤 한다.
예를 들어 씻기를 싫어하는 녀석에게
'머리에서 냄새나는 남자는 매력  빵점이야. 머리가 매끄럽고 좋은 냄새가 나야 여자들은
좋아한다고... '이렇게 구슬린다.
'아... 여자친구 생기니까 머리도 내 맘대로 못하는구나' 아들은 푸념을 늘어 놓으면서도
순순히 머리를 감으러 간다. 이러다가 머지 않아 말하지 않아도 저 혼자 머리를 감는 날이 오겠다.

열 살 아들 마음속에 벌써부터 엄마가 아닌 좋아하는 다른 여자가 생겼다는 사실이 재미있기도 하고
조금 서운하기도 하지만 우리 부부는 아들의 연애를 유쾌하게 바라보고 있다.
무엇보다 여자친구 덕분에 학교가는 일이 더 즐거워 졌음은 물론이다. 작은 학교에서 모두
지켜보고 알고 있는 환경에서 알콩달콩 둘이 어울리는 일도 다행이고 그 친구와 통하는 일이 많으니
앞으로 더 많은 것들을 함께 나눌 수 있는 것도 참 고맙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제 자신도
다시 돌아보게 되고, 이전에는 신경쓰지 않았던 것들도 제 궁리안에 더 들어오겠지...
그러는 동안 아들은 또 쑤욱 커 있을 것이다. 어찌 반기지 않을 수 있을까.

 

목욕탕에 들어가면 머리에 물을 바르고 거울 앞에 서서 요렇게 조렇게 매만지는 시간이 부쩍
늘어 간다. 아들은 이제 더 이상 품 안의 어린 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실감하고 있다.

열 살 아들의 두근 두근 기분 좋은 설레임을 엿보며 이 아이가 겪을 사춘기와 청소년기와 그 이후의
사랑과 이별까지 나는 한없이 가늠해보게 된다. 아이가 있어 다시 살아볼 수 있는 그 한없는
세월들이 고맙기도 하고, 짠하기도 한 것이다.

 

봄 비가 내린다. 비 지나가면 푸른 것들이 쑤욱 자라있겠지.
볕 좋은 날, D를 한 번 집에 초대해야지. 두 아이의 풋풋한 관계를 진심으로 응원하고 아낀다.

 

그나저나... 많이 컸구나.. 내 아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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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순화
서른 둘에 결혼, 아이를 가지면서 직장 대신 육아를 선택했다. 산업화된 출산 문화가 싫어 첫째인 아들은 조산원에서, 둘째와 셋째 딸은 집에서 낳았다. 돈이 많이 들어서, 육아가 어려워서 아이를 많이 낳을 수 없다는 엄마들의 생각에 열심히 도전 중이다. 집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경험이 주는 가치, 병원과 예방접종에 의존하지 않고 건강하게 아이를 키우는 일, 사교육에 의존하기보다는 아이와 더불어 세상을 배워가는 일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고 있다. 계간 <공동육아>와 <민들레> 잡지에도 글을 쓰고 있다.
이메일 : don3123@naver.com      
블로그 : http://plug.hani.co.kr/don3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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