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날 마당에서 아빠가 내 머리카락을 잘라주시던 일이 생각난다.
미용실 가는 돈을 아끼고 싶어 하신 일일 것이다.
마당에 놓인 의자에 보자기를 둘러쓰고 앉은 나는 아빠가 잘라준다는 것이 맘에 안 들어
고개를 푹 숙이고 인상을 쓰고 있었다.
아마도 아빠는 내 눈썹게 맞추어 앞머리를 자르셨을 테지만 고개를 들었을때 내 앞머리는
이마 한 가운데까지 올라가 있었고 나는 거울을 보고는 울음을 터뜨렸다.
아빠는 당황하셔서 어쩔줄 몰라 하시다가 내게 백원을 쥐어 주시며 달래주셨다. 백 원을 받고 나는 울음을 뚝 그쳤다. 그 뒤로 아빠는 딸들 머리카락에 손 대지 않으셨다.
생각만큼 간단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으신 모양이었다.
토요일 오후 우리집 마당에는 간이 미용실이 차려졌다.
얼마전부터 앞머리를 자르고 싶어하는 큰 딸을 위해 미용 기술이 있는 지인의 어머님에게 부탁을 드렸더니 우리집 마당으로 오신다는 거였다. 번거롭게 해드리는 것 같아 죄송해 했더니 집에서 하면 머리카락이 날려서 우리집으로 오시는 편이 오히려 낫다는 말에 안심을 했다.
남편이 초여름에 애써서 깔아 놓은 마당의 데크 위에 의자가 놓이고 보자기를 둘러쓴 딸이
앉아 있는 모습을 보자니 아주 오래 전 내 머리카락을 잘라주시던 아빠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시절이 가 버린 후 두 번 다시 그런 풍경은 못 볼 줄 알았는데 그 시절의 나만큼 큰 딸들의
머리카락을 마당에서 자르는 모습을 보게 된 마음이 그립고 뿌듯했다.
지인의 어머님은 손재주가 좋고 안목이며 스타일이 좋으신 분인데 나를 참 좋아하신다.
젊은 날부터 닦아오신 미용기술로 복지회관에 봉사활동도 다니시면서 가까운 동네 지인들
머리를 봐주시기도 하시는데 이번에는 우리 딸들이 신세를 지게 되었다.
언니 모습을 보고 이룸이도 자르고 싶어해 자매가 한꺼번에 스타일을 바꾸었다. 이룸이도 아주 좋아했다.
딸들 다 자르고 났더니 남편에게 앉으라고 하셨다. 안그래도 머리를 다듬을 때가 되었는데
잠깐 시간이 흐른 후에 남편은 말끔해진 모습으로 일어섰다. 그 모습을 보고 필규도 불렀다.
남편보다 더 쑥스러움을 타는 아들은 미용실이 아닌 곳에서는 절대 자를 수 없다고 단칼에 거절했다. 나도 별 기대는 안 했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머리 자르고 문화 상품권 받는거 어때?" 했더니 아들은 "콜, 대신 만원짜리요" 하며 벌떡 일어섰다. 안그래도 온라인 게임 스킨을 바꿔야 한다며 게임머니로 쓸 수 있는 문화상품권에 목을 매고 있던 아들이었다.

세상에나, 게임을 좋아하는 건 알지만 문화상품권 소리에 제 머리까지 내 놓는 녀석이라니..
평소에는 이런 모습 남사스럽다며 펄쩍 뛰는 녀석이, 미용실 선택에도 까다로움을 피우는 녀석이
마당에서 엄마 친구며 동생들이 보는 앞에서 보자기를 자청해서 다 쓰다니..
허허.. 게임에 영혼까지 팔 녀석이로구만..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야, 이렇게 쉽게 넘어올 줄 알았다면 5천원짜리로 시작해볼 것을..
"절대 안돼요. 만원짜리 아니면 안 받습니다"
"흥, 대신 책 한권 읽기도 포함이야. "
아들은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내 벙글거리던 아들은 잠시 후 멋진 투 블럭 스타일을 휘날이며
내게 미소를 날리고 집안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이날 밤 내가 내민 '나는 그냥 버스기사입니다'라는 책을 밤새 다 읽었다^^)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두 딸에 남편과 아들까지 머리를 깎게 된 것을 흐뭇해하고 있는데
나도 잠깐 앉으라는 것이다. 한 달 전에 머리를 짧게 잘라서 더 다듬을게 있나 싶은 마음으로 앉았는데 당신 보시기에 내 머리가 조금 촌스러워 보여서 늘 손 봐주고 싶었다는 것이다.
앞 머리를 더 짧게 자르고 뒷 머리와 옆 머리도 조금씩 다듬겠다고 하셨다.
나는 기분 좋게 머리를 맡겼다.
수다를 떨어가며 머리 손질을 받고 나서 수고비를 챙겨 드리려고 했더니
만원만 받겠다며 손사래를 치신다. 그러면 다음에 또 부탁 못 드린다고 가지고 있던 2만3천원을 건넸다. 다섯 식구 모두 커트를 한 것에 비하면 정말 적은 금액이다.
지인과 어머님은 기분 좋게 인사를 하고 떠나셨다.
데크 위에는 다섯 식구에게서 나온 머리카락들이 수북했다.
남편이 빗자루로 쓸고 호스로 말끔하게 물 청소를 해 주었다.
거울이 없어서 내 모습을 보지 못한 채 배웅을 하고는 집에 들어와 전신 거울앞에서 서서
머리 모양을 확인한 나는 바로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왜요, 언니, 우리가 뭐 두고 간거 있어요?"
"그게 아니고...... 완전 멋지잖아!!"
"네?"
"머리 모양 말이야, 완전 괜찮아. 별로 자를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스타일이 확 달라졌어, 완전 맘에 들어"
"내가 이 맛에 머리 잘라요. 호호호"
전화기 너머로 유쾌하게 웃는 두 사람의 웃음소리가 울렸다.
그날 밤, 우리 세 여자는 서로 거울 앞에 서서 바뀐 머리 모양에 감탄하며 좋아서 어쩔줄 몰랐다.
딸들은 연신 가는 빗으로 앞머리를 빗어가며 구르프를 사달라는 둥, 내일 고데를 해 달라는 둥 신
나서 방방거렸다. 나도 새로 산 스마트폰으로 막내딸과 사진 한장 찍었다.
방학 내내 잘 먹어서 살이 통통 오른 막내는 앞머리를 자르고 한층 더 귀여운 개구장이가 되었다.
염색을 해 주셨다. 딸들도 함께 가서 앞머리와 옆 머리에 귀여운 브릿지를 넣었다.
머리색이 달라진 세 여자는 또 저녁 내내 거울 앞에서 신이 나서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 이 사진은 염색하기전에 찍은 것이다 ^^)
건강에 안 좋을까봐 한 번도 염색을 하지 않았던 나는 생애 처음 염색을 하고 한결 가려진 흰머리 덕분에 5년은 젊어 보이게 되었다. 9월에 새 책이 나오면 강의도 다녀야 할텐데 여러모로 잘 된 일이라며 기뻐하고 있다.
수영장이 되었다가, 캠핑장이 되었다가, 놀이터며 공연장이 되기도 하는 데크가 이번에는 미용실이 되었다. 작은 마을에서 같이 살아가는 이웃끼리 가진 재능을 나누고 공간을 나누고 일상을 나누어가며 한층 더 풍성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 새삼 참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