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다엘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 나 상담 받고 싶어!’
학년이 바뀌면서 친구관계, 학업 문제 등이
무겁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다엘은 분리 불안 때문에 놀이 치료 등 상담을 꽤 받았다.
당시 다엘의 상황은 내가 가진 문제가 그대로 옮겨간 것이었다.

 

나의 불안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는지 처음 깨닫고는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언젠가 다엘이 학교 여행을 떠나기 전,
나도 모르게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이가 죽을지도 모르니 마음의 준비를 해야지.’
그간 내 상태가 이 정도인지 몰랐기에 충격이 컸다.

 

11년 전, 딸 민이의 죽음 이후 나는 어느 대학 내 상담소에서
10주간 심리상담을 받았다.
가을부터 겨울로 이어지는 시간이었는데
대학 캠퍼스 입구에서 상담소까지 매번 가는 길이 어땠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어느 날, 상담을 끝내고 나와서 벤치에 앉았을 때
겨울나무와 새, 그리고 하늘이 처음으로 눈에 들어왔다.
나를 둘러싸고 있던 오랜 침묵이 순식간에 깨진 듯
갑자기 소란스런 풍경이 가득 눈에 들어온 것이다.

 

사별 이후 눈을 들어 세상을 맞이한 첫 순간이었다.
사려 깊은 상담은 이런 식으로 사람을 깨어나게 한다.
이후, 마음 속 꾹꾹 눌러둔 아우성이 가득 차서 넘치겠다 싶을 때
나는 가끔 시에서 운영하는 상담센터에 들르곤 했다.

 

고양시정신건강증진센터1.jpg » 고양시 정신건강증진센터 입구. 이곳에서 도움을 받았다.

 

다엘도 힘들 땐 센터의 도움을 받도록 했다.
집중적인 전문 상담은 아니었지만
선생님은 정성을 다해 다엘의 얘기를 들어 주었다.

 

지난 주 다엘은 오랜만에 상담 선생님을 만나
짧은 면담을 하고는 상담 약속을 잡았다.
다엘이 상담 선생님을 만날 다음 주가 기다려진다고 해서
어떤 점이 좋냐고 물었더니,
선생님이 자신을 존중해 주는 점이란다.

 

아이에게 누군가 귀 기울여주는 친절한 어른이 있다는 것,
더불어 엄마인 나 자신을 바라보는 시간도 갖게 해준다는 것이 감사하다.

 

상담에는 양면성도 있음을 안다.
누군가의 말대로 심리학에 대한 의존이 지나치면 ‘심려학’이 된다.
스스로 성찰해야 하는 순간에도 전문가에 대한 의뢰심이 생기는 순간,
자생력을 놓칠 수 있음을 절감한 적이 있었다.
이런 면에서 의타심을 경계하면서도
지금은 나 자신과 다엘을 살피고 위로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돌아보면 나는 다엘의 삶에 대해
어느 쪽도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게 아닌가 생각해본다.
성취를 위해 끊임없이 쫓기던 내 과거에 대한 보상으로
아이만은 공부와 경쟁에 시달리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나 미래의 대안적 삶에 보태어,
높은 수준의 지적 성취까지 원했던 건 아닌가 하는 데에 생각이 미치자
가슴이 덜컥했다.

 

극히 원론적인 질문으로 돌아가본다.
지금 엄마로서, 한 인간으로서 나는 행복한가?
여유도 웃음도 잃고
어딘지 알 수 없는 곳으로 뛰어가고 있는 게 지금의 내 모습 아닌가?

 

다엘에게 맘 속으로 편지를 써보았다.

‘친구들끼리만 게임얘기 할 때
네가 눈물바람 했었다는 것 알아.
가장 좋아했던 친구가 다른 친구들하고만 놀 때도
네 마음 얼마나 아팠을까.
월요일마다 학교 가기 힘들다고 했지?
하루 땡땡이 치고 서점도 가고 극장도 가자.
엄마가 많이 웃어주지 못해서 미안해.
슬슬 공부 습관 붙이자고 몰아붙인 것도 미안해.
우리 같이 많이 웃고 많이 놀자.’

 

이번 일요일, 다엘은 오랜만에 놀러 온 친구와 함께
인라인 스케이트와 자전거를 타며 행복해 했다.
친구가 자신의 집에서 가져온 게임기를 내놨을 때 내가 끼어들었다.
“우리 집은 디지털 청정지역이야. 게임기는 내게 맡기고 놀아라.”
순순히 게임기가 내 손에 넘어오자 다엘이 친구에게 호소했다.
“내가 이렇게 힘들게 산다.”
다엘에게 내가 답했다
“나중엔 ‘어머님, 잘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말할 날이 올 거야.”
내 말에 다엘은 짐짓 고개를 주억거렸다.
“네네, 잘 알겠습니다, 마마.”

 

상담센터 입구에 쓰인 글귀의 말미에서 허허당 스님이라는 이름을 본 적이 있다.
스님의 저서를 찾아보니 이런 대목이 나온다.

 

‘불이 나면 꺼질 일만 남고
상처가 나면 아물 일만 남는다
머물지 마라, 그 아픈 상처에’
(‘머물지 마라 그 아픈 상처에’ 중/ 허허당 지음.)

 

아픈 곳을 외면하고 대충 싸매놓으면 더 큰 상처가 된다.
그러나 오래 머물렀던 상처에서 벗어나는 순간이 오면 알게 되리라.
그 순간은,
충분히 아파하는 시간을 보냈던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귀한 선물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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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주
딸이 뇌종양으로 숨진 후 다시 비혼이 되었다. 이후 아들을 입양하여 달콤쌉싸름한 육아 중이다. 공교육 교사를 그만두고 지금은 시민단체 '사전의료의향서 실천모임'의 상담원이자 웰다잉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일산지역의 입양가족 모임에서 우리 사회의 입양편견을 없애기 위한 공부를 하고 있으며 초등 대안학교에 다니는 아들과 함께 대안교육 현장의 진한 경험을 쌓아가고 있다.
이메일 : juin9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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