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수요일 아침.
잠에서 깬 둘째가 가방에 든 옷을 꺼내 한참을 코를 묻은 채 있길래,
"왜 그래??"
하고 물으니,
"엄마, 옷에서 슈헤 냄새가 나."
하며 오랫동안 킁킁 냄새를 맡는다.
슈헤는 둘째랑 같은 유치원에 다니는 친구 이름인데,
매주 수요일, 슈헤네 엄마가 파트타임 일을 하느라 유치원 하원 시간에 맞춰 가는게 어려워
내가 대신 두 아이를 데리고 와서 저녁까지 돌보기 때문에, 수요일 아침이면
슈헤군 엄마가 출근길에 맡기고 간 옷보따리가 우리집 거실에 놓여있곤 한다.
아이는 거기서 친구가 갈아입을 옷가지들을 꺼내 냄새를 맡고 있었는데,
특별한 향이 나지않는 우리집 빨래에 비해
섬유유연제 특유의 향이 나는 친구의 옷과 향기로
슈헤와 함께 보낼 수요일이 다시 찾아왔음을 느끼는 모양이다.
다른 요일보다 1시간 일찍 유치원이 끝나는 수요일 오후 1시.
집까지 20분이면 충분할 거리를 두 아이와 함께 걷다보면,
최소한 50분에서 1시간까지 걸릴 때가 많다.
재잘재잘 수다를 떨며 길가에 떨어진 낙엽이나 도토리를 줍기도 하고,
누나가 다니는 초등학교 옆을 지날 때는 운동장에 나와노는 형아들을 한참 구경하기도 하고,
비가 오는 날이면 비옷을 입은 채 맑은 날보다 더 오랫동안 동네를 탐험하며 걷게 되고
또 어쩌다 벌레를 하나 발견하면 무슨 큰일이라도 난듯 온 동네가 떠나갈 듯 흥분한다.
봄부터 이어진 수요일 오후의 이런 일상은
아이들도 나도 이젠 제법 익숙해져서, 자전거를 타고 10분만에 집으로 돌아오는
다른 요일에 비해 '오늘은 또 어떤 걸 발견하게 될까' 은근히 기대가 된다.
1시간 가까이 걸어서 집까지 돌아온 아이들은
함께 옷을 갈아입고, 손을 씻고, 입안을 헹군 뒤, 본격적으로 놀 준비를 한다.
두 아이가 요즘 가장 좋아하는 놀이는
테이블 아래에 자기들만의 기지를 만들어 상상놀이를 하는 것인데,
남자아이들 장난감 뿐 아니라, 누나가 어릴 때 가지고 놀던 여자아이들 장난감까지
총 동원해 한 살림을 차려서 논다.
아들을 키우면서 한 가지, 새롭게 깨달은 것이 있다면
여자아이들 뿐 아니라 남자 아이들도 수다에 대한 욕구가 만만치 않다는 사실이다.
물론 내용과 깊이(?)는 좀 차이나긴 하지만, 남자아이들은 몸으로 부대끼며 노는 걸
가장 좋아하면서도 자기들 나름대로 이야기를 즐기며 끊임없이 놀이를 만들어낸다.
그러다가도 두 아이의 의욕을 가장 불끈 솟게 하는 놀이코너는 바로,
'누가누가 잘하나!'
지난 가을 운동회 때 선보였던 체조를 둘이서 구령을 붙이며 앞다투어 보여준다.
혼자 있을 땐 대충 하던 녀석들이, 경쟁 상대가 있으니 숨이 멎을 만큼
온 몸의 힘을 집중하는 이 어린 아이들의 수컷본능이란..
가끔 이렇게 경쟁에 임하는 남자 아이들의 무모함과 순수함을 볼 때마다 엄마는,
겉으론 웃으면서도 속으론 대견하다해야할지, 안쓰럽다 해야할지 모를 묘한 감정이 들곤한다.
뇌와 아이의 놀이에 대한 책,
<육아는 과학이다>에 이런 글이 있었다.
"믿기 어렵겠지만, 친구와 잔디 위에서 뒹굴며 노는 것이 건강한 뇌 발달에 중요하다.
뛰고 기어오르면서 원시적인 운동 충동을 발산할 뿐 아니라
상위 뇌 발달에 도움이 된다.
이 남자아이들은 자라서 감정과 스트레스를 좀 더 잘 관리할 수 있을 것이다."
정해진 틀 없이 스스로의 충동과 의지에 따라 자유롭게 노는 두 아이를 보며
어른들이 언어로써 자기의 감정과 생각을 표현하는 것처럼,
아이들은 놀이로써 자기의 감정과 생각을 표현한다는 말을 제대로 실감할 수 있었다.
이번 가을부터는 슈헤네 엄마가 일이 없는 날이면,
갈아입을 옷과 간식을 싸들고 함께 유치원으로 마중을 간다.
더 추워지기 전에 밖에서 아이들을 실컷 놀려주고 싶어
유치원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자전거를 달려, 작은 호수와 숲이 있는 공원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가 어두워질 때까지 놀곤 한다.
단 둘이 놀면서도, 집안에서도 밖에서도 게임이나 동영상 한 편 보지않고도
늘 시간이 모자랄 만큼 즐겁게 노는 두 아이가 엄마들은 참 신기하고 고맙다.
이 아이들도 머잖아 이런 아날로그스러운 놀이만으론 성에 차지 않을 때가
곧 닥칠 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봄, 여름, 가을..
서로 다른 세 계절을 함께 지내면서 나눈
수많은 이야기들, 사연들, 그리고 작은 성장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웠고 너무나 소중한 추억이다.
늘 내가 즉흥적으로 지어내는 제안들을 마다하지않고 언제나 기뻐하며 응해준
슈헤 엄마 덕분에 이런 시간을 함께 누릴 수 있었다.
아이들이 뛰어노는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며 바라보는 늦가을 풍경은
흐르는 시간을 붙잡고 싶을 만큼 아름답다.
마른 낙엽냄새, 코끝이 시릴만큼 차가운 공기를 심호흡을 하며 들이킨다.
이토록 사랑스런 계절의 냄새와 다정하고 살가운 친구의 향기가,
변함없이 찾아와주는 고마운 계절처럼
언제나 아이들 곁에 영원하기를 마음 속으로 빌고 또 빌어본다.
얘들아! 우리 겨울이 와도 추위에 기죽지 말고
이쁜 하늘과 나무 아래서 신나게 뛰어놀자꾸나.
다람쥐가 도토리를 부지런히 챙겨 겨울을 준비하듯,
자전거에 먹을것을 가득 싣고 엄마들은 또 달릴 것이다.
겨울아, 준비됐나??
우린 준비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