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들어 일본은 지진 때문에 바람잘 날이 없다.
지난 4월에 일어난 구마모토 지진을 시작으로
며칠 전에는 돗토리 지역에서도 진도6 규모의 지진이 일어나
피난 중인 주민들이 많다.
이 지진이 있었던 날은 우리 가족이 사는 도쿄까지도 조금 흔들렸는데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들이 수업 중에 학교 건물이 흔들려
잠시 책상 아래에서 대기를 했다는 얘기를 들려 주었다.

언제 어느 곳에서 지진이 일어날 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예년보다 점점 커지다 보니, 가정과 학교, 공공기관에서는
지진을 대비해 준비해둔 생존배낭이나 피난용 물품을 다시 점검하는 분위기다.
우리집도 현관 구석에 오랜동안 방치하듯 놓아두었던,
생존배낭을 꺼내 생수나 건빵의 유효기간을 확인, 새것으로 교체하고
더 필요한 것들은 보충해 두었다.

일본은 동네마다 주민들 스스로가 모임을 꾸리는 '자치회'라는 게 있다.
이 모임에 가입한 주민들은 1년에 3만원 정도의 회비를 내는데
이 비용으로 동네 행사나 이벤트를 준비하고,
주민 인원에 맞춰 지진을 대비한 물품(생수, 건빵, 알파미 등)을 창고에 구비해 둔다.

지진이 잦은 요즘이라, 자치회에서는 주말을 이용해 <대피훈련> 행사를 열었다.
지진이 일어날 경우 우리 동네 주민들이 모이도록 정해진 곳은
동네 놀이터인데 이 곳에서 밥을 함께 지어 먹는 것이 이날의 중요한 이벤트였다.
집들이 무너지거나, 수도, 가스, 전기 등을 사용할 수 없을 경우를 대비해
놀이터에서 불을 피우고 밥을 해 먹는 연습을 하는데
솥을 걸 아궁이를 대신하는 곳은 놀랍게도 '벤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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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몇 년 사이에 만들어진 놀이터에는
우리 동네처럼 지진이 일어났을 때, 불을 피워 음식을 해 먹을 수 있는 시설로
변신하는 벤치들이 설치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재난대비를 담당하는 자치회 분들이 아이들도 쉽게 벤치를 분리할 수 있도록
설명해 주셨는데, 평소에 앉아서 놀던 의자가 다른 모습으로 변신을 한다고 하니
아이들이 정말 신기해하며 다들 열심히 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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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 표정이 어찌나 진지한지 다들 숨죽여 지켜보았는데
그 집중력이 정말 대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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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하나였던 벤치가 둘로 나눠지자
아이들은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 우르르 몰려가 앉아보며 여전히 신기해했는데
망처럼 생긴 부분 아래에서 불을 피우고
그 위에 솥을 얹어 밥을 짓거나 음식을 할 수 있다는 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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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치회 창고에는 만약을 대비해 장작과 성냥도 준비되어 있었는데
그걸 이용해 이렇게 불을 피웠다.
캠핑 문화가 대중화된 까닭인지, 신문지 등을 이용해 성냥만으로 불을 피워
장작을 피우는 건 할 수 있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아빠들의 참여도와 관심도 무척 높았고,
이렇게 놀이터에서 함께 밥을 지어먹는다는 사실에
어른도 아이도 모두 생기와 의욕이 넘쳐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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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절약을 위해 이 날은 뜨거운 물만 끓여
'알파미'(뜨거운 물을 부으면 몇 분 사이에 밥이 되는 쌀)를 만드는 과정까지,
비상시, 우리 자치회에서는 이런 식으로 재난에 대처할 거라는 설명으로 행사는 마무리되었다.
완성된 알파미의 시식은 60대 어머님들께서 도와주셨는데
참가 인원수대로 따뜻한 밥을 나눠담고 준비해오신 단무지나 김 등을 넣어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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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아이들과 어른 모두, 밥을 하나씩 받아들고 놀이터 여기저기 앉거나 서서
주말 점심을 간단하게 먹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자치회 창고에 비축되어 있던 유효기간이 가까워진 생수와 건빵, 비스킷을
이날 아이들에게 한아름씩 나눠 주었는데
아이들은 양손 가득 과자가 든 캔을 들고 무척 행복해했다.
이번 행사를 계기로 창고 물품을 정리해서, 새롭게 비상식을
구입해 넣어둘 거라고 한다.

아직 불이 꺼지지 않은 장작불 주변은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고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연기와 장작 냄새로 어쩐지 마음이 편안해졌다.
동네 엄마들은, 아마 지진이 일어나면 심리적으로 불안정해지기 쉬운데
이렇게 밖에서 낯익은 얼굴들과 밥을 해먹고 장작 피우는 냄새를 맡으면
그것만으로도 많이 안정이 될 것 같다고 한다.

어른에게도 참고가 되고 좋은 경험이었지만
이런 연습과 훈련이 무엇보다 지진으로 놀란 아이들을
위로하고 안심시킬 수 있어 참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지진에 대한 두려움만 강조하기보다
만에 하나, 비상사태가 생긴다해도 이렇게 모두 힘을 합해서
밥을 지어먹고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할 거라는
의지, 희망..?  그런 걸 아이들이 느낄 수 있지 않을까.

많은 비용을 들여 재난대비를 하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우리의 일상 주변, 늘 쓰는 물건과 공간을 이용해
비상시에 활용하는 지혜가 더 앞섰으면 좋겠다.
지진을 비롯한 재난이 일어나면, 현실적인 피해복구와 함께
아이들이 심리적인 트라우마를 겪지 않도록 마음을 잘 보살펴 줘야 한다.

도로가 갈라지고 집이 무너지고 전기, 가스가 모두 끊긴다해도,
동네 놀이터에서 따뜻한 불을 피우고 밥을 지어 먹으며 양초를 밝혀
친구들과 수다를 떨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아이들은 행복해 한다.
어려운 시대, 두려움이 가득한 현실 앞에서
아이들을 제대로 지키는 일은 어쩌면 아주 작은 진심에서 시작될 지도 모른다.
'지진대피훈련' 속에서도 천진난만하기 그지없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오랜 시간 여운으로 남는, 그런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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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희
배낭여행 중에 일본인인 지금의 남편을 만나 국제결혼, 지금은 남편과 두 아이와 함께 도쿄 근교의 작은 주택에서 살고 있다. 서둘러 완성하는 삶보다 천천히, 제대로 즐기며 배우는 아날로그적인 삶과 육아를 좋아한다. 아이들이 무료로 밥을 먹는 일본의 ‘어린이식당’ 활동가로 일하며 저서로는 <아날로그로 꽃피운 슬로육아><마을육아>(공저) 가 있다.
이메일 : lindgren707@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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