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 큰아이가 태어난 6월은

수국이 아름답게 피는 계절이다.

아이가 어릴 때부터 이 생일날마다

풍성하게 피어난 수국 꽃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왔다.

그렇게 1년에 한번, 6월마다 찍어온 사진들이

올해로 꼭 14번째가 된다.

생일이 주말과 겹친 해에는 가족이 함께

나들이를 가서 사진을 찍거나,

평일이 생일이었던 해에는 학교를 마친 뒤,

동네 주변의 수국 꽃이 있는 곳에서 사진을 찍었다.


올해는 어느 곳의 수국꽃을 배경으로 생일사진을 찍을까,

6월 초가 되자마자 여기저기서 앞다투어 피기 시작하는

수국 꽃들을 눈여겨 지켜보았다.

세상살이는 참 어지러운데

때를 넘기지 않고 성실하게 자기 할 일을 다 해내는

꽃들이 새삼 고맙고 신기하기만 하다.

아이가 태어난 13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아름답게 피어나 세상을 환하게 밝혀주고 있으니..


수국의 아름다움이 절정에 이르는 6월 중순인 이번주,

집에서 가까운 곳에 볼 일이 있어

자전거를 타고 외출했을 때 있었던 일이다.

좁은 주택가 골목을 자전거에서 내려 걷던 중에

낮은 담 너머로 흐드러지게 핀 수국 꽃들을 발견했다.


파란색, 보라색, 분홍색, 자주색 등

진하고 다양한 색의 수국꽃들이

손바닥만한 작은 주택 마당에

수십 송이, 아니 다 합하면 백 송이는 넘을 만큼

풍성하게 피어 있었다.


'어머, 이런 건 찍어야 해.'


작은 공간에서 이렇게 다양한 색깔의 수국을 피우기 위해

집 주인의 적지 않은 정성과 손길이 갔을 거라 감탄하며

꽃 사진을 찍고 싶다고 느낄 즈음,

고개를 숙인 채 마당을 다듬고 계시던 그댁 할아버지를 발견했다.

'어떡하지?

 꽃 사진 찍고싶다고 물어봐도 될까?

 할머니면 더 얘기하기가 쉬울 거 같은데..

 괜히 무섭거나 꼰대같은 할아버지면 어떻하지?

 그냥 갈까..?'


그렇게 망설이다, 꽃 한번 쳐다보다, 하던 중에

할아버지께서 몸을 일으켜 내 쪽을 보시는 게 아닌가.

멈칫.

그냥 가야겠다 마음먹고 자전거를 끄는데

할아버지가 갑자기 말을 걸어오셨다.


"꽃 좋아해요?"

"네?.. 아..네.. 저희집 아이가 6월생이라서요..

 해마다 수국 꽃이 예쁜 곳에서 사진을 찍었는데..

 여기 수국이 너무 이뻐서요... 횡설수설 ..."


두서없는 내 이야기를 무표정으로 듣고 계시다

"잠깐 기다려요" 하시며

할아버지는 집 현관으로 들어가 버리셨다;;

잠시 후, 현관으로 다시 나오신 할아버지 손에는

가위가 들려 있었다.

마당에 핀 수국 꽃들 중에 색깔 별로 골고루

가위로 싹둑싹둑 자르시더니

한다발을 만들어 내 손에 들려주시는 게 아닌가.


아.. 이런..

"아니예요. 할아버지.. 수국이 너무 이뻐서

그냥 사진 한 장 찍고 싶었을 뿐인데..

정성들여 키우셨을텐데 안 주셔도 되는데..."


너무 예기치 못한 일이라 또 횡설수설하는 내게

할아버지는 아이에게 보여주라며 가져가라고 하셨다.

그러고는 내가 더 이상 거절도 못하게

문을 닫고 집안으로 들어가셨다.


당황스럽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고

죄송하기도 하고

그런 얼떨떨한 기분으로

자전거 바구니 가득하게 수국 꽃다발을 싣고 달렸다.


크기변환_DSCN6706.JPG

이날 받아온 수국 꽃은
우리집 거실을 화사하게 밝혀주고
아이의 소박한 생일상을 차려 꽃과 함께 사진도 이쁘게 찍었다.

아이가 중학교에 입학하고
생일날에도 학교생활이 바빠
수국을 찾아다니며 한가하게 사진찍는 일도
이젠 점점 줄어들겠구나 싶어 아쉽던 차에,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수국 에피소드가 하나 더 더해졌다.

아이의 생일날,
생전 처음 만난 타인에게 받은 꽃 선물.
점점 힘들어지는 세상살이에
소박한 기쁨과 따뜻함이 살아있는 이런 경험들이 좀 더 많아진다면
사람들이 서로에게 좀 더 믿음을 갖고 다가설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년 6월, 아이의 생일이 다시 다가올때면
할아버지가 사시는 그곳 주택가 골목을 또 찾아가 보리라
마음먹어 본다.
그땐 작은 선물을 하나 들고 가야지.

"할아버지, 그때까지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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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희
배낭여행 중에 일본인인 지금의 남편을 만나 국제결혼, 지금은 남편과 두 아이와 함께 도쿄 근교의 작은 주택에서 살고 있다. 서둘러 완성하는 삶보다 천천히, 제대로 즐기며 배우는 아날로그적인 삶과 육아를 좋아한다. 아이들이 무료로 밥을 먹는 일본의 ‘어린이식당’ 활동가로 일하며 저서로는 <아날로그로 꽃피운 슬로육아><마을육아>(공저) 가 있다.
이메일 : lindgren707@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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