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이비트리에 네 번째 글을 올립니다. 저는 두 아들의 아빠입니다. 8살 윤슬, 4살 은유. 각박한 서울에서 살다가 2014년부터 제주로 내려와서 살고 있습니다. 맞벌이 부부로써 육아의 애환, 우리 부부의 좌우명인 평등한 육아에 대해 글을 쓰고 싶습니다. 아이를 키우는 아빠로서 여러 엄마, 아빠들과도 육아에 대해서 소통하고 공유하면서 서로 비빌 언덕이 되면 좋겠습니다./ 박진현
우리 가족 사랑의 막대기
둘째 은유는 아빠 껌딱지입니다. 원래는 첫째 윤슬이가 아빠 껌딱지였습니다. 지금은 아닙니다. 다행입니다. 둘 다 한꺼번에 아빠 껌딱지가 아니라서. 아빠 껌딱지가 바뀐 사연은 이렇습니다. 나는 두 번의 육아휴직을 했습니다. 윤슬이 1년, 은유 6개월.
윤슬이는 돌도 되기 전에 내가 육아휴직을 내고 돌봤습니다. 보통 아기들은 ‘엄마’를 ‘아빠’보다 먼저 말합니다. 여자가 설거지 하는 것은 하늘이 정해준 일이라고 어느 대선 후보가 주장하는 것처럼, 나 역시 아기들이 ‘엄마’를 먼저 말하는 게 하늘이 정해준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같은 동네에 사는 한 아이 엄마도 저한테 아빠가 아이를 키우더래도 ‘엄마’를 먼저 말할 거라고 예언했습니다. ‘아빠’보다는 ‘엄마’를 발음하기가 쉽기도 하고요. 윤슬이는 쉬운 길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자랑스럽게도 ‘아빠’를 먼저 말했습니다. 키우는 내 입장에서는 기쁜 일이었죠.
윤슬이가 돌이 좀 지나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아내가 퇴근하고 나서 우리 가족은 근처 공원으로 산책을 갔습니다. 윤슬이를 가운데 두고 아빠, 엄마가 팔을 벌리고 같이 불렀던 적이 있습니다. 윤슬이는 저한테 뛰어 와서 와락 안겼습니다. 아내는 삐졌습니다. 당시 윤슬이는 울 때도 “엄마” 대신 “아빠”하면서 흐느꼈습니다.
윤슬이는 엄마가 자기를 돌 볼 때도 ‘아빠’, ‘아빠’라고 말했습니다. 아내는 정말 섭섭해했습니다. 아내는 고민이 많아졌습니다. 엄마로서 자기 존재에 대해. 그래서 아내는 윤슬이가 4살 때 6개월 육아휴직을 냈습니다. 윤슬이와 친해지기 위해서, 아내는 두 번째 육아휴직을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많이 나아지긴 했지만, 윤슬이는 여전히 아빠 껌딱지였습니다.
아내가 두 번째 육아휴직을 낼 때 둘째 은유가 생겼습니다. 음.. 원래 저는 둘째는 절대로 안된다는 입장이었는데.. 아이 키우는게 너무 힘들어서... 아내의 두 번째 육아휴직은 아이를 위한 시간이 되기도 했지만, 부부를 위한 시간이 되기도 해서. 그렇게 됐습니다.
제주로 이주한 첫해 둘째 은유가 태어났습니다. 아내는 은유가 태어나고 나서 무척이나 좋아했습니다. 내 편이 생긴 것 같다고. 아내는 출산휴가 3개월, 육아휴직 1년을 올곧이 쓰고 복직했습니다. 첫째 윤슬이를 출산하고, 육아휴직을 할 때는 무척이나 힘들어했는데, 은유 때는 그 시간을 잘 견뎌내고, 잘 보냈습니다. 무척이나 고마운 일이었죠.
은유가 태어나고 많은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첫째 윤슬이가 질투를 하지 않냐고. 전혀 없었습니다. 윤슬이에게는 주양육자가 저였기 때문이었죠. 은유가 태어날 때 윤슬이는 다섯 살이었습니다. 윤슬이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엄마는 은유를 돌보지, 아빠는 나를 돌보고” 평등육아가 가져다 준 결과이자, 선물이었습니다.
내가 은유를 돌보기 위해 6개월 육아휴직을 할 때 변화가 생겼습니다. ‘엄마’만 찾던 은유가 아빠 껌딱지가 됐습니다. 아내 말에 의하면 내가 육아휴직을 하고 일주일도 안 되어서 그렇게 됐다고 합니다. 그 때부터 은유는 “아빠”를 외치면서 울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은 공원에서 노는데 은유가 “아빠”하면서 엉엉 울자, 주위에서 놀던 초등학생 아이들이 “쟤 이상해. 엄마라고 울지 않고, 아빠하면서 울어”라고 수군댔습니다.
그럼 윤슬이, 은유 둘 다 아빠 껌딱지가 됐냐고요. 만약 그렇게 됐다면 아마 저는 너무, 너무 힘들었을 겁니다.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윤슬이가 이때부터 엄마 껌딱지로 변했습니다. 내가 둘째 은유를 돌보기 시작하자, 윤슬이는 자연스럽게 엄마를 주로 의지하게 됐습니다.
이제 아내는 윤슬이가 있어서 너무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윤슬이도 “엄마, 아빠, 은유 사랑햬”하면서 꼭 “엄마를 가장 사랑해”라고 덧붙입니다. 은유는 집에서 엄마한테 혼나면 바로 나한테 “안아줘”하면서 달려오려고 합니다. 그러면 엄마는 그 것을 막고서는 뭘 잘못 했는지 얘기하면서 계속 혼냅니다. 그러면 은유는 “아빠 보고 싶어”하면서 입술을 실룩실룩거리면서 눈물을 흘립니다. 아빠가 바로 앞에 있는데도 말이죠. 은유를 혼내는 엄마나, 그것을 보는 아빠나 속으로 너무 귀여워서 웃음이 나옵니다.
이렇게 우리 가족은 사랑의 막대기는 공평하게 정해졌습니다. 설거지는 여자가 하는 일이라고 말하는 남자는 절대 누리지 못할 행복을 저는 아이를 키우면서 느끼고 있습니다.
* 얼마 전 아이 엄마랑 아이들이 집 근처 유채꽃밭에 놀러갔습니다. 아이들이 무척이나 신나했습니다. 제주로 이주한 첫 해, 우리 부부는 주위에 어디에 가면 유채꽃을 볼 수 있냐고 물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제주사람 대답. "길거리에서 볼 수 있는 것 아니에요". 봄이 되면 주위 어디든 유채꽃이 핀 걸 볼 수 있는데, 꼭 어디에 가야하냐는 뜻이었죠. 나는 얼마전 TV 뉴스에서 유채꽃 축제를 한다는 걸 봤고, 윤슬이에게 "우리 유채꽃 보러 저기 갈까"라고 물었습니다. 윤슬이 대답. "유채꽃은 길거리에서 볼 수 있는 것 아냐?". 윤슬이 제주 사람 다 됐네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