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못 참는 아이, 욱하는 부모>라는 책이 여기저기서 한창 회자되던 때, 나는 그 책의 제목과 관련 서평들을 보며 한 가지 의문을 품었다. 부모가 욱하는 게 문제라고 생각된다면, 대안은 욱하지 않기가 아니라 욱하지 말고 솔직하고 차분하게 화를 내기여야 하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었다. 아이의 감정 못지 않게 부모의 감정도 중요한데, 욱하지 말라고만 하면 부모의 감정은 어쩌라는 걸까. 그냥 참기만 하라는 걸까? 우리가 흔히 욱한다고 표현하는, 갑작스럽고 격한 감정 분출은 사실 그렇게 억지로 눌러 참아서 생기는 것 아닌가

 

얼마 전 다른 엄마들의 이야기를 듣던 중 다시 이 의문이 내 머릿속에 떠올랐다. 아이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아 화가 나는데 어쩔 도리가 없어서 꾹 참으려니 마음이 힘들다는 한 엄마와, 아이의 행동 교정을 위해 훈육을 하되 너무 과하게 화내지 않도록 무표정, 무감정으로 아이를 대한다는 다른 엄마, 그리고 아이에게 훈육을 할 때 아이를 비난하고 겁주며 소리치는 또 다른 엄마 사이에서 나는 다시 갸우뚱해졌다. 무조건 꾹 참지도, 무표정, 무감정으로 대하지도 않으면서 비난이나 협박 없이 아이와 양육자의 감정을 모두 헤아릴 수 있는 방법이 분명히 있다고 생각하는 나로서는 조금 당혹스럽기도 했다.

 

아이에게 워낙 어릴 적부터 시시콜콜 조목조목 이야기하는 습관을 들여와서인지, 우리 집에서는 훈육을 할 때도 아이에게 말로 조목조목 이야기하는 편이다. 물론 공이 들고, 시간이 걸리며, 때로는 아이에게도 우리에게도 심적으로 부담이 될 때가 있었지만, 그간의 노력이 쌓여온 덕인지 지금은 훈육 과정이 훨씬 수월해졌다. 부모도 감정이 있다는 걸, 감정이 쉽게 격해지는 때가 부모에게도 있다는 걸 아이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나는 피곤하고 졸릴 때 아이가 치근거리면 쉽게 짜증이 나는데, 그럴 때 엄마 지금 너무 피곤해. 그래서 지금 니가 자꾸 말을 걸면 엄마는 금방 짜증이 나. 엄마 좀 쉬자하고 이야기하면 아이는 순순히 그럼 엄마 좀 누워서 쉬어한다. 침실에서 베개와 이불을 끌어다 가져다 주기까지 하면서. 어떤 일로 화가 날 때도 나는 아이에게 그대로 이야기한다. “엄마 지금 화났어. 말 안하고 싶어.” 그러면 아이는 저쪽으로 가서 눈치껏 조용히 놀다가 시간이 좀 흐른 뒤 내가 다가가면 엄마 기분이 풀린 줄 이해하고 다시 함께 논다. 매번 그러는 건 아니지만 엄마 지금 화났어.” 하고 말하면 곧장 엄마 미안해..” 할 때도 있다. 둘이 각자의 시간을 조금 가진 뒤 조금 전 있었던 일에 대해 다시 이야기 하면 아이도 나도 평온한 상태에서 그 일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어서 좋다.

 

얼마 전 수면교육을 할 때도 그랬다. 잠이 완전히 들 때까지 엄마나 아빠가 함께 있어주기를 바라는 아이 때문에 밤에 쓸 수 있는 개인 시간이 좀처럼 늘지 않아서 힘들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 아이 재우기 당번이었던 남편은 아이와 몇 차례 실랑이 끝에 화를 내며 아이를 침실에서 데리고 나와 소파에 앉혔다. “아들. 니가 잠자는 시간에 엄마나 아빠가 항상 같이 잘 수는 없어. 엄마 아빠는 어른이잖아. 어른이 잠자는 시간이랑 어린이가 잠자는 시간은 달라. 매일 밤마다 엄마 아빠한테 옆에 있으라고 하면 엄마 아빠 힘들고 짜증나아이는 잠잘 무렵 시작된 갑작스러운 훈육에 훌쩍훌쩍 울었고, 남편은 아이의 울음에도 단호하게 대처하며 이렇게 말했다. “다 울고 진정하고 나면 혼자 들어가서 자는 거야.” 그날부터 아이는 밤에 마지막 책읽기와 자장가 타임이 끝나고 나면 혼자 침실에 남아 잠이 든다. 그래서 그날부터 우리는 아이를 침실에 두고 방 문을 열어둔 채로 거실에 나와 각자 할 일을 하는 평화로운 어른의 시간을 갖게 되었다는 해피엔딩 스토리!

 

소위 감정코칭육아법은 아이의 감정을 잘 읽어주고 아이가 충분히 그 감정을 느끼고 표출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고 강조하는데, 내 생각에 이 감정코칭은 어른인 양육자에게도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어른이라고 해서 언제나 모든 부문에서 고도의 성숙함을 발휘할 수 있는 건 아니다. 특히 아이와 하루 종일 부대껴야 하는 상황에 놓인 양육자라면 하루에도 여러 차례 화나고 짜증나는 일을 겪을 수밖에 없다. 그럴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화를 억지로 참는 것도, 그 감정을 없는 셈 치고 무표정으로 아이를 대하는 것도, 아이에게 소리치는 것도 아니고 그저 그 감정을 차분하게, 말로 표정으로 아이에게 정확히 드러내는 일이다. 그랬을 때 어른도 자신이 왜, 무엇 때문에 화가 났는지 정확히 알 수 있고 아이 역시 그 마음을 정확히 이해하게 되지 않을까.

 

며칠 전 보육교사 실습 중에도 나의 이 가설을 다시 한번 상기할 기회가 있었다. 교사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손에 쥐고 있던 인형을 마구 휘둘러대며 소리를 치던 한 아이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순간, 아이가 내 손을 세게 때렸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워낙 세게 맞은 터라 화도 나고 기분이 나빴다. 아이는 내 표정을 보고 당황하는 기색을 내비쳤지만 이내 입가에 웃음을 흘리며 이리저리 눈치를 살폈다. 나는 아이 눈높이로 키를 낮추어 아이를 보고 말했다. “개빈, 나 지금 너무 아파.” 그런데도 아이는 여전히 웃음 띤 얼굴로 자신의 요구사항만을 말했다. 나는 아이의 요구를 단호히 거절하고 이렇게 말했다. “나 지금 너무 화가 나서 니 얘기를 들어줄 수가 없어. 나 저기 가서 다른 친구들이랑 책 읽을 건데, 미안하다고 말할 준비가 되면 그쪽으로 와. 니가 나를 일부러 때린 건 아니지만, 실수였어도 상대방이 아파하고 기분 나빠하면 사과해야 하는 거잖아.” 그랬더니 아이는 잠시 후, 정말 나를 찾아와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다. 아프게 해서 미안하다고 했다. 나는 아이를 안아주었고, 사과해줘서 고맙다고, 이제 아프지 않다고, 괜찮다고 말해주었다.   

 artwork-1492799_960_720.jpg » 사진 픽사베이.

이렇게 아이가 어른의 감정 상태를 알 수 있게 해주면 아이는 점차 타인의 감정을 인지하고 갈등 상황을 극복할 힘을 길러나가게 되는 것 같다. 실제로 보육현장에서 실습을 하다 보면 교사들이 아이들의 감정, 또 교사 자신의 감정을 어떻게 다루는지에 따라 아이들의 태도가 달라진다는 걸 느낄 기회가 종종 있었다. 교사가 아이의 감정을 잘 읽지 못하고 본인의 감정에 대해서도 드러내놓고 이야기하지 않는 경우, 아이들은 갈등 상황에서 감정선이 쉽게 무너지고 평정을 회복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반면 교사가 아이의 감정을 잘 읽어주고 본인의 감정을 드러낼 때는 아이들이 갈등 상황에서 비교적 빨리 상황을 정리하고 마음을 수습했다. 자신의 감정에 충실해 본 아이일수록, 또 가까운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사람들의 감정을 직접 겪어본 아이일수록 타인의 존재를, 타인의 마음을 좀 더 가까이, 깊게 받아들이는 게 아닐까. 분노조절이 잘 되지 않는 건, 그만큼 충분히 분노 표출을 못 해봤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니 우리, 화를 내자. 억지로 참지도, 감정이 없는 척하지도 말자. 욱하지 말고, 정확하게, 그러나 차분하게, 화가 난다고, 짜증이 난다고 아이들에게 말해주자. 엄마 아빠도 화 나고 짜증날 때가 있다고, 누구나 그런거라고 말해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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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이슬
'활동가-작가'가 되는 것이 꿈이다. 막연했던 그 꿈에 한발 더 가까워진 것은 운명처럼 태어난 나의 아이 덕분이다. 아이와 함께 태어난 희소질환 클리펠-트리나니 증후군(Klippel-Trenaunay Syndrome)의 약자 KT(케이티)를 필명으로 삼아 <이상한 나라의 케이티> 라는 제목의 연재글을 썼다. 새로운 연재 <아이와 함께 차린 글 밥상>은 아이책, 어른책을 번갈아 읽으며 아이와 우리 가족을 둘러싼 세계를 들여다보는 작업이다. 내 아이 뿐 아니라 모든 아이들을 함께 잘 키워내는 사회를 만들어 가는 데 도움이 되는 글과 삶을 꾸려내고 싶다.
이메일 : alyseul@gmail.com      
블로그 : http://plug.hani.co.kr/alyson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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