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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좋아하고 많이 읽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꿈꾸는 거실의 서재화.
아이가 있는 집이라면 교육적인 면에서
더욱 이상적이라 여겨지는 공간일지도 모르겠다.

큰아이가 좀 어릴 때까지는 우리집도 그랬다.
책은 많을수록 좋은 것이라 여겼고
아이책 어른책 할 것 없이 너무 많은 책들이 꽂힌 책장은
가끔 보기에 안쓰러울 만큼 무거운 자태로 거실에 우뚝 서 있었다.

한번씩 책장 정리를 하고 나면, 가지런해진 책들이 보기 좋았고
어떤 책들은 쓱 지나가며 제목만 읽어도 그 책의 좋은 기운이
내게 전해지는 것 같아 흐뭇했다.
그런데..

사진 속 풍경과는 다르게 집에 있는 책장의 현실은
늘 이렇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유지되기가 참 힘들다는 것이다.
아이가 마구잡이로 꺼내 놓아 뒤죽박죽이 된 그림책들,
신문이나 온갖 광고, 전단지, 유치원이나 학교의 각종 프린트물,
분류하려면 하루 날 잡아야 해결될 듯한 온갖 서류더미들...
책장 사이사이마다 빈틈이란 빈틈은 빠짐없이 이런 물건들로 가득 차
내 눈에는 책장 전체가 커다란 짐 덩어리로 보이곤 했다.

아이들을 키우며 늘어가는 짐만으로도 벅찬데
그것의 몇 배의 양으로 불어만 갔던 책들.
너무 소중한 물건인데 너무 부담스러워진..
책에 대한 나의 이런 이중적인 감정은
세월과 함께 정리되지 않은 채 쌓여만 갔다.

이런 상태로 몇 년을 그대로 방치하다보면
오래된 책장 선반은 무거운 책들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조금씩 휘어지기 시작한다.
그 위에서 몇 년째 한 자리를 떠나본 적 없는
먼지쌓인 책들과 각종 서류더미들에 잡다한 집안 물건들까지 더해지니
정작 책장의 주인인 책은 그런 물건들에 가려져
꺼내보기 힘든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결국
나는 결혼 초부터 그토록 로망이었던 '거실의 서재화'를
지금 살고 있는 집으로 이사오면서 그만두게 되었다.
많을수록 좋다고 여겼던 책들이
나의 삶에 커다란 짐이 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힘든 이사를 통해 절실히 깨달았다.
버리거나 나누거나 정리하지 못한 채, 오랜 세월동안
쌓이기만 한 책들은 언제부턴가 우리집의 천덕꾸러기가 된 것이다.

더 이상 우리 가족에게 필요없는 책들은
기관이나 단체에 기증하거나
중고책으로 팔거나, 이웃친지들과 나누거나 하면 되는데
너무 지나친 책 욕심이 그런 시기를 계속 미루게 하고 막아왔다.

이걸 어떻게 할까.
일단은 아이들 학교나 유치원 바자회에 조금씩 기증하는 걸 시작으로
천천히 조금씩 책 정리를 시작했다.
그런데 참 진도가 더디기만 했는데
책에 대한 추억과 미련이 정리하려고 잡았던 책을
다시 책장으로 돌려놓기를 반복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미 있는 책들을 정리하기가 그렇게 힘들다면,
일단은 필요 이상 더 늘어나지 않도록 조절하는 것부터 해 볼까?
그러니까.. 독서 다이어트?!

- 책 구입은 꼭 필요한 것만으로 한 권씩 사 보기.
- 구입만 하고 읽지않은 채로 쌓아둔 채, 새 책을 사지않기.
- 빌려 읽을 수 있는 책은 되도록 도서관을 이용하기.
- 한 권을 읽더라도 천천히 깊이있게 읽기.
- 아이들에게도 많은 양의 책보다 한 권씩, 제대로 읽고 이해하고
  다음 책으로 넘어갈 수 있도록 권하기.

이렇게 마음먹고 얼마를 지내다 보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독서는 아이에게나 어른에게나 꼭 필요하고
삶을 위해서도, 교육을 위해서도 정말 좋은 것이지만
가끔은 필요 이상으로 더 많고 더 다양한 책을 읽어야 한다는
부담감을 갖게 된 건 아닐까 하는..

읽고 나면 분명 어떤 식으로든 내 삶에 도움이 되고
마음으로 정리하고 남게 되는 것이 많다는 건 확실하다.
20대 시절부터 어린이책 관련 일을 해 오고 있기에
책이라는 존재가 사람의 삶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이들을 키우면서 새롭게 깨닫게 된 건,
필요 이상으로, 너무 많은 책이,
또 그것을 다 읽기를 강요하는 환경이 될 때
아이들의 삶에 책은 오히려 집중하는데 방해가 될 수도 있다는 것.
책 읽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아이들이 직접 몸으로 겪고 다양하게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줄어들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독서와 실체험의 균형이랄까.
책을 읽는만큼 실제 삶에서의 경험과 실천이 조화를 이루어야하는데
그러질 못했던 것 같다.
단순한 삶에 대해 쓴 어떤 책에서 '불필요한 독서'라는 말이 있었는데
신선하면서도 공감이 가는 말이었다.
독서 자체를 부정하는 말이 아니라,
자신에게 필요한 만큼 읽었으면 더 이상 책에 의지하며
시간을 허비하기 보다
삶 속에서 직접 부딪히며 경험해 보는 게 낫다는 뜻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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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초등 졸업을 앞둔 큰아이가 학교 도서관에서 그림책을 한 권 빌려왔다.
아이가 유아기 때 함께 읽은 적이 있는
사노 요코의 <100만 번 산 고양이>라는 그림책이었다.
큰아이는 학교 독서부에서 활동하고 있는데
졸업 전에 마지막 이벤트로 저학년 동생들 반에 가서
그림책 읽어주기를 할 예정이라 이 책을 골랐다고 한다.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들과 간식으로 도너츠를 먹으며
<100만 번 산 고양이>를 오랜만에 펼쳐 보았다.

엄마 : 와.. 네가 이 그림책 본 때가 언젠데.. 어쩐 일로 이 책을 골랐어?

딸 : 대상이 2학년인데, 이제 곧 3학년이 될 애들이니까
     좀 진지한 내용이 좋을 것 같아서.

엄마 : 이 그림책 오랜만에 보니 어때? 기억에 남는 구절 있어?

딸 : 응. 맨 마지막 구절.
    "그 이후 고양이는 다시 태어나지 않았다."

엄마 : 왜 다시 태어나지 않게 됐는지, 이제 알 거 같아?

딸 : 응. 진정한 사랑이 뭔지 깨달았기 때문이겠지?!

내가 처음 <100만 번 산 고양이>란 그림책을 읽은 건 20대 때였다.
두 번째는 30대, 큰아이가 유아였을 때 아이에게 읽어주며 다시 읽었고
세 번째는 40대가 되어 작가 사노 요코에 대한 글을 쓸 일이 있어 다시
찾아 읽었는데, 작가의 에세이와 함께 보니 전보다 그림책을 더 깊이있게
이해하게 되었다.
네 번째는 이번처럼 내가 읽어준 그림책을 아이를 통해 다시 읽고 느끼게 된 것이다.

누나가 엄마랑 주고받는 이야기를 듣고 있던 둘째는
자기도 읽고 싶다고 해서 그날 밤 잠들기 전에
둘째와 함께 읽었다.
아들과 함께 읽는 <100만 번 산 고양이>는
딸에게 읽어줄 때와는 또 달랐다.

며칠 후, 큰아이는 저학년 동생들에게 그림책을 읽어주고 와서는
반응이 너무 좋았다며 뿌듯해 했는데
문득 이 아이가, 엄마가 되어 자신의 아이에게 이 책을 읽어줄 때는
또 어떤 느낌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가 된 내가 손주들에게 이 책을 읽어줄 땐
또 어떤 마음일까..?

한 권의 책을, 긴 세월을 두고 이렇게
다양하고 깊이있게 읽는 것.
이것 역시 독서 다이어트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끊임없이 새로운 책을 찾느라 검색하고
책 속에서 삶의 답을 찾기 위해 애쓰기 보다
이미 내가 갖고 있는 좋은 책들을 다시 골라 천천히 읽으며
마음의 정리를 해 보는 것.

단 한 권의 책이라도
그 책이 아이의 마음에 씨앗으로 남아
아이의 내면의 성장과 함께 한다면 그것만으로도
독서는 의미있는 것이 아닐까.
미야자키 하야오가 <책으로 가는 문>에서
"단 한 권의 책이면 충분하다"고 말한 건 바로 이런 뜻이었을 것이다.

양으로 승부하지 않는 독서교육, 독서 다이어트는
의외로 책에 대한 집중력을 키워주는 지름길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요즘 우리집 거실에는 거대한 책장 대신
한 두 권, 많아야 4-5권 정도의 책만 거실 가운데에 잘 보이도록
전시해 두고 있다. 이 달의 책, 이 주의 책 이런 식으로.

단 몇 권이라도 오랫동안 그 책을 기억할 수 있도록
시간과 여유를 가지고 책을 대하기.
이미 있는 책들을 다시 정리하고 이웃과 나누며 다시 읽어보기.
그리고 책읽는 만큼 실천도 많이 해 보기.
곧 다가올 새 봄에는 이런 독서 다이어트에
제대로 한번 도전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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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희
배낭여행 중에 일본인인 지금의 남편을 만나 국제결혼, 지금은 남편과 두 아이와 함께 도쿄 근교의 작은 주택에서 살고 있다. 서둘러 완성하는 삶보다 천천히, 제대로 즐기며 배우는 아날로그적인 삶과 육아를 좋아한다. 아이들이 무료로 밥을 먹는 일본의 ‘어린이식당’ 활동가로 일하며 저서로는 <아날로그로 꽃피운 슬로육아><마을육아>(공저) 가 있다.
이메일 : lindgren707@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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