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저녁 퇴근해서 집에 들어가니, 녀석이 배꼽인사를 공손하게 한다. 배가 볼록하다. 밥을 많이 먹었단다. 배가 고파 짜증내며 울부짖던 이날 새벽의 광경이 낯설기만 하다. 녀석의 식습관은 단 하루 만에 혁명적인 변화를 겪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토요일 오전, 장모님은 김과 멸치로 정성스럽게 꼬마 주먹밥을 만드시고 “밥 먹자”고 녀석을 꾀었지만 녀석은 생글생글 웃으며 “밥.먹.기.싫.어.요”라고 했다. 제 손으로 먹기는커녕 하나씩 입에 넣어주는 것도 거의 사정해가며 먹이는 형국이었다. 제 엄마가 “성윤이, 아직도 아가야?”라며 혼자 먹으라고 하면, “아.직. 아.가.예.요”라고 응수했다. 말이 늘면서 이제는 말로도 장난을 치는 상황이 된 셈이었다.
» 병원에서는 이렇게 협조적인 모습.
아침을 그렇게 부실하게 먹은 뒤 좀처럼 콧물이 떨어지지 않던 녀석은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엄마와 소아과 병원을 찾았다. 녀석은 나이가 지긋하신 의사선생님한테 꾸벅 인사를 하더니 선생님이 진찰하시도록 입을 쫙 벌리고 제 손으로 웃옷을 들춰보였다. 계속 생글거리는 녀석에게 선생님은 “넌 해피보이구나” 하며 칭찬해주셨다고 했다. 감기약을 장기간 복용하고 있다는 얘기에 선생님은 “밥은 잘 먹느냐”고 물어보셨다. 아직도 파행을 거듭하고 있는 녀석의 식습관 행태를 들으시고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성윤이처럼 똑똑하고 영민한 애들은 밥 먹는 것도 어른들과 겨루기를 하고 있다고 보면 됩니다. 밥 좀 먹어달라고 사정하지 말고 아예 모른 척하는 식으로 한두 번만 굶겨주면 성윤이가 알아들을 겁니다. 하루 이틀만 그러면 고쳐질 거 같은데요.”
실질은 “굶어봐야 배고픈 줄 안다”는 일반적인 조언과 다를 게 없었지만 성윤이를 향한 덕담을 곁들인 선생님의 말씀은 주양육자인 장모님의 마음을 움직였다. 성윤이의 잘못된 식습관을 하루빨리 교정해야 한다는 점에 어린이집 선생님이나 우리 부부 모두 동의했지만, 녀석을 눈에 넣어도 안 아파하실 장모님께서는 “어차피 다 먹게 돼있다. 애한테 스트레스 주지 마라”며 속도조절을 주장하셔서 식습관 개선에 의견일치가 안 된 상태였던 것. 그런 상황에서 의사선생님의 친절한 조언에 장모님도 밥상머리 교육을 제대로 시키기로 ‘결심’을 하셨다. 그 시점부터, 그러니까 토요일 오전부터 식사와 관련된 말은 녀석 앞에서 ‘금칙어’가 되었다.
» 토요일 점심 때 먹은 도넛 반쪽. 이때만 해도 기분 좋았지...
토요일 점심, 식당에서 나온 계란찜으로 밥을 먹이려 했으나 먹기 싫다고 해서 안 먹였다. 끼니를 식당 앞 빵집에서 산 도넛 반 개로 때웠다. 배가 고플 테니 저녁은 많이 먹겠거니, 생각했지만 녀석은 오후 6시에 잠이 들고 말았다. 여느 때와 같이 할머니와 함께 자던 녀석은 밤 10시가 넘어서자 간헐적으로 찡찡대기 시작했다. 배가 고픈 모양이었다. 늦게라도 배가 고프다며 일어나면 밥을 먹이려고 했지만 녀석은 "배 고프냐"고 묻는 할머니한테 암말도 하지말고 배만 쓰다듬으라며 짜증을 냈다. 제 깐엔 자존심을 세우는 것 같았다. 그런 상황까지 체크만 하고 나는 잠이 들었는데...
녀석이 대성통곡하는 소리가 들렸다. 마루에서 녀석을 달래는 장모님의 목소리가 들린다. 전공 공부를 하다가 늦게 잠든 아내가 힘들어하며 마루로 나간다. 나도 몸을 일으켜 시계를 보았다. 새벽 4시30분. 뭔 일인가 싶어 마루로 나가보니, 식탁의자에 앉아있는 녀석 앞에 누룽지 한 그릇이 놓여있다. 써늘해 보이는 그 누룽지를 놓고 녀석은 “뜨거워. 뜨거워”라며 트집을 잡고 있었다. 할머니한테 먹여달라는 얘기를 그런 식으로 하는 것 같았다. 선잠에서 깬 아내는, 아이챌린지 DVD에 나왔던 ‘생선찌개’를 찾는 녀석을 위해 그 새벽에 삼치조림을 하고 있었다.
배가 고파서 상을 받은 모양새인데 아빠 엄마가 갑자기 모습을 나타내자 녀석은 다시 서럽게 울며 할머니 품에 안겼다. 내가 다가가 “아빠가 업어줄까” 그러자, 발버둥을 치며 짜증을 냈다. 배가 고팠던 녀석은 12시부터 훨씬 강도가 높게 칭얼대기 시작했고, 이층침대 위에 있던 처남과 다락방에서 잠드신 장인어른을 위해 장모님은 녀석을 데리고 마루로 나오셨다고 한다. 새벽 1시에 다시 방으로 들어가셨지만 새벽3시부터 녀석이 울어대면서 다시 마루로 나오셨다고 한다. 계속 칭얼대던 녀석이 드디어 자존심을 꺾고 “배.가. 고.파.요”라고 입을 연 건 새벽 4시. 장모님이 부랴부랴 누룽지를 차려주셨지만 심하게 허기가 진 녀석의 짜증이 작렬하던 게 내가 목격한 광경이었다. 녀석의 신경질은 엄마가 요리해준 ‘생선찌개(학습용 DVD에서 보았던 음식이름)’를 상에 받고 나서야 조금 누그러졌다. 나와 아내는 새벽 6시 정도가 돼서야 다시 잠자리에 들었다.
다시 눈을 떠보니 아침 9시30분. 몇 시간 전의 전쟁 같은 상황과 달리, 녀석의 표정이 해맑다. 새벽녘 누룽지를 먹고 잠깐 눈을 붙이고 일어나 다시 아침을 제 손으로 양껏 먹었다고 했다.
점심 때 엄마, 할머니, 할아버지와 의류매장에 나갔던 녀석은 푸드코트에서 주문한 돈까스에 별로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고 했다. 그렇게 점심을 굶은 녀석이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던진 한 마디. “배.고.파.요. 집.에. 가.서 밥. 주.세.요”
집에 들어와 아내는 서둘러 닭가슴살을 튀겼다. 녀석은 에디슨 젓가락으로 닭튀김을 집어 케첩을 찍어 한 접시를 먹었고, 밥도 국도 평소 먹던 양을 훌쩍 넘겼다고 했다. 남은 '생선찌개'도 다 먹었다. 퇴근해서 집에 도착했을 때, 녀석은 식사를 금방 마치고 기분 좋게 놀고 있었다. 배가 볼록하게 나온 녀석을 번쩍 안아주었다. 꽤 묵직하다.
녀석의 잘못된 식습관, 그로 인한 훈육방식을 둘러싸고 겪었던 갈등과 마음고생은 이제 없을 것 같다고 조심스럽게 낙관해본다. 부드럽고 세련된 조언을 해주신 소아과 병원 의사선생님, 그리고 일요일 새벽녘 사투를 벌이면서 녀석의 식습관을 바로잡아주신 장모님께 감사의 말씀을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