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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하늘이한테 그렇게 화 내면 어떡해!
하늘아, 하지마~ 하고 말로 해야지."

"화 낼거야! 하늘이가 엄마 걸 막 부수잖아!
엄마가 제일 아끼는 카메라도 고장내고.
너 같으면 화 안나겠어? 엄마 화 낼거야!"

당황한 바다의 눈빛이 흔들린다.
평소 같았으면 "그러게. 또 화를 냈내. 미안해."라고 말해야 되는데 대답이 다르니.

내가 아끼는 헤어 에센스 뚜껑을 박살낸 하늘이에게
강력한 경고를 한 후에 나는 잠깐 방 문을 닫고
온 몸, 특히 온 얼굴로 화를 토해냈다. 소리는 죽이고.
속에서 나오는 화와 욕을 실컷 온 몸으로 뿜어내고 나니 좀 시원해졌다.
그 다음 바다와 그런 대화를 한 것이다.

대화 후에 아이들을 재운다고 누웠는데
내가 무엇에 화가 났는지 감이 온다.
내 물건, 내 시간, 내 자리, 내 몸.
아이들을 낳고 키우면서 수 없이 내 영역을 침범당했기 때문이었다.
나도 내 물건이 소중하고
나도 내 시간이 소중하고
내 자리, 내 몸이 소중한데 아이들은 예고도 없이, 너무나 당연하게 내 영역을 넘어온다.
아기니까, 내가 엄마니까. 
당연히 내어주고 당연히 참아주던 것을 이제는 안 하고 싶다.

왜?
열 받으니까.
나도 존중받아 마땅한 한 인간이니까.

제일 소중한 카메라가 바닥에 쾅 소리를 내면서 떨어지는 것을 봤을 때
내 자리에 자꾸 바다가 앉아 있어서 다리 아픈데 앉을 곳이 없을 때
팔다리 쭉 뻗고 자고 싶은데 아이들 옆에서 쭈그리고 자야될 때
나도 공부할 거 많고 하고 싶은 거 많은데 
아이들 밥 먹이고 챙기다 보면 피곤해서 눈이 감길 때
예쁘고 건강하던 내 몸이 어느새 힘 없고 아픈 몸이 되어있는 걸 볼 때
정말 화가 난다.

이제 그렇게 안 살 것이다.
아이들도 왠만큼 컸으니까 나의 영역을 지킬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귀찮고 힘들어도 계속 소리내어서 알리고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고 혼을 내야되면 낼거다.

바다야, 하늘아.
엄마도 너희와 똑같은 욕구 덩어리의 인간이야.
엄마도 엄마의 욕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화가 나는거고.
그러니 우리 함께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삶을 살자.
너희도 양보할 것은 양보하고.

왜 한번도 이런 내 권리를 주장할 생각을 하지 않은걸까.
왜 희생해야한다는 생각만 한 걸까.

이제, 진짜 제 정신인 엄마의 삶이 시작될 조짐이 보인다.
엄마이면서 오롯한 한 사람으로서의 삶이.

일단은 먼저 푹 좀 쉬고 싶다.
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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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형주
이십 대를 아낌없이 방황하고 여행하며 보냈다. 서른 살이 되던 해에 시골 대안학교로 내려가 영어교사를 하다가 남편을 만나 결혼했고 지금은 두 딸 바다, 하늘이와 함께 네 식구가 제주 서귀포시 남원읍에 살고 있다. 부모님이 주신 '최형주'라는 이름을 쓰다가 '아름다운 땅'이라는 뜻의 '지아'에 부모님 성을 함께 붙인 '김최지아'로 이름을 바꾸었다. 베이비트리 생생육아에 모유수유를 하며 겪은 에피소드를 그림과 글로 표현한 ‘최형주의 젖 이야기'를 연재 완료하였다.
이메일 : vision323@hanmail.net      
블로그 : https://blog.naver.com/jamjam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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