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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일본 정부가 내년부터
산후 우울증 예방 검진비를 지원한다는 신문 보도가 있었다.
여성들의 산후 우울증 예방을 위해 처음으로
7억엔(약 75억 7천만원) 규모의 검진 예산을 편성하기로 했다고 한다.

이를 담당하는 후생노동성은,
출산 후 여성이 육아에 대한 불안과 중압감으로 정신적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산후 2주와 한달이 되는 시기 2차례에 걸쳐
우울증 검진비를 지원한다고 발표했다.
지원 비용은 1회에 5천엔(약 5만4천원) 정도로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각각 절반씩 부담하는데,
점차적으로 무료화하는 방향도 검토중이라 한다.

출산 후 여성들의 우울증 예방과 함께, 육아에 필요한 상담도 가능하다는 이 정책은
출산과 육아로 인한 엄마들의 심리적인 고충을 사회화시켰다는 면에서 참 다행스럽다.
그런데, 이 신문기사를 보자마자 드는 내 생각은
'엄마들의 우울증이 출산 후에만 있는 줄 아나?!'
였다.

산후 우울증은
호르몬의 불균형 등으로 산후 2주에서 한달까지가 특히 심하다고는 하지만,
사실 아이를 키우는 내내, 여성들은 정말 수도 없이 다양한 심리적인 어려움을 겪는다.
경제적, 사회적 불안과 위기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만큼 심각해지는 요즘은
엄마들의 정신적인 부담이 더 클 것 같다.

내가 처음 일본생활을 시작한 2000년대 초반에 봤던, 한 TV프로그램이 생각난다.
<엄마들의 소리없는 비명>이란 제목의 다큐였는데
어린 아이들을 키우는 여성들의 사회적인 고립감과 우울증에 대한 내용이었다.
이 프로그램의 인터뷰에 나왔던 여성들은 대부분
출산 이후 사회와 급격히 멀어지는 소외감,
육아의 고충을 털어놓을 대상이 없는 답답함,
하루종일 울기만 하는 아기를 돌보는 난처함 때문에
꽤 심각한 우울증을 앓고 있다고 고백했다.

이렇게 20여년 전부터 육아 우울증에 대한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사회화되기 시작했으니
일본 정부가 산후 우울증 예방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건 당연하다 싶다.
보통 엄마들의 정신건강에 대해선
일본의 경우, 영아 정기검진 때 잠깐 상담할 수 있는 기회가 있긴 하다.
아기의 발달상태에 대해 각각의 담당자들과 대화를 나누는 시간에
엄마 자신의 상태나 이야기를 간단하게나마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때는 어디까지나 아이의 발달상태를 확인하는 게 목적이다보니
엄마 자신의 심리상태를 중심에 놓고 천천히 이야기하기는 어렵다.
그런 면에서 산후 2회에 걸친 검진과 육아 상담 기회를 지원하는 이 정책은
산후 우울증을 조기에 발견하고 예방할 수 있다는 면에서
의미있는 제도라고 생각한다.

특별히 심리적인 어려움을 겪지 않는 여성이라해도
산후에 겪는 자신의 상황을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 건 무척 중요하다.
이야기를 하는 것만으로도 스스로의 마음을 돌아보고 안정을 찾을 수 있으니까.
정부가 육아문제나 저출산 문제를 좀 더 깊이 고민한다면,
이번 산후우울증 예방 정책의 대상을 0-18세 아이를 둔 엄마들 모두에게
확대해보는 건 어떨까.

아이를 키우다 보면 참 그렇다.
어느 누구에게도 털어놓기 힘든 그런 이야기들을
엄마들은 참 많이 품게 된다.
가깝게 지내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는 쉽게 털어놓아도
아이에 대한 이야기는 쉽게 할 수 없을 때가 많다.
그렇다고 전문 상담가를 찾아갈 정도는 아닌데, 뭐가뭔지 잘 모르겠고
걱정이 되고 답답할 때가 육아의 고비고비마다 나타난다.

가깝게 지내는 동네 엄마들과 속내를 털어놓으며 공감과 위로를 얻는게
좋은 방법이기도 하지만, 자칫 잘못 하다간 이상한 소문에 시달리기도 하고
인간관계가 어긋날 수도 있어 이 또한 쉽지 않다.
이러든 저러든  엄마 노릇이 쉽지 않은 세상이다.

꼭 여성이 아니라해도
양육의 주된 역할을 맡고 있는 어른은
여러가지 심리적인 어려움을 겪게 된다.
이런 어려움을 조금씩 사회가 함께 공감해 나갈 수 있는
분위기가 만들어지면 좋겠다.
문제가 드러난 뒤에 해결하려고 하기보다
미리 예방하고 돌보는 사회의 노력이
갈수록 심각해지는 아동학대를 예방하는데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30대의 폭풍육아 시기가 지나고, 두 아이가 어느 정도 자라
40대 중반의 엄마가 된 요즘은 그런 생각이 많이 든다.
육아 우울증을 제대로 겪을 여유도, 시간도, 환경도 허락되지 않는 곳의
엄마들의 삶은 얼마나 고단하고 외로울까.
외국인 엄마, 장애나 문제를 가진 아이의 엄마, 따돌림 받는 아이를 둔 엄마,
엄마들 사이에서 소통의 어려움을 겪는 엄마, 생계를 책임져야하는 엄마 ...
차 한 잔 마실 여유와 편견없이 내 이야기를 들어줄 누군가도 없이
홀로 마음의 짐을 가득 지고 사는 엄마들이 이 세상엔 얼마나 많을까.

살면서 겪는 많은 감정들이 그렇듯이
우울한 감정도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잠시 멈춰, 나의 마음과 그동안의 육아를 돌아보고 스스로를 다독일 수 있는
기회로 삼을 수도 있지 않나.

아이를 건강하고 행복하게 키우는 일이
더 이상 부모 개개인만의 노력으로 되지 않는 세상이다.
국가 차원의 다양한 지원과 이웃들의 따뜻한 관심이
엄마들의 마음에 닿을 수 있었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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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희
배낭여행 중에 일본인인 지금의 남편을 만나 국제결혼, 지금은 남편과 두 아이와 함께 도쿄 근교의 작은 주택에서 살고 있다. 서둘러 완성하는 삶보다 천천히, 제대로 즐기며 배우는 아날로그적인 삶과 육아를 좋아한다. 아이들이 무료로 밥을 먹는 일본의 ‘어린이식당’ 활동가로 일하며 저서로는 <아날로그로 꽃피운 슬로육아><마을육아>(공저) 가 있다.
이메일 : lindgren707@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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