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bc6119d6cd3fe43a5b34478c1ed45e. » 가끔은 집에서 이렇게 목욕한다. 아빠, 아들, 뽀로로가 함께.




딸-딸은 금메달, 딸-아들은 은메달, 아들-딸은 동메달, 아들-아들은 목메달(매달). 슬하에 장성한 아들 둘을 둔 나이 지긋한 회사 선배는 어느 날 술자리에서 자신의 육아경험담을 이런 섬뜩한 농담으로 풀어놓았다. “아들 둘 키우는 엄마는 깡패가 된다”는 얘기는 들어봤지만 아빠가 목을 맨다는 식의 표현은 자못 충격적이었다. 나는 되물었다. “선배! 아들 둘 키우는데 뭐가 그리 힘드셨어요?”

“야, 너 애 둘 목욕시키는 거 상상해봤냐? 애 둘 목욕탕 데려가서 때 밀어주려면 그거 정말 힘들어. 내가 어머님을 모시고 살잖아. 목욕탕 갔다 오면 어머님이 또 검사를 해. 그거, 어우~.”

선배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농담이 아니었다.




그런데 내게도 그날이 왔다. “아빠고 아들이고 피부가 푸석푸석하다”며 아내가 토요일 오전에 목욕탕 출입을 ‘명(命)’한 것이었다. 선배의 경험담이 떠오르며 순간 움찔했지만 이내 도전의식이 솟구쳤다. 난 아직 하나니까. 내겐 아직 동메달을 딸 수 있는 잠재력이 있으니까. 이전에 목욕탕에서 녀석을 씻겨봤던 아내는 남자 둘을 처음 목욕탕에 보내는 게 못미더운지 “몸을 충분히 불려서...” 미주알고주알 때 미는 방법을 강의한다. 뭐 때 미는 방법이 따로 있나. 난 “응, 알았어” 건성으로 대답하고 집을 나섰다.




집에서 동네 목욕탕까지는 천천히 걸으면 15분 거리. 차를 가지고 가려다 유모차를 끌고 제대로 도전하기로 했다. 목욕탕에 들어서니 대인이 5,500원 소인이 4,000원이다. 첫돌이 지나면 소인이란다. 너무 비싼 느낌이다. 딱 3,000원만 받았으면 좋겠는데. 표를 끊어 남탕 쪽으로 향했다. 목욕탕 현관에서 신발을 벗겨 들여놓으니 녀석은 제집에서 하는 것처럼 털썩 주저앉아 양말부터 벗는다. 녀석은 목욕탕이 낯설었는지 조심스럽게 행동하며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간단히 샤워를 한 뒤 바로 탕 속에 들어가기로 했다. 온도는 섭씨 39도. 녀석을 안고 제일 낮은 온도의 온탕에 들어갔다. 수심 50㎝로 녀석을 세우니 딱 가슴팍까지 왔다. 물은 꽤 따뜻했지만 녀석은 한 손으로는 아빠 손을 붙잡고 다른 손으로는 장난감 컵으로 물놀이를 하며 15분을 버텼다. ‘어유 기특헌 놈, 이제 때가 박박 밀리겠구나.’




그런데 어라? 녀석의 몸에서 때가 밀리지 않는다. “목욕탕 데리고 가면 아이 때도 어른 때 못잖다”는 아내의 말과 영 다르다. 유아용 고운 수건으로 안되길래 어른용 때수건으로 밀어도 살갗만 빨갛게 될 뿐 소식이 없다. 그래서 다시 탕 속으로 들어가 5분을 불렸다. 그래도 성과가 없다. 다시 탕 속으로. 이번엔 1분. 내 몸에선 손만 갖다 대도 오동통한 ‘수타면’이 완성될 정도가 되었지만 녀석의 몸에서는 아무리 때수건을 밀어도 ‘소면’조차 보이지 않는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나는 초조해졌다. 내가 모르는 아이들 때 미는 방법이 따로 있었나... 이랬다가 집에 가서 때가 허옇게 일어나면 어떡하지...

어쨌든 최악의 상황을 피하기 위해 나는 녀석의 몸을 물비누·우유비누를 이용해 닦고 또 닦았다. 컵을 이용한 물놀이 삼매경에 빠진 녀석을 옆에 두고 나는 열심히 때를 밀었다. 아들과 나의 첫 목욕은 그렇게 ‘절반의 성공’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녀석은 노곤함을 이기지 못하고 잠이 들어버렸다. “목욕 잘 하고 왔느냐”는 아내의 추궁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지? 책임론이 대두될 게 뻔한 상황.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녀석의 몸에서 때가 나오지 않았다는 말은 아내가 묻기 전에 절대로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두 남자가 없던 토요일 오전은 아내에게는 휴식시간이었을 게다. 청소까지 다 해놓은 아내에게선 여유가 느껴졌다. 녀석을 유모차에서 내려 침대에 눕혔다. “목욕 잘 했어?” “응.”

그리고 녀석이 탕 안에서 15분을 넘게 있었다, 신발 벗겨놓으니 양말부터 벗더라, 몸무게는 변동이 없더라 등등 온갖 뒷이야기를 풀어놓았다.

한참을 듣고 난 뒤 아내가 물었다. “때는 많이 나와?” “...아니, 하나도 안 나오던데.” “그래? 이상하네, 때가 나올 텐데.”

아내가 녀석의 발목을 살펴본다. 다행히 허연 땟자국 없이 말끔하다. 아내의 ‘목욕 후 검열’은 그렇게 싱겁게 끝났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녀석은 원래 깔끔한 상태였다. 아이들 때를 미는 특별한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녀석과 나의 첫 목욕은 그렇게 ‘급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됐다. 다음번에는 녀석의 조그만 몸에서 때를 박박 밀어내는 카타르시스를 기대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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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규 기자
서른두살 차이 나는 아들과 마지못해 놀아‘주다가’ 이제는 함께 잘 놀고 있는 한겨레 미디어 전략 담당 기자. 부드럽지만 단호하고 친구 같지만 권위 있는 아빠가 되는 게 꿈이다. 3년 간의 외출을 끝내고 다시 베이비트리로 돌아왔다.
이메일 : dokbul@hani.co.kr      
블로그 : plug.hani.co.kr/dokb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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