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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울보다 더한 꽃샘추위가 몰아쳤던 지난주.

바쁘고 산만하기 그지없는 3월 중순의 월요일이 시작되자마자

무서운 몸살기와 목 통증이 내 몸을 덮쳐왔다.

평소에는 감기에 걸려도 하루이틀 푹 자고 나면 금방 낫곤 했는데

이번엔 집에서 20분 정도 걸리는 유치원에 둘째 아이를 데려다주는 것조차

엄두도 못낼 만큼, 시작부터 온몸이 바이러스에 점령당한 듯 했다.


큰아이에게는 혼자 대충 챙겨먹고 학교에 가도록 일러두고

둘째는 어쩔 수 없이 유치원을 쉬게 했는데, 하필

남편은 이날부터 며칠 야근을 해야한다며 새벽부터 짐을 챙겨 출근해버렸으니...

아! 우리 셋이서 또 어쩌나.

육아의 가장 큰 변수는 아이가 아니라 엄마라더니, 이럴 때가 딱 그렇다.

아이들이 돌아가면서 아파도, 혹 둘이 동시에 아픈 사태가 발생해도,

거기다 남편까지 몸져눕는다해도 엄마가 멀쩡하면, 집안은 어떻게든 돌아가게 돼있다.

그런데 엄마인 내가 먼저 아프기 시작했으니.. 그것도 이번엔 증상도 심상치 않았다.


목이 부어오르고 너무 아파 말을 하기가 힘들고 온 뼈마디가 쑤시는 근육통과 한기에

한번 누으면 일어나기가 너무 고통스러웠다. 

아이들에게 옮기기라도 할까봐 아픈 와중에도 그게 더 큰 걱정이었다.

그런 내 곁에서 걱정했던 것보다 둘째 아이는 잘 놀아줬는데

아이가 노는 곳에 이불을 들고가 자리를 펴고 누워 있으니,

엄마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안심이 되는지

혼자 중얼중얼하며 장난감들에 푹 빠져 꽤 긴 시간을 그러고 놀았다.

약 기운에 취한 나는 깜빡 잠이 들었는데,  아이가 너무 조용해서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보니.. 둘째는 바로 내 곁에 자기 베개를 들고와서 곤하게 잠들어 있었다.

아.. 이녀석. 엄마한테 보채지도 않고 혼자 이렇게 잠들다니..

6살이 된 뒤 부쩍 컸다 싶었는데, 막상 이런 모습을 보니 또 짠해지는 건 왤까.


아이들이 많이 협조적이기도 했고 나도 최소한의 집안일만 하며 에너지소모를 줄여

감기가 낫도록 최선을 다했건만, 집밖에 나갈 체력을 회복하기까지는 나흘이란 긴 시간이

걸렸다. 아직 어린 둘째도 아픈 엄마곁에서 고생이었지만, 큰아이는 큰아이대로

아침에 일어나지 못하는 엄마 대신 혼자, 일어나 밥을 챙겨먹고 쓰레기까지 분류해서

요일별로 버려주고 그렇게 학교에 갔고, 돌아와서는 또 집에 없는 아빠 대신

슈퍼에 가서 물이나 빵 같은 걸 사다나르기도 했다.

그런 큰아이 덕분에 아침 늦게까지 쉴 수 있긴 했지만, 그래도 살림을 모두 손놓고 있을 순

없었다. 아주 간단한 음식이라도 아이들이 배고플 때 얼른 먹을 수 있도록, 마스크를 한 채

부엌에서 뭔가를 만들어야했고 집에만 있는 둘째가 너무 지겨워하지 않도록

이런저런 상대를 해줘야 했다. 아픈 와중에도 엄마는 엄마인지, 아이들 먹을 것은

대충이라도 척척 만들어졌다. 문제는 내가 먹을 만한게 너무 없다는 사실..

하얗고 부드러운 흰죽이 너무너무 먹고싶은데, 긴 시간동안 불조절을 하며 끓일 정신이 없어

찬밥을 뜨거운 물에 풀어끓여먹으니 기대했던 그 맛이 아니다..


그래도 이게 어딘가.

큰아이는 그렇다 치더라도 둘째는 제법 커서까지도 내가 아프기만 하면

엄마에게 더 집착하고 달라붙으며 쉬게 해 주질 않았다.

그런데 큰아이가 12살, 작은아이가 6살이 된 지금은

두 아이가 태어난 뒤로 이렇게까지 호강을 하며 감기를 앓은 적이 없다 싶을 만큼,

엄마가 아프도록 내버려둬(?) 준다는 사실만으로도 고맙고 또 고마웠다.

몸은 안 아픈데가 없었지만, 마음만은 아이들이 그동안 많이 자란게 느껴져 뿌듯하기도 하고..

그래도 이담에 우리 딸이 크면, 친정에서 너무 먼 곳으로 시집보내지 말아야지..하고

늘 마음먹게 된다. 서울부산거리만 되도 얼른 달려가 돌봐줄텐데.. 하고, 내가 아플때마다

늘 가슴을 치시는 친정엄마 마음을 나도 이제 잘 알 것 같기 때문이다.

정말 친정만 이렇게 멀지않아도 나도 아이들도 매번 이런 고생은 안 할텐데 말이다.


그렇게 4일정도가 지나 끔찍했던 감기가 드디어 나아간다 싶을 때,

남편이 평소보다 좀 일찍 집으로 돌아왔다.

그동안 전화와 문자메세지로 우리 셋의 상황을 보고받던 그는 요즘 회사일이 너무 바쁜 탓에

집안이 이래도 갑작스럽게는 쉴 수 없는 사정이라며 미안해하고

그런 남편이 늘 야속하지만, 나도 그가 하는 일의 특성을 잘 아니 뭐라 할 수도 없었다.

친정이 먼 것도, 남편 일이 그런 것도, 어쩔 수 없는 일들이 너무 많은 우리 가족의 상황이

내가 아플 때는 유난히 더 싫어지곤 한다.


아무튼, 네 식구가 오랫만에 둘러앉아 지난 나흘 동안의 이야기를 나누는데

나는 일부러 과장까지 해서 남편에게, 아이들이 그동안 얼마나 아픈 엄마를 위해

착하게 있어줬는지 마구마구 칭찬을 퍼부었다.

늘 아기같았던 둘째가 얼마나 의젓하게 혼자 잘 놀아줬는지,

언제나 든든한 첫째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 혼자 밥을 챙겨먹는 건 물론, 간단한 집안정리에

쓰레기까지 치워주고 학교를 다닌 것에 대해, 폭풍칭찬을 해줬다.

몸이 아파 꼼짝하지 못해 그동안 아이들에게 소흘했던 걸,

말로라도 위로해 주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남편은 아이들에게

"정말이야??"  "이야, 우리 00 진짜 대단한 걸?!"  하며 함께 흥분해주었다.

그러고는 내가 얼마나 어떻게 아팠는지,

우리 셋이 얼마나 제대로 못 챙겨먹었는지,

아이들이 얼마나 고생하고 참아줬는지,

빨래와 청소같은 집안일은 또 얼마나 밀려 엉망인지...

주절주절 늘어놓느라 정신없을 때, 아니 이게 무슨 일인가!

갑자기 그런 내 얘기를 듣고 있던 큰아이가 흐느껴 울기 시작하는 거다.


남편과 나는 너무 놀라,

"유리야, 왜 그래 너 어디 아픈거니? 혹시 엄마한테 독감 옮은거야??"

물었더니, 아니라며 고개를 크게 저었다. 그리고는 더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아니, 갑자기 왜 우는 건데.. 엄마가 뭐 잘못 말했니? 얘길.. 해야 알지."


"엉엉... 아침에.. 엉엉.. 혼자 .. 엉엉.. 밥먹고 가는 거..  엉엉.. 너무 싫었어..엉엉엉엉..."


"어.. 그랬어? 그래.. 그랬구나. 근데 엄마는 니가 혼자서 하는 걸 즐기는 것 같았는데.. 아니였어?"


"처음엔 재밌었는데.. 엉엉 .. 이틀 지나니까.. 외롭고.. 엉엉 ... 너무 슬펐어요.. 엉엉엉엉엉.."


그제서야 아이가 우는 이유를 제대로 파악한 남편과 나는,

서로 마주보다 소리없이 웃으며 동시에 큰아이를 꼭 끌어안아 주었다. 

엄마아빠 품에 안긴 아이는 점점 더 큰 소리로 꺼이꺼이 흐느껴 울었다.

갑자기 이게 웬 난리인가 싶은 둘째 녀석은,

그런 우리 주위를 뱅글뱅글 맴돌다가, 한가운데로 몸을 비집고 들어왔다. 


아마 딸아이는, 엄마는 아프고 아빠는 곁에 없었던 지난 며칠을 

겉으로 보기엔 덤덤하고 의젓하게 잘 보내줬지만 속으론 많이 불안했던 모양이다.

감기에 걸려도 하루이틀만에 낫거나 아파도 그럭저럭 일상에 별 차질이 없이 행동했던 엄마였기에

이번처럼 심하게 아픈 걸 곁에서 지켜본 게 처음이었다.

나는 아이의 그동안의 심리가 그런 줄도 모르고, 이참에 아침밥은 이제부터 혼자 차려먹고 가도록

버릇들여볼까.. 하는 욕심까지 품고있었더랬다. 아이가 울면서 하는 말이 아니었다면

아마 다음주부터 야심에 차서, 아이의 아침일정을 모두 스스로 하게 하도록 재촉했을지도 모른다.

아이의 성장가능성이 눈앞에 보이면 서두르고 싶은게 부모의 욕심이다.

그런데.. 역시, 많이 자랐다 해도 딸은 아직 12살 먹은 아이일 뿐..


아이가 성장한다는 건 늘 고맙고 흐뭇한 일이지만

스스로 준비가 안된 아이에게 지나치게 성장을 강요해서도 안된다는 걸 이번에 깨닫게 되었다.

아직 아이는 정신없는 아침시간이더라도 식구들과 함께 우당탕거리며 아침밥을 먹고

빨리 하라는 엄마의 잔소리를 들으며 현관문을 나서고 싶지 않을까..

이제 5학년인데.. 하는 마음에 뭐든지 스스로 다 하길 바라는 마음이, 솔직히 내 맘 속엔 있었는데

당분간은 더 아이의 아침을 따뜻하게 지켜줘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속에 있던 마음을 감추지않고 울면서 보여준 아이에게 고맙기도 하고..


그런데 마음에 걸리는 한가지는 ..

세상에는 이런저런 이유로,

아직 어린 나이에도 식구들이 먼저 빠져나간 텅빈 집에서 혼자 일어나

쓸쓸하게 밥을 챙겨먹고, 혹은 굶은채로 혼자 학교에 가야하는 아이들이 얼마나 많을텐데..

그런 아이들은 어떤 마음일까.. !

요즘같은 현실에선 웬만해선 어려운 일이지만, 엄마가 아픈 집 아이들은

같은 동네엄마들이 그집 아이도 불러 집에서 같이 아침을 먹여, 자기 아이와 함께 학교에 보내는

그런 품앗이 육아를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우리의 이전 세대만 해도, 그런 걸 당연한 일이라 여기며 일상적으로 해 왔던 시절이 분명 있었다.


엄마들도 사람이기에 어쩔 수 없이 1년에 몇 번은 아프다.

그럴 때마다 집집마다 고립된 비극을 겪지 않도록

동네 엄마들끼리 이런 '아침육아' 문화를 만들어보면 어떨까 싶다.

아침밥을 함께 먹이거나 등하원을 대신 도와주는 등의

다른 아이를 위한 20,30분의 짧은 돌봄이 아픈 엄마들을 가장 빨리 낫게 하는 방법이 아닐까.

혼자서만 끙끙대던 엄마들이 아이와 함께 목숨을 끊는 일이 유난히 많았던 요즘,

이웃들 중에 한 엄마라도 먼저 손을 내민 사람이 있었다면,

조금은 더 살아보고 싶은 마음이 들수도 있지 않았을까?


너무 아파 마음까지 약해졌던 이번 감기를 앓으며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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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희
배낭여행 중에 일본인인 지금의 남편을 만나 국제결혼, 지금은 남편과 두 아이와 함께 도쿄 근교의 작은 주택에서 살고 있다. 서둘러 완성하는 삶보다 천천히, 제대로 즐기며 배우는 아날로그적인 삶과 육아를 좋아한다. 아이들이 무료로 밥을 먹는 일본의 ‘어린이식당’ 활동가로 일하며 저서로는 <아날로그로 꽃피운 슬로육아><마을육아>(공저) 가 있다.
이메일 : lindgren707@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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