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발을 수술한지 한 달이 다 되어가던 1월 중순, 수술 부위가 묘하게 벌어지기 시작했다. 분명 며칠 전만 해도 전체적으로 까맣게 딱지가 져 있었는데, 하루 이틀 사이에 갑자기 봉합 부위를 따라 피부가 깊이 패이듯 벌어지는 게 눈에 보였다. 수술 4주 후면 붕대를 풀고 생활할 수 있을거라던 기대와 달리 한 달 내내 매일같이 피가 배어 나오는 붕대를 갈아주느라 이미 신경이 한껏 곤두선 상태였다.

 

실을 풀러 병원에 가기로 한 날로부터는 아직 2주가 남은 상태. 그런데 이런 상태론 도저히 2주 후에 실을 풀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조금만, 며칠만 더 두고 보자, 했는데 하루가 다르게 상태가 더 나빠지는 것 같았다. 불안한 마음을 참지 못한 어느 날, 결국 우리는 아이를 재우기 전에 붕대를 풀어 사진을 몇 장 찍었다. 마침 이 근방 다른 주에서 간호사로 근무하는 지인이 있어 급한대로 사진을 보내주며 물어봤다. 사진을 본 지인은 조심스레 권했다. “염증 같진 않은데아무래도 의사한테 얼른 보여줘야겠어.”   

 

다음 날 아침, 병원에 전화해 의사에게 사진을 전달할 수 있을지 물었고, 의사는 이메일로 사진을 받은 직후 곧장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다른 증상 없이 상처 부위 모양이 이렇게 나타나는 건 드문 일입니다. 보통 이런 양상은 수술하고 1, 2주 안에 나타나는데..지금 수술한 지 한 달이 다 됐잖아요? 이게 왜 지금에서야 이렇게 나타나는지는 솔직히 나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다행히 염증은 아니니까 걱정은 하지 말고, 일단 2주 더 지켜봅시다. 그리고 2주 후에 실 뽑으러 오기로 한 날 상태를 봐서 다시 결정하지요.”

 

그렇게 2주를 보내고, 실을 뽑기는커녕 다시 꿰매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안고 의사를 만났다. 의사는 그래도 최악은 아니라고 운을 뗀 뒤 아이 발의 상처를 살폈다. 아주 좋은 상태는 아니지만, 또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라고 했다. 워낙 희소하고 다양한 층위의 혈관 질환이 얽혀 있는 상태라 자신의 예상과는 다른 속도,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을 뿐, 아이 몸은 상처 회복을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아마 수술을 하면서 위치를 새로 잡아 준 혈관에서 예상과 다른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그래도 이런 몸을 처음부터 갖고 태어난 아이답게, 아이 몸은 나름대로의 치유 체계를 갖고 있는 것 같으니 크게 걱정하지 말자는 말도 덧붙였다. 다만 그동안 써 왔던 소독법이 통하지 않는 것 같으니 상처 소독법을 바꿔 보자고 제안했다. 바꾼 방법으로 2, 3주 더 해보고 그래도 도저히 안 아무는 것 같다면 그땐 재봉합을 고려해볼 수도 있다고 했다.

 

의사는 진료실을 나가기 전, 내게 자신의 이메일 주소를 직접 알려주었다. 중간 중간 상황을 보기 위해 사진을 찍어 보내달라고 했다. 그에게도 우리 아이 같은 경우는 특이한 케이스이기 때문에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간호사를 불러들여 우리에게 1주일 치 약품을 무료로 제공해주고, 그 다음 몇 주간 쓸 약품을 한 상자에 담아 집으로 배송하도록 일러주었다.

 

그렇게 상처소독법을 바꾸고 며칠이 지나니 아이의 상처가 조금씩 아물기 시작했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의사에게 사진을 첨부해 이메일을 썼고, 그는 내가 이메일을 보낸지 두어 시간도 되지 않아 이렇게 답을 보내왔다

 

훨씬 낫네요! 지난주에 봤을 때 벌어져 있던 부위가 훨씬 많이 닫혔어요.

그 전에 상처 소독용으로 썼던 연고가 잘 안 맞았던 모양입니다.

소독 잘 해주고, 틈틈이 사진 또 보내주세요!”

 

별 것 아닐 수 있는 짧은 내용이지만, 내겐 의사와 이메일을 교환한다는 것 자체가 신선한 충격이었다. 진료 중에 본인의 직통 이메일 주소를 스스럼없이 알려주고, 우리에게 필요한 약품을 집으로 배송할 수 있도록 간호사에게 부탁하는 모습부터가 그랬다. 게다가 그는 우리를 자주 보는 주치의도 아니다. 여러 과가 함께 모여 아이를 보는 협진 시스템 덕분에 1년에 한두 번 보아온 게 전부다. 수술 논의를 하느라 작년엔 좀 더 자주 만났는데, 만날 때마다 그는 묘한 매력(!)을 자아내는 사람이었다. 특히 외과의사로서 자신의 전문분야에 대해 갖는 거침없는 자신감에 더해 솔직하고 배려 넘치는 면모들이 인상적이었다. 아이들 수술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인 만큼 외과 수술 자체에 대한 자신감도 대단했지만, 우리 아이처럼 희소한 질환을 지닌 경우엔 의사의 전문 지식만큼이나 아이를 늘 지켜봐 온 부모의 직관, 서포트 그룹을 통한 집단 경험도 중요하다는 걸 인정하는 사람이었다. 또 과거에 자신의 아버지를 수술실에 들여보내고 의심과 불안의 시간을 보낸 경험을 털어놓으며 언제든 궁금한 게 있거나 못미더운 게 있으면 얘기하라고 일러주기도 했다

 

아이의 성장 과정을 틈틈이 함께 보고 또 중요한 수술까지 맡아 준 의사가 보여주는 이런 솔직함과 배려심은 내게 굉장한 신뢰를 심어주었다. 특히 이번에는 바쁜 와중에도 개인 이메일 주소까지 알려줘가며 내가 보낸 사진을 확인하고 짧은 답장을 보내주는 모습, 나와 함께 기뻐하며 아이의 회복 과정을 살펴봐주는 모습에 고마운 마음까지 들었다. 매일 바쁘게 돌아가는 의료현장에서 사무적으로, 기계적으로 사람을 대하지 않고 우리 아이를 내 마음처럼 돌봐주는 의사가 있어서 참 고맙고, 참 다행이다. 다음주에 진료를 보러 가면, 한번 더 힘주어 고맙다고 말해야겠다. 마침 발렌타인데이 전날이니, 아이 편에 초콜렛 하나라도 건네보아야겠다. , 하지만 오해는 마시라, 이 의사, 안타깝게도(!) 아내가 있는 몸이다. (심지어 그는 병원에서는 비서가 정해주는 대로, 집에서는 아내가 정해주는 대로움직이며 사는 애처가다!) 

doctor-563428_960_720.jpg » 사진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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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이슬
'활동가-작가'가 되는 것이 꿈이다. 막연했던 그 꿈에 한발 더 가까워진 것은 운명처럼 태어난 나의 아이 덕분이다. 아이와 함께 태어난 희소질환 클리펠-트리나니 증후군(Klippel-Trenaunay Syndrome)의 약자 KT(케이티)를 필명으로 삼아 <이상한 나라의 케이티> 라는 제목의 연재글을 썼다. 새로운 연재 <아이와 함께 차린 글 밥상>은 아이책, 어른책을 번갈아 읽으며 아이와 우리 가족을 둘러싼 세계를 들여다보는 작업이다. 내 아이 뿐 아니라 모든 아이들을 함께 잘 키워내는 사회를 만들어 가는 데 도움이 되는 글과 삶을 꾸려내고 싶다.
이메일 : alyseul@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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