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첫째 주말은 야구로 점철된 시간이었다.

7월4일 토요일. 넥센과 두산의 경기를 보러 잠실구장으로 갔다.

전날 7회까지 7-3으로 앞서가던 넥센이 연장승부 끝에 7-8로 역전패 당한 뒤의 승부였다.

전날 패배에 대한 설욕을 기대하며 응원단장이 정면으로 보이는 레드석에 자리를 잡았다.

열심히 응원하려는 순수한 마음으로 응원단 가까이에 처음으로 앉았다.

그런데...

 

1회초 공격 때부터 응원단장이 손짓을 한다. 어서들 일어나라고.

앞사람이 일어서니 나도 앉아있을 도리가 없다.

꼬꼬마 녀석이 문제였다. 1학년 1반에서 가장 큰 키이지만

1m30이 채 되지 않는 녀석은 일어나봤자 앞사람 등판을 마주해야 했다.

고육지책으로 제가 앉고있던 의자에 발을 딛고 서야 했다.

그것도 접이식 의자라 발을 조금이라도 의자 뒤쪽으로 디디면 의자 아래로 추락하기 십상.

녀석은 의자 앞쪽에 두 발을 가지런히 모으고 꼼짝도 하지 않은 채 응원했다.

작정하고 응원하러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넥센이 공격할 때 일어서고 수비할 때 앉았다.

그렇게 녀석은 아홉번 의자 위에 올라야 했다.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는 의자 위에서도 녀석은 열정적으로 응원했고

넥센은 두산을 9-5로 제압했다. 버스를 타고 집에 오니 밤 11시.

녀석은 거의 12시가 다 돼 잠자리에 들었다.

 

응원.jpg » 옆자리 여성은 혼자 온 야구팬. 녀석과 커플 아님

 

 

부자 야구 10차전이 예정돼있었던 이번주. 일요일 오후에는 비가 예보돼있었다.

‘녀석이 피곤하니까 늦잠을 자겠지. 그러다 비까지 내리면 10차전이 연기될 수 있을 거야.’

물론 망상은 자유다. 녀석은 9시 조금 넘어 나를 깨웠다. 별로 피곤하지가 않단다.

아침을 먹고 나갔다. 평소보다 늦은 오전 11시.

그늘은 경기장 모퉁이로 도망쳐버렸고 태양은 벌써 내야를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낮은 직구와 슬라이더, 커브를 적절히 배합하며 녀석의 1회초를 무실점으로 틀어막았다.

1회말 나의 공격. 볼넷과 안타가 속출했고 녀석은 좀체 아웃카운트 하나를 잡아내지 못했다.

내가 기량이 나아진 건지 녀석이 문제인 건지 도통 모를 이닝이었다.

어느새 1회말에 10점을 넘겨버렸다.

점수를 차곡차곡 쌓아갔지만 슬금슬금 정무적 판단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냥 여기서 끝내버릴까? 티 나게 아웃 되면 안 될 텐데? 아니야, 녀석도 대량득점 할 수 있어. 뺄 때까지 점수를 빼내야 해. 그런데 끝까지 밀어붙여? 그러다 아예 좌절하면 어쩌지?’

 

그런 고뇌와 번민 속에 점수는 17점까지 쌓였다. 여기까지 오니 이제는 싫증이 났다.

이제는 공을 던지고 싶었다. 그래서 티 안 나게 헛스윙을 해버렸다.

이후에도 나의 구위는 제2의 전성기를 맞은 양 녀석의 방망이를 마음껏 농락했다.

녀석에게 빅이닝은 없었다. 2회말 내 공격에서는 11점을 냈다.

이번엔 투스트라이크 이후 들어온 약간 낮은 공을 스트라이크로 판정해주고 이닝을 종료했다.

3회말에는 6점을 냈다. 반환점을 돌아 4회초를 마쳤지만 경기 시간은 1시간30분을 넘기고 있었다. 그늘은 사라져버렸고 나와 녀석은 땀범벅이었다. 이때 녀석이 현명한 판단을 내렸다.

“아빠, 여기서 끝내자.”

 

34-8. 부자 시리즈 첫 콜드 게임에 사상 최고 득점, 최대 점수차 기록이다.

3연패에다 전례 없는 대패였지만 녀석은 좌절하지 않았다.

경기를 중간에 끊는 대신 배팅볼을 던져달라고 했고 펑고 연습도 했다.

오늘의 패배를 거울삼아 다음 경기를 기약하는 모습이었다.

야구를 하면서 녀석의 마음이 많이 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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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규 기자
서른두살 차이 나는 아들과 마지못해 놀아‘주다가’ 이제는 함께 잘 놀고 있는 한겨레 미디어 전략 담당 기자. 부드럽지만 단호하고 친구 같지만 권위 있는 아빠가 되는 게 꿈이다. 3년 간의 외출을 끝내고 다시 베이비트리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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