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은 아직도 방학중이다.
딸들은 개학을 해서 학교를 다니고 있는데 녀석의 학교는
여름방학이 5주라서 이번 주까지 쉬고 있다.
매일 늦게 일어나 게임할 구실을 찾는 일에 머리를 굴리는 녀석을 오늘은 모처럼 일찍 깨워
딸들과 함께 나왔다. 딸들을 학교에 데려다 주고 아들과는 시내로 향했다.
영화 '맘마미아 2'를 조조로 보기로 했기 때문이다.
아들과 둘이서 조조 영화를 보는 일이 처음이라서, 키 크고 훤칠한 아들과 둘이 나온게 좋아서
나는 싱글벙글 말이 많아지는데 녀석은 시크한 척 내 눈을 피한다.
"필규야... 이것도 다 기념인데 엄마랑 셀카 한 장 찍자."
"훗. 셀카는 악의 근원입니다. 저는 셀카 안 찍어요."
"아앙. 한 장만 찍자."
"전 사양하겠습니다."
"칫, 그럼 이렇게라도 찍을거야."
"맘대로 하세요."
"아이고, 컸다고 비싸게 굴기는..."
그래도 난 비굴하게 기어코 이런 장면을 카메라에 담았다. 아들은 내가 몇 번이나 다시 찍을 동안
웹툰만 보고 있다. 이렇게라도 아들과 둘이 있는 모습을 찍으면서 나는 좋았다. 아직은 같이 극장 가자면 나오잖아. 그게 어디야...
아, 이 영화 맘에 드네.
아바 노래 좋은거야 당연하고, 그 사이 더 멋있게 나이든 저 세 남자들 좀 봐.
나는 멋있게 나이든 사람들 잔뜩 나오는 영화가 좋더라.
마지막에 도나가 혼자 남아 섬에 있는 오두막에서 소피를 낳는 장면에서
그 장면과 겹쳐 엄마가 된 소피가 자기의 아이를 안고 자신을 사랑하고 축복해주는
사람들이 모인 교회에서 세례를 받기 위해 들어서는 장면과
극 중에서는 이미 죽은 것으로 되어 있는 도나가 나타나
'나의 사랑, 나의 생명'이라는 노래를 부르며 소피와 태어난 아이를 축복해주는 장면에서
눈물을 뚝뚝 떨구었지.
필규야
마지막 장면 보다가 엄마가 정말 오랜만에 너 낳을때 생각 났잖아.
아빠 출근할 무렵에 양수가 터져서 부천에 있는 조산원까지 차를 타고 가는데
아빠는 미친듯이 운전하고 엄마는 계속 그 옆에서 양수를 철철 흘려가며 진통을 하고..
너 낳을때는 엄마도 처음이고 경험이 없는데다 너무 아파서 힘 조절을 잘 못했어.
네가 나오는 순간에는 힘을 빼야 하는데 너무 아프고 힘들어서 힘을 빼지 못해서
아랫도리가 엄청 찢어졌거든. 엄마야 너를 낳고 있어서 얼마나 찢어졌는지 몰랐는데 원장님이 그 상처를 꿰매는 것도 몰랐어. 원래는 아이 낳는 것 보다 그게 더 아프다고 하던데, 생각해봐. 그 얇은 살을 마취도 없이 꿰매는데 얼마나 아프겠어. 그런데 엄마는 아무 느낌이 없었거든.
그냥 네가 몸 밖으로 나와서 내 가슴 위에 엎어져 있는 것을 보면서
다 끝났구나. 잘 끝났구나, 내가 이 아이를 낳았구나 이런 생각에 취해 있어서 아픈 줄도 몰랐어.
나중에 알려주시더라, 엄마가 그 조산원 개원 이래 최고로 많이 찢어졌던 산모였다고..
그 상처가 아물때까지 한 고생은.... 정말이지 말로 다 못한다.
네가 그렇게 태어난 녀석이라고..
에이, 왜 그렇게 힘 조절을 못하셨을까..
네가 낳아봐라. 그게 마음대로 되나.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엄마가 된다는 것은 뭐랄까..
한 여자의 인생을 처음부터 완전히 다시 시작하는 일이더라고..
낳아 놓고서 스스로 대견하고 놀랍기도 하고, 이 아이를 어떻게 키우나.. 새삼 사는 일이
무서워지기도 하고, 아프거나 다치면 어쩌나 수십년 걱정을 미리 당겨서 다 하느라
마음으로는 백 년도 더 산것처럼 미리 지쳐버리기도 했는데..
그 작던 아이가 벌써 이렇게 커서 엄마보다 훨씬 더 크고 이렇게 손잡고 영화도 다 보고 그러잖아.
그러니까 엄마랑 사진 한 장 찍어야지.
흥, 제가 엄마 목을 졸라도 과연 사진 찍을 수 있을까요?
야, 비겁하게... 네가 아무리 방해해도 나는 사진 찍을꺼야...
에고... 눈 옆에 이 주름살 좀 봐. 어찌 이렇게 선명하냐.
엄마, 나이를 인정하세요.
야! 영화에서 도나 엄마로 나온 가수 쉐어말야. 찾아보니 46년생이던데, 그럼 70도 넘은거잖아.
그런데 그 주름하나 없는 피부 바라. 도대체 의학과 현대 과학의 힘을 얼마나 빌렸길래 극중
도나보다, 아니 소피보다도 더 젊어 보이는거냐고..
나도 최신 의학의 힘을 빌리고 싶다, 최소한 이 눈주름만...
그래도말야. 나이든 콜린 퍼스나 피어스 브로스넌 보니까 좋더라.
젊음도 좋은데 잘 늙어가는 것도 좋아.
생각해봤는데 아빠는 흰 머리가 일찍 생겨서 나이 들면 더 멋있을것 같아.
엄마는 60이 되어도, 70이 넘어도 여전히 명랑하고 활기찬 할머니일 것이고
아빠는 그 나이쯤 되면 조금은 더 부드러워진, 백발이 어울리는 할아버지가 되었을 것 같고..
둘이서 손 잡고 같이 다니면 좋을것 같지 않니? 지금도 좋지만 그때도 좋을것 같애.
아아.. 이 다음에 윤정이랑 이룸이가 커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을때 그때도 엄마가....
물론 곁에 있겠지만 아... 생각만 해도... 그런 날들이 온다면.... 얼마나 벅찰까..
아들 손 꼭 잡고 영화 얘기로 수다를 떨어 가며 거리를 걷고, 툴툴 거리는 녀석 세워 놓고 옷
가게에 들러 옷도 한 벌 사고, 우리 둘 다 좋아하는 스시집에 들러 맛난 연어초밥과 튀김롤도 먹고, 그리고 녀석이 좋아하는 중고 책 가게에 들렀는데..
아들은 좋아하는 만화책을 수북히 골라와서 정신없이 빠져든다.
나는 한참 떨어져 아들 모습 훔쳐 보는 재미에 빠져 있었다.
흠... 내가 낳았지만 녀석 기럭지 좀 보라지. 잘 생겼고만..
줌으로 이렇게 땡겨서 찍어야 옆 모습이라도 담을 수 있구나.
이정도라도 허락해줘서 다행이지.
사진 찍는거 질색팔색하면 이렇게라도 못 하잖아.
녀석...
필규야. 니가 크고 나니까 어딜 가나 아르바이트하는 아이들 만나면 엄마는 다 너 같더라.
저 아이도 어떤 엄마에게는 하늘과 같은 자식일텐데, 저만큼 키우느라 죽을 만큼 애썼을텐데.. 생각하면 누구에게도 함부로 할 수 가 없게 돼. 그렇게 되더라.
세상 모든 아들이 너 같고, 모든 딸들이 내 딸같은데 누구에게 막 할 수 있겠니.
엄마가 되고 나니까 그래.
아들은 결국 제가 수집하고 있는 만화책이 여덟 권이나 더 들어왔다고 다 사 달란다.
9월 용돈은 없겠다 아들아
아잉... 5천원만 남겨주세요 엄마 사랑해요.
훗.. 그럴때만 사랑 타령은...
알았어..

달콤했던 데이트를 끝내고 집에 오자마자 나는 모처럼 뜨겁게 이글거리는 햇볕이 아까워
빨래를 너네, 이불을 너네 바쁜데 아들 녀석은 새로 산 만화책을 몽땅 들고 안방 침대로 가서는
꼭 저 자세로 책을 보며 키득 거리고 있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킬킬 거리는 웃음 소리가 거실까지 흘러 나온다.
그래.. 좋을 때다.
아직은 방학
집에는 엄마가 있고
저를 먹이려고 동네 할머니가 오늘 아침에 따서 파는 옥수수를 사와서 삶고 있는 냄새가
집안에 가득히 풍기고, 재미있는 만화책도 그득하게 있으니 참 좋겠다.
즐겨라 아들아
행복하고 충만한 이런 시간들을
이런 순간이 정말 뿌듯하니 좋더라.
오랜 시간이 지나도 말야.
나는 아들과의 데이트에서 새로 산 데님 원피스를 입고 날아갈듯 신나게 집안을 오가며
빨래를 하고, 설거지를 하고, 글을 쓰고 있다.
여름방학은 덥고, 덥고, 징그럽게 덥고 힘들게 지나갔지만 돌아보면 모든 순간이
다 반짝였다는 것을 알겠다.
좋지 않니? 이런 여름..
고맙지...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