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정이 넘어 집에 들어가 보니 녀석은 곤히 잠들어있었다. 웃옷만 걸친 채. 아내도 세상모르게 곯아떨어져 있었다. 기저귀를 차지 않으려 반항하는 녀석과 싸우다 지쳐 잠든 모양새였다. 침대 모서리에 걸쳐있는 기저귀를 들고 녀석에게도 다가갔다. 그런데 축축~하다. 기저귀를 거부하는 녀석의 교만함의 끝은 잠자리를 향한 ‘실례’였다. 녀석의 웃옷은 물론이요, 전날 갈았던 극세사 침대 시트와 베갯잎까지 오줌으로 젖어 있었다. 불과 2주 전의 일이었다.








71bab94423356843f63464923ef6ce18. » 엄마 아이폰으로 동영상을 보면서 배변을 즐기고 있다. 이때는 큰 거였다.






 그런데 녀석이 변기에 앉아서 일을 보기 시작했다. 변기에 보다가 기저귀에 보다가 들쭉날쭉하던 녀석의 배변 통로가, 장모님이 와계셨던 지난 1주일 동안, 변기로 확실히 단일화 되는 느낌이다. 주말에 관찰한 결과, 녀석은 뭐가 마려우면 바지를 내리는 시늉을 했고 장모님은 즉각 반응하며 녀석을 변기에 앉히셨다. 녀석이 ‘싸면’ 온 가족이 박수를 치며 축하해줬다. 어른 방귀처럼 그 소리가 우렁찼던 것처럼 녀석의 똥도 어른 것에 못잖다. 비위 약한 아내는 왝왝거리지만, 나는 그런 녀석이 대견하기만 하다. 녀석은 잠잘 때만 제외하고는 그 둔탁했던 기저귀를 집어던지고 ‘노팬티’로 집안을 활보하고 있다. 이제 엄지손가락을 제대로 움직여 바지를 내릴 수 있는 단계가 되면 녀석은 알아서 배변을 볼 것이다.






녀석의 변화는 이것뿐만이 아니다. 앉은 자세에서 발로 바닥을 밀고 당기며 운전해야 하는 장난감 자동차. 얼마 전까지만 해도 녀석은 뒷걸음질만 쳤다. 내색은 안 했지만 ‘왜 뒤로만 가고 앞으로는 못 갈까’ 했던 게 아빠의 마음. 그러나 이제는 앞뒤로 자유롭게 움직이며 마루에서 안방으로 건넌방으로 거침없이 운전하고 다닌다. 녀석의 성장을 보면서 ‘왜 내 아이는 늦될까’ 하는 걱정은 정말 불필요한 기우였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녀석의 자아(솔직히 말해 고집)도 빠른 속도로 진화하고 있다. 지난 토요일, 장인어른·장모님과 함께 녀석을 데리고 부천시의 놀이공원 ‘원더존’에 놀러갔다. 다섯 가지 놀이기구를 탈 수 있는 이용권을 끊고는, 첫 놀이기구를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엄마, 아빠 중에 누구와 타겠냐고 물어보니 녀석은 큰 소리로 “아빠~”라며 나를 가리켰다. 얼굴도 잘 못 보는 아빠를 이렇게 챙기다니 흐흐 ‘감동 대박’. 나는 녀석과 놀이기구에 타고는 빙글빙글 허공을 돌았다. 그렇게 놀이기구 다섯 개를 다 타고 나가는 길. 녀석은 매점에 진열돼있던 ‘자동차 운반차’를 두 손으로 집어 들었다. 커다란 자동차 운반차 안에 조그만 자동차가 네 개나 들어있는 장난감이었다. 자동차에 꽂혀있는 녀석에게 분명 매력적인 물건이었다.






그렇다고 호락호락 녀석의 욕심에 굴복할 내가 아니었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두 부자의 신경전을 예상하고 모른 체하며 앞으로 걸어가고 계셨다. 녀석은 내게 장난감을 안겼지만 나는 기존의 방법으로 녀석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집에 자동차 많잖아. 이거 그냥 구경만 하는 거야.” 내가 장난감을 진열대에 내려놓자 녀석은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며 멀찌감치 떨어진 할아버지를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다. 할아버지는 울음소리를 듣고 되돌아 녀석을 안으시고는, 장난감을 사주셨다. 할머니는 “저렇게 떼쓰는 것도 한때”라고 말씀하셨다. 어쨌든 녀석의 승리였다.






집에 와서 잠들기 전 아내는 ‘우리 아이 나쁜 버릇 고쳐주는 책’이라는 <안돼요, 안돼! 좋아요, 좋아!>를 꺼내들었다. 아이의 좋은 행동은 칭찬하고 나쁜 행동은 훈계하는 재미있는 그 책... 아내가 “엘리베이터에 타면 숫자 단추를 몽땅 눌러요. 그렇게 되면 층층마다 다 서겠죠. 그러면 안 되겠죠?”라고 물으니 녀석은 “네~”하고 대답한다. 다음 장에서 “장난감이 마음에 들면 사줄 때까지 엉엉 울어요. 그러면 안 되겠죠?”라고 물으니 녀석이 갑자기 묵비권을 행사했다. 거듭 물어봤지만 녀석은 대답이 없다. 맘에 없는 거짓말은 않겠다는 너의 소신, 그거 하나는 내가 높이 사마.






요즘 들어 녀석이 커가는 모습을 보면서, 함께하는 시간이 줄어들수록 오히려 아이의 성장에 감탄하는 정도는 더욱 커진다는 사실을 느낀다. 어른들이 친척 아이들을 오랜만에 보고는 “우리 개똥이, 이렇게 많이 컸구나”라며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이치와 똑같다. 아이와 오랜 시간 붙어있으면 사소한 걱정거리가 늘지만, 짬짬이 아이를 대하면 쓸데없는 걱정보다는 아이의 커가는 모습만 눈에 들어오기 때문일 터. 이제는 왕창육아보다는 짬짬육아 시절의 아빠가 더 행복한 게 아닐까 하는 ‘불순한’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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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규 기자
서른두살 차이 나는 아들과 마지못해 놀아‘주다가’ 이제는 함께 잘 놀고 있는 한겨레 미디어 전략 담당 기자. 부드럽지만 단호하고 친구 같지만 권위 있는 아빠가 되는 게 꿈이다. 3년 간의 외출을 끝내고 다시 베이비트리로 돌아왔다.
이메일 : dokbul@hani.co.kr      
블로그 : plug.hani.co.kr/dokb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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