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후 4일짜리 녀석을 이모님이 씻겨주시던 모습
‘이모님’을 처음 뵌 건 2008년 6월이었다. 녀석이 세상에 나오고 아내의 산후조리를 집에서 하기로 결정했는데, 이모님은 산후조리 도우미로 우리 집을 방문하셨다. 집이 개봉동 근처인 광명시에 거주하시며 출퇴근 하셨다. 능숙하고 정성스럽게 산모와 녀석을 2주 동안 잘 돌봐주셨다.
그 뒤 1년여가 지난 2009년 9월 다시 이모님을 찾았다. 아내의 출근이 결정돼 급하게 베이비시터를 구하던 때였다. 산후조리를 워낙 잘해주신 데다, 집도 가까워 적임자라 생각했다. 그러나 아내의 제안에 이모님은 “어렵다”고 답하셨다. 손녀를 키우고 있어 운신하기가 쉽지 않다는 말씀이셨다. 아쉬움을 느끼며 아파트 엘리베이터에 구인 공고라도 붙이려고 생각하는 순간, 다시 전화가 왔다. “페이는 덜 줘도 좋으니 내 손녀와 함께 봐주면 안 되겠냐”는 역제안이었다. 네 살짜리 손녀는 어린이집에 다니고 있었고, 어린이집이 끝나는 오후 4시부터만 함께 있으면 된다고 했다. 두 아이가 같이 있으면 아무래도 보육자의 손길이 분산되는 점은 우려스러웠지만 손녀가 녀석을 동생처럼 아껴주면 괜찮을 것 같았다. 보육료도 파격적이었다. 한 달에 70만원.
» 2008년 9월, 수박을 같이 먹던 두 아이의 다정한 모습
그렇게 이모님과의 인연이 다시 시작되었다. 손녀와 녀석은 처음 만났을 땐 데면데면했지만 오래 함께 하면서 누나·동생 하면서 사이좋게 지냈다. 가끔씩 일 때문에 아내나 나나 귀가가 늦어져도 이모님은 개의치 않으셨다. 물론 “때 되면 다 해”라는 식의 경험론적 낙관주의가 때론 걱정스럽기도 했지만 그래도 녀석을 친손주처럼 각별하게 돌봐주시는 정성에 그 정도의 불만은 상쇠 되고도 남았다. 집안에서 사회성이 길러진다는 36개월까지는 녀석을 이모님께 맡기고 싶었다.
그러나 이별은 조금 일찍 찾아왔다. 이모님이 1월에 시흥시로 이사를 가시게 돼 14일까지만 출근하시게 된 것. 아쉽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지난 토요일에 교외로 나가 식사를 대접했다. “그동안 성윤이 잘 키워주셔서 감사하다”고 인사했다. 날 따뜻해지면 서울대공원에서 손녀와 함께 만나자고도 약속했다.
함께 한 날을 세어보니 1년4개월 하고도 조금 남는다. 베이비시터를 잘못 만나 마음고생이 심한 부모들도 많던데 16개월 동안 별 탈 없이 지낸 우리 가족은 운이 참 좋은 편이다. 이 자리를 빌려 이모님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
이모님의 빈자리를 메우려 장모님께서 급거 상경하셨다. 녀석은 오는 3월부터 엄마의 직장 어린이집에 다니기로 했다. 장모님은 남은 한 달 반 동안 ‘제 손으로 식사하기’ 등 어린이집 적응 프로그램을 가동하실 참이다. 단기속성반에 입소한 녀석의 성적표가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