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연휴에 구미에 있는 형님네에 모여 온 가족이 함께 TV를 보고 있을 때 였다.
'미운 오리새끼'라는 예능 프로그램에서 가수 '김종민'의 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마침 세탁이 끝나서 빨래를 꺼내 널어야 하는 참인데 김종민의 남자 지인이 세탁기에서
빨래를 꺼내는 순간 스튜디외의 패널들이 '세상에' '저건 아니지' '아이고' 하는 한숨섞인
탄성들을 일제히 쏟아 놓는 것이다.
세탁기 안에서는 속옷과 수건과 바지와 웃옷 등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빨래 사이에서 걸레까지 딸려 나오자 탄식과 한숨은 절정에 달했다.
속옷이나 색깔옷은 따로 빨아야지, 어떻게 저렇게 한데 넣고 빨 수 있냐고,
걸레까지 같이 빠는 건 정말 기가 막히다고, 나이든 어머니 패널들은 혀를 끌끌 찼다.
같이 보고 있던 형님과 동서도 저건 정말 너무 심하다고 한마디씩 하며 웃고 있는데
나는 웃을 수 없었다. 걸레야 물론 따로 모아 손으로 빨지만, 속옷이며 수건이며
다른 일반 옷들은 나 역시 몽땅 한데 넣고 세탁기로 빨기 때문이다.
어이없다고 웃어대는 시댁 식구들 사이에서 나는 혹여나 남편이 '우리 마누라랑 똑같구만'하고
한마디 할까봐 마음을 졸이고 있었다. 다행히 남편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빨래... 아아.. 빨래...
형님과 동서는 부지런하고 손도 빠르고 살림도 야무지지만 특히 빨래에 대해서는
아주 철저한 사람들이다.
속옷은 당연히 모아서 손으로 빨고 몽땅 삶는다. 수건도 손으로 빨아 삶아서 쓴다.
양말도 손으로 비벼서 헹굴때에야 세탁기에 넣는 사람들이다.
더구나 형님은 걸레도 한 번 쓰면 바로 빨아 삶는 사람이라 형님집에 가면 종종
차곡 차곡 쌓여있는 눈부신 걸레들을 수건으로 착각하곤 한다.
이런 습관은 명절을 지내러 시가에 와도 고스란했다.
하루 종일 대 식구들 먹을 음식 차리고 치우고, 명절 음식 준비하는 것 만으로도 고달픈데,
저녁상까지 물리고 부엌일을 마치고 나면 그 밤중에 뒷 베란다 수돗가에서 손빨래를 시작했다.
그날 입은 옷들은 죄다 벗어서 빨아야 하는 형님네와 동서네는 매일 매일 빨아야 할 것들이
수북히 쌓였고, 그 중의 많은 것들을 직접 손으로 비벼야 했다.
우리 식구 빨래들은 챙겨간 세탁 주머니에 모았다가 명절 지나고 집에 가서 세탁기로 한번에
돌릴 생각을 하고 있던 나는 밤 늦도록 쉬지 않고 들려오는 뒷베란다의 물소리를 들으며
혼자 안절부절 했다.
형님과 동서는 여전히 움직이고 있는데 제일 늦게 시집 온 나 혼자 편하게 쉴 수 도 없고,
그렇다고 나도 내 빨래를 모아 들고 그 사이에 낄 자신도 없으니
형님과 동서가 빨래를 다 마칠때까지 괜히 뒷베란다를 오가며 뭐 도울일 없냐고,
다 하셨냐고 물어가며 가슴을 죄어야 했다.
과연 마른 빨래 정리할 때 보니 형님네와 동서네는 속옷이며 양말 바닥까지
눈부시게 깨끗했다.
속옷은 그렇다 치고 양말 밑이야 늘 바닥에 닿는 부분이니 좀 까매도 되지 않을까...
나는 생각하지만 형님과 동서는 양말 까지 야무지게 비벼 빨아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그 두 며느리 사이에서 나 혼자 빨래를 내 놓지 않고 있으니 두 사람에게 나는 얼마나
게으르고 지저분한 사람으로 보였을지 짐작할 수 있다.
그냥 손으로 살살 비뼈 빨아서 깨끗하게 하고 가지 , 모아서 집까지 가져 가는 나를
딱하게 여기고 동서가 나서서 내 빨래를 대신 해주겠다고 하기도 했다.
어느쪽도 나로서는 참말로 마음 편치 않았다.
처음에는 두 사람 흉내를 내어 좁은 뒷베란다에 쪼그리고 앉아 손으로 속옷이며 양말을
비뼈 빠는 시늉을 해보기도 했으나 그런 건 몸에서 익은 사람이 하는 것이지
따라서 시늉 하는 것은 어림없는 일이라는 것을 바로 깨달았다.
몇 번 애쓰다가 포기해버렸다.
차라리 지저분하고 게으른 며느리가 되는 편이 내가 살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사실일것이다. 지금도 나는 청바지며 수건이며 속옷이며 몽땅 한데 넣고
세탁기로 빨고 있으니 말이다.
가끔 염색된 물이 빠질 것 같은 미심쩍은 옷들은 조심스럽게 손으로 빨기도 하지만
대개는 내 감을 믿고 함께 빨아 버린다. 한 번은 남편의 흰 와이셔츠를 달달한
분홍색으로 만든 적도 있지만 별 탈 없었다.
빨래가 너무 많아서 한 번에 할 수 없을때는 색이 진한 옷과 흐린 곳을 나누어서
세탁할 때도 있지만 매일 매일 세탁기로 그득하게 빨아야 다섯 식구 옷을 건사할 수 있는
내 살림에서 그런 세심함까지 부리다간 내 몸이 남아나지 않을 것이다.
양말 바닥이야 까맣건 하얗건 나는 상관없다. 눈 부신 양말보다 내 손목이 더 소중하다.
몸 부서져라 일 하는 사람이 못 된다. 부지런하게 쓸고 닦고 빠는 사람도 못 된다.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룰 수 있으면 바로 미루며 산다. 발 등에 불 떨어져도,
무릎을 지나 허벅지까지 타 오를 정도가 되어야 어맛 뜨거라 하며 후다닥 시작하는 사람이다.
설거지가 수북하게 쌓여도 귀찮으면 고대로 다음날로 미룬다.
집안일이 넘쳐도 재밌는 책 잡으면 딴 세상 속으로 바로 들어간다.
집 정리와 대청소는 중요한 손님이 올 때 몰아서 한번에 한다.
매일 청소기 돌리고 이틀에 한번씩 물걸레질 하는 것 만으로도 기특해 한다.
퍽이나 게으르고 지저분하지만 그닥 문제없이 살고 있다.
다시 빨래 얘기를 하자면, 세탁기로 빨아 입힌 속옷과 수건을 쓰면서도 우리 가족은 별 탈 없다.
아이들도 건강하게 잘 큰다. 다만 남편의 흰 런닝과 딸 아이의 흰 속옷은 열심히 삶아 빤다.
행주도 삶아서 빤다. 걸레도 아주 더러워지면 한 번씩 삶는다. 이 정도만 해도 스스로 대견하다고
여긴다. 집안일이 많아도 수시로 한 눈 판다.
지금만해도 그렇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겨울옷을 꺼내야 해서 거실 가득 옷들이 펼쳐져 있는데
정리할 생각도 안 하고 이 글 먼저 쓰고 있다. 무슨 일을 하려고 마음 먹으면 그 일을 마치기도 전에 그 일에 대해서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이 먼저 드는 사람이라 어쩔 수 없다.
날이 추워지면서 빨래가 더디 마르는 시절이 오고 있다.
이제 슬슬 바지는 이틀씩 입으라고 해야겠다. 형님과 동서는 펄쩍 뛸 일이지만 나는 탁탁 잘 털어서
한 두 번 더 입히는 일 따위에 눈 하나 꿈쩍하지 않는다. 속옷만 매일 갈아입으면 되지 나머지 옷이야 버틸 수 있는 한 더 입어라 주의다.
이런 내가 지저분하고 게으르다고 해도 좋다. 나는 내가 더 중하다.
빨래 따위는 내가 편한 대로 하면 되는 것이다.
다만 15년 째 매일 엄청난 양의 빨래를 씩씩하게 빨아주고 있는 우리집 세탁기...
고장나면 새로 좋은 걸로 바꾸고 싶어서 함부로 막 쓰고 있는데 당췌 고장이 안 난다.
빨래보다도 이 놈이 세탁기가 언제 고장이 나려나...에만 눈독을 들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