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15일 토요일은 스승의 날. 대학원 공부를 병행 중인 성윤 엄마는 이날 은사님을 뵈러 학교에 갔다.

남겨진 건 아빠와 아들. 두 부자는 토요일 오후를 무사히 보내야 했다.



교수님 선물을 사려고 세 식구가 쇼핑몰에 나갔는데, 돌아오는 차 안에서 녀석은 곯아떨어졌다. 오후 1시.

점심을 먹고 엄마가 나가는데도 녀석은 일어나지 않았다. 다행이다. 이틈을 타 오랜만에 꿀 같은 낮잠을 잤다.

녀석은 무려 4시간이 지난 오후 5시에야 일어났다. 흐흐 기특한 것.

책 읽어주고 공놀이 하고 이런저런 놀이를 하니 금세 7시다. 이제 저녁먹일 시간이다.



짧은 육아경험에 비춰보면, 육아의 절반은 밥 먹이기다.

아이 식욕이 왕성하면 문제없지만, 성윤이는 그렇지가 않았다.

성동격서(聲東擊西)라 했던가. 무언가에 정신을 팔게 하고 그 틈을 타 숟가락을 입에 갖다 대면

‘유두혼돈’처럼 녀석은 입을 벌렸다.

그 ‘무언가’는 물론 TV다. 아침에는 뽀로로와 뿡뿡이 등 <EBS>의 온갖 캐릭터들이 녀석의 마음을 빼앗았다.

바보상자라고는 하지만, 밥을 먹이려면 어쩔 수가 없다. 필요악이다.



토요일 저녁 7시는 <KBS>의 ‘천하무적 야구단’ 방송 시간이다.

‘천하무적 야구단’이 무엇인가. 대한민국에 사회인 야구 붐을 일으킨 그 문제적 프로그램이 아니었던가.

대한민국 남성의 로망 ‘천하무적 야구단’을 보며 아들과의 저녁을 먹기로 했다.

TV를 켜니 경기가 한창이었다. 밥을 먹이며 성윤이에게

“음, 저건 안타야. 저렇게 되면 홈으로 들어와 점수를 올리게 되지”

라며 야구 규칙도 설명해주었다. 녀석은 TV를 보며 밥도 잘 받아먹었다.

밥을 다 먹고서는 제 혼자 조용히 잘 놀았다. 모든 게 순조로웠다.

‘천하무적 야구단’의 오지호는 느린 공으로 삼진을 잘도 잡아냈고, 조빈은 3루타를 2개나 쳤다.

그렇게 30분정도가 흘렀을까... 녀석은 슬슬 내 손을 잡아끌며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응, 아빠 이것만 보고 놀아줄게.” 애써 외면하고 TV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러자 녀석이 갑자기 리모컨을 들더니 TV를 확 꺼버렸다.

아, 어떻게 이런 일이... 어릴 적 TV 채널선택권은 아버지에게 있었다.

집안 유일의 오락기기는 당연히 집안 어른의 통제를 받아야 했다.

TV속에 감춰진 가부장제의 정치적 함의였다.

그런데 2010년 5월15일, 개봉동 성윤이네 집에서는 가부장의 권위가

세 살배기 유아가 휘두른 리모컨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녀석은 엄청난 일을 저질러놓고 나를 보고 씽긋 웃었다. 나도 껄껄껄 웃을 수밖에 없었다.



다시 TV를 켜고 이번엔 민주적으로 설득에 들어갔다.

“성윤아, 아빠는 성윤이 뽀로로 볼 때 같이 봐주잖아. 그러니까 이번에는 성윤이가 아빠랑 같이 보자.”

이 말을 듣고 다소곳이 TV앞에 앉아버렸다면 나는 ‘녀석이 혹시 영재가 아닐까’ 의심했을 것이다.

호혜평등을 주장하는 나의 설득은 물론 녀석에게 통하지 않았다.

‘천하무적 야구단’의 마지막 공격을 남겨놓은 상황에서 점수는 10대10. 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녀석은 급기야 울음을 터뜨렸다. 나는 재빨리 녀석을 무동 태우고 덩실덩실 춤을 추며 기분을 풀어주었다.

그렇게 녀석의 짜증을 진압했다. TV속에서는 탁재훈의 끝내기 안타가 터졌다. ‘천하무적 야구단’의 극적인 승리였다.



나는 약속한대로 TV를 곧장 끄고 녀석과 재밌게 놀아주었다. 그리고 하품하는 녀석과 침대에 누웠다.

밤 10시께 녀석은 꿈나라로 갔지만, 낮잠을 자둔 덕에 나는 두 눈 부릅뜨고 침대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오랜만에 얻은 금쪽같은 혼자만의 시간에 책도 보았다. 정말 보람찬 휴일이었다.








359d5c0f4d7a180737f35ac6972424eb. » 2010년 5월16일, 이날도 성윤이는 뿡뿡이를 보며 아침식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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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규 기자
서른두살 차이 나는 아들과 마지못해 놀아‘주다가’ 이제는 함께 잘 놀고 있는 한겨레 미디어 전략 담당 기자. 부드럽지만 단호하고 친구 같지만 권위 있는 아빠가 되는 게 꿈이다. 3년 간의 외출을 끝내고 다시 베이비트리로 돌아왔다.
이메일 : dokbu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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