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에 푹 빠진 아들녀석. 프로야구 선수가 되겠다는 걸 “아빠 회사에도 ‘야구하니’라고 직장인 야구팀이 있어. 그러니 나중에 직장인 야구선수 하면 돼”라고 하니 알아듣는 눈치였다.

그러나 요 며칠 전 TV에서 우연히 개그콘서트팀 등이 참여한 직장인 야구 경기를 보게 됐다. 느릿느릿 포물선을 그리는 공의 궤적에 아들은 따분해하며 혀를 찼다.

“아빠, 직장인 야구 너무 못해. 나 프로선수 할래.”

‘그래, 일단 시간을 갖고 우리 생각해보자꾸나.’ 끙.

 

야구를 향한 열망이 높아지고 있는 것처럼 주말 오전 아파트 공터에서 벌이는 아들과의 야구놀이도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처음에는 투수와 타자를 번갈아했다. 포수는 대리석으로 잘 마감된 콘크리트벽이 대신했다. 공수 교대를 하려면 나는 3아웃을 잡아야 했고 아들은 1아웃만 잡으면 됐다. 볼넷은 없었고 스트라이크 3개가 쌓이거나 내야땅볼을 잡아 1루에 공을 먼저 던지면 아웃이었다. 점수도 계산하지 않았고 이닝수도 정해놓지 않았다. 하다가 내가 힘들면 그만 하자는 식이었다.

 

그렇게 놀이 수준이었던 행위가 지금은 점수까지 계산하는 ‘정식 경기’로 발전했다. 1루, 2루, 3루는 주차장 고무블럭, 배수로 뚜껑 등을 활용한다. 볼넷도 신설했다. 6회를 기본으로 두 사람은 각각 6이닝의 공격과 수비를 해야 한다. 야수는 없다. 그래서 평범한 내야땅볼이 아니면 장타가 될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제대로 시리즈를 벌인 게 한 달 남짓이다.

 

시리즈 초반에는 녀석의 제구력이 좋지 않았고 공의 위력도 별로 없었다. 그에 비해 나의 구력은 꽤 된다. 소싯적 야구 좀 했고 군대 시절에는 대대 선발투수였다. 오버핸드, 쓰리쿼터, 사이드 암, 언더핸드 모두 구사가 가능하다. 그러기에 나는 녀석을 마음껏 요리할 수 있었다. 통제가 가능한 수준에서 점수를 내주고 다시 따라가고 그랬다. 그러나 대량 득점으로 경기를 뒤집으면 녀석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한다. 놀아주고도 욕먹으면 안 되기 때문에 항상 져줘야 했다. 그것도 티 안 나게 잘.

왜? 녀석의 조막만한 자존심 때문이다. 경기가 잘 풀리는 중간에도 녀석은 항상 물어본다.

“아빠, 져주는 거 아니지?”

 

그렇게 1차전을 15-13으로 졌다. 티 안 나게 마지막에 헛스윙 삼진을 당했다. 화끈한 타격적이었던 2차전은 32-20으로 졌다. 3차전에서는 나의 마지막 공격을 남겨놓고 13-11, 2점차였다. 녀석의 심장을 쫄깃하게 만들어주고 싶어 초구에 힘차게 방망이를 돌렸는데 헛스윙이 되고 말았다. 3연패. 녀석의 기량이 나아지는 게 느껴진다. 내가 던지는 정직한 스트라이크는 여지 없이 두들겨 맞았다. 한 경기 뛰고나면 체력이 방전될 정도였다.

 

뭔가 게임이 내 통제권을 벗어난다는 느낌을 받았다. 룰미팅이 필요했다. 녀석에게 주어지는 공격권을 3아웃에서 2아웃으로 줄이자고 제안했다.

“에이, 됐어. 그냥 해.”

그 다음에는 볼넷을 없애자고 했다. 3볼로 몰려서 스트라이크를 던지다 장타를 맞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싫어. 그냥 해.” 이런 단호박 같은 녀석이 있나.

 

“13대11, 13대11. 아빠를 마지막에 잡았다네.”

3연승에 취한 아들은 잠자리에 누워서도 노래를 불러댔다. 그러고 또 묻는다.

“아빠, 봐준 거 아니지?”

음... 이제는 진실을 말해야 했다.

“사실은 아빠가 좀 봐줬어. 너 만날 지면 삐치잖아. 그래서 헛스윙도 하고 그랬어.”

“그래? 그럼 봐주지 마. 앞으로 안 삐칠게.”

오케이. 그럼 제대로 해보자.

 

그렇게 해서 5월 초에 열린 4차전에서 나는 24-17로 대승했다. 그러면 그렇지. 풋. 

그리고 오늘 운명의 5차전. 2연승을 이어가고 싶었다. 그러나 공이 중앙으로 몰렸다. 완급을 조절해야 하는데 타이밍을 뺏는 변화구에 이제 녀석은 더 이상 속지 않았다. 몸이 덜 풀린 상황에서 1이닝에 6실점했다. 반면 녀석의 기량은 일취월장하고 있었다. 흔들렸던 제구력이 안정을 찾았고 볼에 속도가 더 붙었다. 난 불리한 볼카운트에 몰려 삼진을 당하기 일쑤였다.

 

 c.jpg

 

투구에서는 변화구가 더 이상 먹히지 않기 때문에 나는 이제 힘으로 승부해야 했다. 강속구로 제압했고 2회부터 6회까지 2점으로 막을 수 있었다. 6회말 마지막 공격을 앞두고 8-3으로 뒤진 상황. 선두타자가 볼넷으로 출루했다. 녀석의 제구력이 흔들리고 있었다. 두 번째 타석에서도 연속으로 볼 3개가 들어왔다. 예의상 기다렸더니 4번째 공은 스트라이크. 바깥쪽 낮게 들어오는 5번째 공은 내가 커트했다. 2-3 풀카운트. 볼넷이냐, 안타냐, 삼진이냐. 우리는 서로 한 타이밍씩 쉬며 크게 숨을 내쉬었다.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녀석이 오버핸드로 힘차게 공을 뿌렸다. 스트라이크면 배트가 나가야 하는데... 공은 몸쪽으로 파고들었다. 꽉찬 스트라이크에 루킹 삼진. 경기는 이렇게 끝이 나고 말았다.

 

아들은 모자를 하늘로 날리며 기뻐했다. 그리고 마지막 상황을 복기했다.

“아빠, 사실은 슬라이더를 던지려고 했는데 아빠가 그전에 슬라이더를 친 적이 있거든. 그래서 내가 커브를 던졌어.”

“뭐? 커브? 직구였는데?”

“아니야, 커브야.”

슬로우 비디오도 없으니 직구든 커브든 알 방법이 없다. 어쨌든 내가 졌다.

 

세리머니.jpg  

 

난 혼신을 다해 역투했고 타격했다. 전혀 봐주지 않았지만 결과는 아들의 승리였다. 이제 봐주지 않고 연기하지 않아도 같이 야구를 즐길 수 있을 정도까지 아들이 컸다. 6차전이 기대된다.

 

** 5월9일, 제 개인 블로그에 올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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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규 기자
서른두살 차이 나는 아들과 마지못해 놀아‘주다가’ 이제는 함께 잘 놀고 있는 한겨레 미디어 전략 담당 기자. 부드럽지만 단호하고 친구 같지만 권위 있는 아빠가 되는 게 꿈이다. 3년 간의 외출을 끝내고 다시 베이비트리로 돌아왔다.
이메일 : dokbul@hani.co.kr      
블로그 : plug.hani.co.kr/dokb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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