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성경에 이런 구절이 있다.
요즘 와 닿는 말이다.

 

처음 자전거 타기에 입문했을 때
나 같은 사람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타고난 운동 둔감증으로
어린 시절 여아들이 흔히 하는 고무줄 놀이 한 번 못해봤고
운동회 날이면 느린 달리기에 도전하는 내 모습에
어머니가 화병이 났으며
중 고교 시절 무용시간에는 나의 뇌 회로에
춤을 관장하는 부위의 뉴런이 전무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스포츠활동 무능에 관한 최적의 조건과
적지 않은 나이라는 희소성을 지닌 채
자전거 강습이 있는 호수공원으로 향했다.
‘사랑의 자전거’라는 사회적 기업에서 파견된 강사가
무료 강습을 해 주는 프로그램이었다.

자전거1.jpg » 강습 첫날. 페달에서 발 떼고 내려오는 연습 중.

열심히 연습하여 자전거 페달을 겨우 구르게 된 후에도
출발 시 비틀대는 정도는 거의 만취자 수준이었다.
인터넷에서 자전거 출발 잘하는 법을 검색하니
이런 답변이 있었다.
"자전거를 타고 속으로 ‘매끈!’이라고 외치면 출발이 잘 돼요."

 

오, 이 분야에도 주술적 방법이 통하는 건가.
자전거를 출발하면서 속으로 외쳤다.
‘매끈! 매끈!’
그러나 여전히 발목 잡는 귀신이 내게 붙은 듯했다.

 

사나흘 지나서 겨우 한 숨 돌리는데
이번엔 자전거 통행용 육교를 향해
기어 변속을 하고 올라가 보란다.
주춤거리며 피하다 보니 앞 사람이 올라가고
엉겁결에 내 차례다.

미친 듯이 페달을 밟기 시작했다.
강사께서 잘한다고 고래고래 소리 치며 살짝 밀어주자
제 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중간까지 도달했다.

 

그때의 내 사진을 보니 웃음을 띠고 있다.
버거운 일에 도전하는 순간 급격히 지능이 떨어지고
상황에 맞지 않는, 영혼 없는 웃음을 흘리는 거였다.

 

자전거2.jpg » 경사로를 향해 페달을 밟기 시작하는 나.

 

좌충우돌 강습이 후반기로 접어들어
공원 내 자전거도로 라이딩이 있는 날.
자전거도로를 따라 페달링을 하면서 나무와 풀잎냄새,
단풍이 들기 시작하는 가을의 바람을 온몸으로 느꼈다.

 

자전거와 내 몸이 합체가 되더니
어느 순간 내 몸도 사라지고
스쳐가는 바람과 풍경만 펼쳐진다.
이거였구나!
예전에 길에서 아무 의미 없이 지나다니던 자전거가
그 순간 내 삶 속으로 깊이 들어왔다.
 
환희를 느끼며 공원길을 달린 다음날,
강사께서 갑자기 공원 문 밖으로 향한다.
설마…? 도로 주행을 하려고?
구구단 겨우 외웠는데 미적분을 풀라는 거?

 

정신을 수습하고 보니
맨 앞에 강사가 서고 모두 일렬로 뒤따른다.
옆에 차가 지나간다 싶으면 일순 나만 휘청댄다.
‘못났다, 못났어!’
혼자 중얼대며 겨우 주행을 마치자
어찌나 긴장했던지 뱃속까지 와글거린다.

 

총 2주간의 강습 동안
열심히, 정말 열심히 참여했다.
나의 강습 얘길 들은 지인은 혀를 끌끌 찼다.
“자전거를 강습 받고 탄다는 것도 놀라운데
거기서도 못하는 축에 들었다니 참으로 희귀 사례다.”

 

자전거를 배우면서 발견한 놀라운 사실은
자전거 타기가 인생 철학과 닮았다는 거였다.

 

‘힘을 빼라.
시선을 멀리 둬라.
스승의 등을 보고 가라.’

 

자전거강사.jpg » ‘사랑의 자전거’ 소속 이광우 강사. 우직하고 열정적인 그의 가르침에 감사 드린다.

 

자전거에서 안 넘어지려고 힘을 주면 균형을 잡을 수 없다.
이는 내려놓지 않으면 깨달음이 없다는 불교 철학과도 맞닿아 있다.
자전거가 넘어지려 할 때 반대방향 아닌
넘어지는 방향으로 몸을 살짝 기울이라는 것도 참으로 심오하다.

 

그러고 보니 자전거의 역설은 육아의 역설과도 닮았다.
다엘의 어린 시절, 절대음감이 있다는 전문가의 말씀에
다엘의 할머니가 감격하여 바로 피아노를 사주셨다.
그러나 레슨을 시작한 지 1년 만에 어렵다고 거부하여 중단.
한참 지나 본인이 원하여 레슨을 다시 시작했으나
집에선 단 한 번도 피아노를 치지 않았다.
나는 마음으로부터 기대를 내려놓았다.
‘음악 영재인줄 알았는데 아닌가벼...’

 

그러던 어느 날 야심한 시각,
다엘이 갑자기 아름다운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흥분한 할머니가 감탄사를 연발하자
다엘의 얼굴에 급속히 그늘이 드리워지며 내게 나직하게 말했다.
그간 할머니랑 엄마가 너무 관심을 가져서 부담이 됐다고.
가족들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면 건반이 닳도록 피아노를 쳤을 거라고.

 

머리가 띵했다.
아이가 피아노를 즐기길 원하는가?
그러면 잘 치길 바라는 마음을 내려 놓아라.

 

모처럼 배운 인생철학을 갈고 닦기 위해서라도
당장 자전거를 사서 열과 성을 다해 타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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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주
딸이 뇌종양으로 숨진 후 다시 비혼이 되었다. 이후 아들을 입양하여 달콤쌉싸름한 육아 중이다. 공교육 교사를 그만두고 지금은 시민단체 '사전의료의향서 실천모임'의 상담원이자 웰다잉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일산지역의 입양가족 모임에서 우리 사회의 입양편견을 없애기 위한 공부를 하고 있으며 초등 대안학교에 다니는 아들과 함께 대안교육 현장의 진한 경험을 쌓아가고 있다.
이메일 : juin9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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