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아이11.jpg

                                                      (제주도 월정리 바닷가)

 

결혼 10주년 기념 여행, 처음으로 떠나는 우리만의 가족여행... 그것도 비행기타고 가는 제주도라...
꿈이 너무 컸던 것일까.

떠나기 전날 새벽 1시까지 짐싸고 집을 치우느라 고단했고, 당일엔 새벽 5시부터 아이들을 깨워
김포공항으로 향하는 강행군이었지만 그래도 설레고 좋았었다. 고단한 줄 모르고 비행기를 보며
좋아하는 아이들과 비행기안에서도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며 '그래, 힘들어도 이 맛에 여행을 하지'
싶었다.


오전 9시 넘어 제주도에 도착해서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느꼈던 첫 기분은...
바람이 무지하게 불고 추웠다. 따뜻한 남쪽나라 온다고 짧은 여름옷만 잔뜩 싸 왔는데 당장
가디건을 걸쳐야 할 정도로 추웠던 것이다. 이런 이런..


근처 식당에서 겁나게 비싼 돈을 주고 아침을 먹은 후 용두암부터 둘러보고 아이들이 그렇게
가고 싶어했던 김녕 미로공원을 구경했다. 공원에서 한참놀다 점심을 먹고 만장굴을 보았다.
1킬로나 되는 굴을 반은 이룸이 손을 잡고 절반은 업고서 왕복을 했더니 어찌나 힘이 들던지..

만장굴을 나와 월정리 바닷가를 갔는데 바다가 너무 이쁜 것이다.
오후가 되면서 바람은 더욱 차가와졌는데 세 아이들은 거침없이 바다로 뛰어 들었다.
너무 너무 좋아하면서 달리고 웃고 첨벙거리며 놀았다. 이룸이 다리가 추워서 빨갛게 되는 것이
맘에 걸려 그만 나가자고 해도 아이들은 나올 생각을 안 했다.


결국 그날밤 부터 이룸이가 아프기 시작했다. 배가 아프다며 보채기 시작했다.
둘쨋날 아침관광을 위해 차를 탔는데 이룸이가 차 안에서 엄청나게 토하기 시작했다. 결국 차를 돌려
숙소로 돌아갔고 나는 이룸이와 숙소에 남고 남편이 두 아이들을 데리고 나갔다.
그 후로 꼬박 떠나는 날 아침까지 나는 아픈 이룸이와 숙소에서만 보냈다.
물만 먹어도 토하고 배가 아프다며 바늘에 찔린 것처럼 울어대고 설사를 하는 아이를 안고
근처 병원을 찾았더니 역시 장염이란다. 탈수 될 수 있다며 이온음료를 처방해 주었지만 여전히
젖을 먹고 있었으므로 탈수는 오지 않았다.
세 아이 모두 늦도록 젖을 먹이는 동안 여러번의 장염을  약 없이 이겨냈던 것은 탈수를 겪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이룸이가 젖을 먹지 않았더라면 나는 꼼짝없이 제주도의 병원에서 수액을
맞고 있어야 했을 것이다.

 

서귀포의 아름다운 바다를 숙소 창으로만 보며 내내 아픈 아이와 지내는 것이 속상하고 힘들어서
저녁에 들어오는 남편과 부부싸움도 여러번 했다. 애초에 밥을 해 먹을 준비를 안 해갔으니
혼자 숙소에 남은 나는 먹을 것이 없었던 것이다. 급하게 쌀만 사서 밥을 하고 김이나 인스턴트
즉석식품으로 점심을 해결하려니 정말 속상했다.
나는 나대로 힘 들고, 남편은 혼자 아이들 데리고 돌아다니느라 힘든데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리는데
여전히 서툰 우리 부부는 10년만의 가족여행에서 티격태격 다툼이 많았다.

 

꼬박 이틀을 앓은 이룸이는 다행히 돌아오는 날엔 컨디션이 조금 회복되었다.
그래서 소정방폭포를 끼고 있는 올레길 6코스를 돌아볼 수 있었다.
3일만에 다시 나와서 보는 제주도의 풍경은 어디나 빛나고 아름다왔다. 곧 떠나는게 아쉬워서
조금이라도 더 보고 싶었지만 이룸이가 힘들어해서 참아야 했다.
이중섭 거리에서 점심을 먹고, 김녕 해수욕장의 아름다운 바닷가에서 잠시 놀다가 '한림공원'을
둘러보는 것으로 제주도의 일정을 마감하고 밤 여덟시 오십분 비행기를 타고 돌아왔다.


돌아오는 비행기안에서 이룸이는 가만히 앉아 있는 것도 힘들어 했다. 비행기가 김포에 도착하자마자
에어컨은 꺼지고 뒷자리에 앉은 우리는 앞 승객들이 다 빠져나갈때까지 기다려야 했는데
어찌나 덥던지 이룸이는 빨리 내리자고 계속 몸무림치며 울었다.
좀 더 크면 데리고 올 걸.. 아직 비행기 타고 여행하기에 어린 아이를 어른 욕심으로 데리고와서
이렇게 고생하구나.. 이룸이에게 너무나 미안했다.
다녀와서도 이룸이는 쉽게 회복되지 않다가 토요일 저녁부터 밥을 먹기 시작했다.
다행히 지금은 거의 좋아진 상태다.

 

집 안팎을 뛰어 다니며 좋아하는 이룸이를 보면서 역시 어린 아이에게는 집이 제일 좋구나.. 싶다.
세 아이가 나이 차가 많다보니 여행의 촛점을 한 아이에게 맞출 수 가 없는 것도 어려웠다.
필규는 더 많이 보고 더 오래 놀기를 원하는데 두 여동생들은 체력도 부족하고 힘들어 했다.
적어도 막내가 여덟살은 되야 함께 움직일 수 있으려나. 그땐 열 다섯살이나 된 큰 아이가
동생들과 함께 다니고 싶어 할까..

 

제주도를 떠나오면서 아이들과 약속했다. 5년 후에 다시 와서 그때는 꼭 올레길을 걸어보자.
필규 열 다섯 살, 윤정이 열 한살, 이룸이 여덟살... 그 정도면 올레길을 천천히 함께 걸을 수
있겠지...

10년 만의 가족 여행은 아쉽게 끝났지만 첫날 월정리 바닷가에서 해맑게 웃으며 즐거워서
뛰어 다니던 세 아이의 모습을 보석처럼 마음에 새겼다.
그래... 이런 추억이 있으면 되는거지.. 다 좋진 않았지만 두고두고 되새기고 싶은 순간들을
만들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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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순화
서른 둘에 결혼, 아이를 가지면서 직장 대신 육아를 선택했다. 산업화된 출산 문화가 싫어 첫째인 아들은 조산원에서, 둘째와 셋째 딸은 집에서 낳았다. 돈이 많이 들어서, 육아가 어려워서 아이를 많이 낳을 수 없다는 엄마들의 생각에 열심히 도전 중이다. 집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경험이 주는 가치, 병원과 예방접종에 의존하지 않고 건강하게 아이를 키우는 일, 사교육에 의존하기보다는 아이와 더불어 세상을 배워가는 일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고 있다. 계간 <공동육아>와 <민들레> 잡지에도 글을 쓰고 있다.
이메일 : don3123@naver.com      
블로그 : http://plug.hani.co.kr/don3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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