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지방에 있는 경로당에서 웰다잉 강의를 했다.
강의 준비를 하면서 생각한 건 ‘시계 거꾸로 돌리기 실험’이다.
하버드 대학 심리학과 교수인 엘렌 랭어가 행한 이 실험은
1979년에 70~80대 연령의 노인들을 대상으로 했다.
20년 전인 1959년의 환경과 똑같이 꾸민 은둔처에서
연기가 아니라 실제 과거의 삶을 재현하도록 노인들에게 요청했다.

 

처음 이 실험 참가자들은 지팡이에 의지해서 걸어 다니며
혼자서 몸을 일으키는 것조차 버거워하는 노인들이었다.
그러나 실험이 시작되고 이틀째부터 스스로 자신의 일을 해내기 시작했다.
실험이 끝난 후 이들 모두 청력, 기억력, 악력의 향상,
체중 증가 등 수많은 측정결과에서 ‘더 젊어졌다’고 한다.

 

이 실험이 전하는 의미를 강의에 빌려오기로 했다.
가장 생기 있고 행복했던 ‘인생의 한 장면’을 택해서
그 시절의 에너지를 지금의 자신에게 옮겨오는 시간을 갖기로 한 것이다.

 

경로당강의.jpg » 경로당에서 했던 웰다잉 강의

 

먼저 어르신들께 명상 방법을 소개했다.
호흡에 집중하여 몸의 긴장을 푼 후
자신이 선택한 ‘내 삶의 소중한 사진’을 눈 감고 느끼도록 하면서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전했다.

 

‘사진 속 자신과 소중한 사람의 모습을 마음으로 바라본다.
머리 모양과 옷차림, 얼굴 표정은 어떤지,
무슨 말과 생각을 하는지,
행복한지, 슬픈지, 화가 나는지, 덤덤한지….
그 시절의 내게 말해준다.
열심히 살아줘서 고맙다고.
그리고 소중한 사람에게도 말한다.
내 옆에 있어줘서 고마웠다고.

다시 지금의 나로 돌아와서 묻는다.
그 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른 사람인가?
열심히 살아온 삶의 지혜가 쌓여 지금의 내가 되었다.
나의 삶은 다음 세대에게 이어져 또 다른 열매를 맺을 것이다.
나 자신을 다시 한 번 격려하고 고맙다고 말한다.
이제 내게 있는 사랑과 생기를 모아
주어진 날을 잘 살 것이다.’

 

이런 내용을 전달하면서
노쇠한 지금의 자신에게 적응하는 일이 힘들어도
그 분들 마음 속에 행복한 모습과 생기를 간직하길 바랐다.

 

헬렌 니어링의 저서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에
노년을 간명하게 묘사한 한 마디가 있다.
‘더 이상 바위에서 바위로 건너뛸 수 없게 되었다.’
어떤 설명보다 노년을 구체적으로 실감하게 해주는 말이었다.
또 책에 인용된 트로츠키의 말은 이러했다.
‘노년은 사람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 가운데 가장 예상치 못하는 일 중 하나다.’

 

어릴 적 유치가 빠지고 영구치가 날 때는
그 치아가 ‘영구할’ 줄 알았다.
그러나 내 어머니를 보니 영구치도 ‘영구히’ 빠지는 날이 오고
우리는 그렇게 내 몸, 내 삶과 서서히 이별한다.

 

내가 만난 노인들께서 말하기를,
임종기 연명의료 거부를 위한 ‘사전의료의향서’를 쓰려고
자녀들에게 얘기를 꺼냈을 때
‘왜 재수 없게 그런 얘기를 하시냐’고 펄쩍 뛴다고 했다.
부모의 죽음을 말하는 건 불효이고
극도로 회피하고픈 주제라는 것을 보여주는 우리 사회의 흔한 반응이다.

 

웰다잉을 위해 부모와 자식이 함께 만드는 사진 자서전을 생각한다.
나는 어머니의 사진자서전을 준비하면서
삶의 중요한 순간에 대해 약식 인터뷰를 했다.
예전에 스치듯 들었던 이야기를 자세히 접할 수 있었다.
일제 강점기와 전쟁, 어린 시절 부친과의 사별을 겪었던 어머니가
눈물 범벅이 되어 전하는 얘기를 들으며 나도 함께 울었다.

 

섬마을 의사였던 할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참으로 자상한 부친이었다.
할아버지의 두 동생들은 일본의 통치에 맞서 독립운동을 주도했고
은밀히 밤에 찾아와 운동자금을 받아가곤 했다.
어느 날, 할아버지가 일본 순사(경찰)에게 끌려갔다는 말을 들은 어린 어머니는
몇 리 길을 맨발로 뛰었다.
부둣가에서 배에 타려는 일본 순사 앞에 무릎 꿇고
‘우리 아버지는 죄가 없습니다. 풀어주세요’라고
일본말로 호소하는 어린 소녀를 보고
순사도 안경을 벗고 눈물을 닦았다고 한다.
연행되었던 할아버지는 나중에 풀려났지만
병약한 몸이 되어 한국전쟁 당시 세상을 떠나셨다.

 

부모의 역사가 잊히지 않고 우리에게 생생히 전달되는 것,
죽음에 대해서도 거부하지 않고 함께 나누는 것이
웰다잉 문화의 첫걸음 아닐까.
내 책꽂이에는 어머니와 나의 사전의료의향서가 나란히 꽂혀있다.

 

사전의료의향서.jpg » 나의 사전의료의향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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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주
딸이 뇌종양으로 숨진 후 다시 비혼이 되었다. 이후 아들을 입양하여 달콤쌉싸름한 육아 중이다. 공교육 교사를 그만두고 지금은 시민단체 '사전의료의향서 실천모임'의 상담원이자 웰다잉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일산지역의 입양가족 모임에서 우리 사회의 입양편견을 없애기 위한 공부를 하고 있으며 초등 대안학교에 다니는 아들과 함께 대안교육 현장의 진한 경험을 쌓아가고 있다.
이메일 : juin9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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