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일은 언니가 전화기 가져간다!"
"안돼, 내가 가져갈꺼야"
"니가 오늘 가져갔잖아. 그러니까 내일은 내 차례지"
"언니가 오늘 가져가도 된다고 했잖아. 그래서 가져간거지, 원래는 내일 가져가고 싶었다고"
"그러니까 오늘 가져갔잖아. 내일은 내가 가져가면 맞는거잖아"
"아니야. 나는 내일 가져가고 싶다고.. 내일이 원래 내 차례라고!"
"무슨 소리하는거야. 월요일에 누가 가져갔어, 언니가 가져갔지? 오늘은 니가 가져갔지.
그러니까 내일은 나라고"
"싫다고, 내가 가져갈꺼라고.. 원래 수요일은 내 차례였잖아. 언니가 화요일에 가져가라고
해서 들어준 것 뿐이지, 나는 내 차례에 가져갈꺼라고, 왜 언니 마음대로만 하는데!!!"
"니가 그렇게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니까 너랑 말하기 싫은거야"
"언니가 말도 안되는 소리 하는거잖아"
"그럼 니가 언니를 설득시켜 보든지, 근거를 대라고, 근거를.."
"근거가 뭔데?"
"증거.. 니가 수요일에 전화기를 가져가라고 내가 말했다는 증거 말야"
"언니 말이 증거지. 내가 들은 언니 말"
"나는 그런 말 한적이 없다고"
"했다고.. 나는 분명 들었다고"
"내가 한 기억이 없는데 그게 무슨 증거야!"
"내 기억이 분명하니까 증거지. 전화기 가져갈꺼야"
"안돼. 내가 가져갈꺼야!!"
머리가 지끈거린다.
남편이 출장 중인 집은 하루종일 내린 폭우로 무덥고 습한데 라면으로 저녁을 때우고 영화까지
잘 보고 나서 전화기 쓰는 것 때문에 두 딸들의 말싸움이 시작되었다.
딸들이 번갈아 쓰는 전화기는 돌아가신 시아버님이 쓰시던 낡은 폴더폰이다.
돌아가시자마자 해지하는 것을 남편이 쓸쓸해 해서 그냥 저냥 한달에 만 얼마씩
요금을 물어가며 두었는데, 핸드폰이 없는 세 아이들이 급할 때 돌려가며 쓰곤 했다.
올 3월에 아들에게 스마트폰이 생긴 이후에는 두 딸들이 방과후 프로그램이 있거나 다른 일정이
있을 때 하루씩 돌아가며 사용한다. 그런데 가끔 이 순서를 가지고 시비가 붙는다.
시비가 붙으면 둘 다 한치도 물러서지 않는다.
"이룸아, 하루씩 번갈아 쓰는거면 내일은 언니 순서가 맞는거 아냐?"
"아니라구요. 월요일에 언니가 분명히 수요일은 내가 써도 된다고 했다구요"
"난 그런 말 한적 없어!"
"거짓말하지마, 내가 들었다고"
"너나 거짓말 하지마!"
아아아.
시간은 밤 열시.. 만화영화 보느라 늦었으면 빨리 씻고 잘 준비 해야 하는데, 이 시간이면 나도 하루의
피곤이 한꺼번에 몰려오는데다 집안일이며 두 아이들에서 놓여나 내가 좋아하는 책에 좀 빠져보는
시간인데, 이 시간마저 징글징글한 싸움에 시달려야 하다니...
"전화기가 없었으면 좋겠다, 정말..."
"저는요, 제 전화기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각자 한 대씩 있으면 이런 일 없잖아요"
또 시작이다. 필규랑도 이랬지. 열 여섯 봄에 스마트폰이 생기기 전까지 수도 없는 이런 원망을
들었지. 이제 딸들이 한꺼번에 조르고 원망하는구나...
"엄마는 너희들이 무슨 얘기를 어떻게 했는지 몰라. 다만 하루씩 돌아가며 쓰고 있으니까
월요일에 윤정, 화요일에 이룸이가 썼으니까 수요일엔 다시 윤정이가 쓰는게 맞는 것 같애.
이룸이가 목요일에 가져가면 되잖아."
"엄마는 왜 내 말을 안 믿어요? 내 기억력도 안 믿구요?"
"엄마는 니가 무슨 말 했는지 몰라. 언니가 한 말도 모르고.. 듣지 못했으니까 그런 말로는
판단 못 해. 그냥 순서만 보는거야. 순서를 보면 언니 차례인게 분명하니까.."
"엄마는 언니 말만 믿어요?"
"그게 아니라, 언니 말은 앞 뒤가 다 맞잖아. 이상할 것도 없이 다 당연하고.. 너는 네가 한 말하고
기억을 믿으라는데 그 두가지는 보이지 않으니까 잘 모르겠어. 그냥 순서대로 하면 되잖아"
"저는 억울해요. 억울하다구요"
이룸이는펑펑 울며 제 방으로 들어갔다.
그래.. 언제나 엄마는 너를 억울하게 하는 사람이구나. 그저 조용한 밤 시간을 보내고 싶을 뿐 인데
지긋지긋한 시비를 끝내게 하고 싶은데 그냥 좀 쉬고 싶은데 그게 참 어렵구나..
눈물에 얼룩진 눈으로 나타난 이룸이는 앙다문 입술을 하고 나를 노려보더니 편지 한장을 놓고 간다.
- 미운 엄마
엄마는 언니 편만 들어요.
맨날 언니 말이 맞다고
정확하다고 해요. 나이는 언니
가 더 많고 그래서 더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는 건
언니니까 그럴 수 밖에
없으니까요. 그래서 난 엄마가
미워요. 엄마가 이 글을 보면
용서해 줄까요?
- 이룸 -
하아.. 이 아이는 정말..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는 순간도 글은 참 잘 쓰는구나.
피시시... 웃음과 함께 나를 꽉 채우던 짜증과 피곤이 빠져 나간다.
내가 웃고 있으니까 이룸이가 골난 표정으로 다가와 팔을 벌린다.
"이 편지 읽으니까 어때요?"
나는 부쩍 커진 막내딸을 꼭 끌어 안았다.
"너는 화가 나도 어쩌면 이렇게 글을 잘 쓰니. 글씨도 이쁘고...
정말 감탄하고 있는 중이야"
"칫. 내 마음이라고요"
"그래.. 니 마음이지. 너는 엄마가 언니 편 든다고 하고
언니는 맨날 엄마가 니 편 든다고 하고..
엄마는 어떻게 해도 너희 둘 다 한테 원망만 들어. 그래서 힘들어"
"안아 주세요"
"그래.. 안아주자. 너도 엄마 안아줘..
그래도 어떤 사람에게 밉다는 말을 쓰고 싶을 때는 백 번, 천 번쯤 생각해서 말 해.
그 사람의 어떤 행동이 밉다는 건 괜찮은데 그 사람이 밉다고 하면 그건 정말
정말 심하고 아픈 말이거든. 홧김에 한 건지. 정말 미운게 진심인지 듣는 사람은
잘 모를 수 있어. 그럼 크게 상처받지"
"홧김에 한 말이예요. 진심 아니구요"
"알지. 그래도 아픈건 아파. 엄마는 니가 안 밉거든. 아무리 밉게 해도 안 미워.
너는 그냥 이쁘니까... 힘들게 하고 화 나게 해도 힘 들게 해도 이쁜 내 딸 이니까.."
"엄마, 안 미워요. 미안해요"
"알아. 엄마도 미안해"
전화기는 윤정이 가방으로 들어갔고 두 딸들은 마침내 잠이 들었다.
딸들에게 자주 밉고, 나이 들어가는 엄마인 나는 막내가 쓴 편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이 아이들은.. 참 이쁘구나.
아이라서 싸우고, 아이라서 몰라주고, 아이라서 우기고 고집을 부려보는건데 그런 것을
다 너그럽게 받아주기에는 내가 늘 지쳐있고 고단한 엄마인 모양이다. 기운 좋은 젊은 엄마라면
씩씩하게 받아줄텐데 그게 나는 힘들다.
미운 엄마
미운 엄마..
영특한 아이가 홧김에 쓴 말인데
그런데 왜 이렇게 마음에 돌처럼 박히는 걸까.
아..
나이들어가나보다.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조금씩 아파진다.
우습고, 기특하고, 귀여운 헤프닝인데
마음이 마음이
이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