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규 8.jpg

 

시아버님이 남편과 강릉에서 지내시는 일주일 동안

나는 아이들과 많이 돌아다녔다. 1박 2일 순천 여행도 다녀오고

양주에 있는 쌍둥이 자매의 집에서도 하루 쉬다 왔다.

그날은 양주에서 돌아오던 토요일 밤 이었다.

 

외곽순환도로에 접어 들어 한참 달리고 있는데 이룸이가 내게 물었다.

'엄마, 내가 싼타 할아버지한테 뭐 달라고 기도했었지'

'...음... 무지개 레이스 드레스였나?  핑크 머리띠?'

열심히 생각을 더듬고 있는데

'흥. 이룸아 산타할아버지는 없어. 그거 다 거짓말이야. 엄마가 지어낸거야'

갑자기 필규가 이렇게 소리를 치는 것이었다.

 

'아니야, 오빠야 산타할아버지는 정말 있어. 난 있다고 믿을래'

윤정이가 대답하자 필규는 다시

'그거 다 엄마가 지어낸거야. 산타할아버지는 없거든?' 하더니

'엄마가 10년 동안 나를 속였어. 엄마한테 속았다고' 부르짖는 것이었다.

어이가 없었다.

 

필규 나이 열 한 살, 산타할아버지 역할을 그동안 부모가 해 왔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알 나이가 지났으려니...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게 왠 뜬금없는

공격이람.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아직 어린 동생들은 한참은 더 산타에 대한 동심을

지켜주고 싶어 필규 입을 막을 필요가 있었다.

'필규야. 그 이야기는 나중에 집에 가서 엄마랑 둘이 하자. 지금은 그만하자'

화해의 의사를 전했다.

너는 진실을 알았더라도 동생들을 위해서 지금은 좀 비밀을 지켜달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필규는

'싫어요. 엄마는 것짓말장이예요. 지금까지 저를 속여왔잖아요.

저한테는 거짓말 하지 말라고 해 놓고는 엄마가 거짓말 한거잖아요' 연신 공격이다.

'오빠, 싼타는 정말 있어. 난 선물 받을꺼야'

'이 바보들아. 산타는 없다고, 너희들도 속고 있는거야'

 

어두운 밤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는 작은 차 안에서는 난데없는 산타논쟁이 벌어졌다.

싼타를 벌써부터 기다리고 있는 동생들도 지지않고 있다고 소리치고, 필규는

더 큰 소리로 바보들이라고 버럭거리고 있으니 네비게이션 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필규야, 알았으니까 나중에 얘기하자. 너희들이 싸우는 소리때문에 엄마가 운전을 제대로

못하겠어. 그리고 산타 이야기는 어디서 들은거니? 넌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물었더니

'엄마가 베이비트리에 쓴 글, 내가 다 읽었다구요. 전국에 있는 부모들한테 산타노릇 하느라

수고하셨다고 , 엄마가 그렇게 썼잖아요' 악을 쓴다.

 

그래, 그래.. 기억난다. 작년 겨울 성탄절 지나서 올린 글에 그런 내용을 썼었다.

늦게 퇴근하고 혹은 출장가고 하면서도 아이들의 꿈을 지켜주고 싶어서 몰래 선물사고

애들 잘때까지 졸린거 참고 기다리다가 머리맡에 놓고 카드 써 놓고.. 이런 수고를 한

부모들을 위로하는 그런 글이었다. 그 글을 필규가 읽은 모양이다. 하여간에

그럼 그 동안 녀석도 산타의 존재를 철썩같이 믿고 있었던 것인가? 열살이었는데도?

그래, 그럴수 있다 치자. 설령 열살에 산타노릇을 부모가 해 왔다는 사실을 알았다해도

그게 그동안 자신을 속여왔다고 분노를 느낄일인가? 이렇게 우리를 위해 애쓰셨구나

이해될 수 있는 나이 아닐까?

 

나는 큰 소리가 오가느라 정신없는 차 안에서 아이들을 진정시키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필규의 공격은

끝이 없었고 나중에는 대성통곡을 하며 엄마는 거짓말쟁이에 남을 속이는 나쁜 사람이라고

소리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도저히 운전을 계속 할 수 가 없었다.

그동안 애써온 것을 나쁜 짓으로 폄하하는 아들의 표현을 참을 수 가 없었고

여전히 산타가 필요한 어린 동생들의 바램을 짓밟는 것들이 견딜 수 없이 미웠다.

나는 톨게이트를 빠져나오자마자 넓을 갓길에 차를 세웠다.

'필규, 내려봐. 엄마랑 얘기좀 해'

윤정이는 갑자기 차를 세운 엄마가 오빠를 내리게 하자 겁에 질려 울기 시작했다.

'오빠랑 엄마랑만 잠깐 할 얘기가 있어. 너희들은 차 안에서 기다려'

필규는 눈물로 얼룩진 굳은 얼굴로 차에서 내렸다.

별것도 아닌 일로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는데, 나의 이런 행동이 어린 아이들에게

공포스러울 수 도 있는데 그 상태로는 도저히 계속 운전을 할 수 가 없었던 것이다.

 

'니가 산타의 존재를 엄마 글 때문에 알게된건 정말 유감이다. 미안해. 그렇지만

지난 10년 동안 엄마 아빠가 산타 역할을 그렇게 애쓰면서 해온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니?

산타를 믿는 너희들의 마음을 지켜주고 싶었기 때문이야. 그래서 아빠도 늦은 밤에 퇴근해서

너희들 잠 들깨까지 기다렸다가 머리맡에 선물 놓아주고 카드 써 놓고 그랬다고..

작년 크리스마스 아침에 윤정이가 얼마나 기뻐했는지 생각 안 나니? 산타할아버지가

정말 자기가 갖고 싶은 선물을 주셨다고 얼마나 좋아했니. 엄마 아빠는 그런 너희들 모습 보면서

정말 행복했어.

전국에 모든 부모들이 그렇게 애를 써. 아이들에게 행복한 크리스마스의 추억을 선물하고 싶어서..

그렇게 노력한 것이 왜 너한테 비난을 받아야 하니? 산타에 대한 환상이 깨진것은 미안하지만

엄마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니가 어떻게 그 글을 읽었는지 모르지만 아이들을 위해서

그렇게 애를 쓰는 부모 마음은 왜 하나도 몰라주고 너를 속였다고만 생각하는거야?

그럼 처음부터 산타에 대한 환상을 가져볼 기회도 안 주고 그런거 다 거짓말이라고

산타같은 것 애초부터 없다고 말해줬어야 했니?

너는 진실을 알았다고 해도 아직 어린 동생들을 위해서 동생들 앞에서는 비밀을 좀

지켜주면 안 되는거야? 너는 그런 동화같은 세월을 10년이나 누렸는데 동생들은

이제 겨우 네살, 일곱살이잖아. 니가 동생들 마음에 품고 있는 환상을 깨뜨릴 권리는 없어!'

 

나는 속사포처럼 이런 말들을 어린 아들에게 쏟아냈다.

분하고 화가 났다.

엄마때문에 산타의 진실을 알게 되어 허탈하고 속상한 아이 마음부터 어루만져줄

여유 따위는 없었다. 일곱 여덟살이라면 몰라도 열한 살이나 된 큰 아들과 산타때문에

한 밤중에 고속도로에서 차를 세우고 싸우고 있다는 사실도 한심하고 화가 났다.

내가 내 아이를 잘 모르고 있는걸까? 나는 필규는 산타의 존재를 진작에 알고 있었다고

생각해 왔다. 설령 아직까지 믿고 있다 하더라도 혹 내 글때문에 진실을 알게 되었다 하더라도

어떻게 이렇게 심한 말로 공격할 수 있지? 그동안 고마왔던 마음은 전혀 없는거야?

 

그동안 애써왔던 것이 아들의 비난에 상처가 되었고, 무엇보다 거짓말쟁이에 남을 속이는

사람이라는 아들의 표현은 내 이성을 마비시켜 버렸다.

아들은 내 격렬한 반응에 아무말 않고 있다가 기껏 하는 말이

'... 걱정 안 하셔도 되요. 윤정이랑 이룸이는 내 말 안 믿을꺼예요.  내가 맨날

거짓말 하는거 아니까...' 이러는거다.

 

가슴을 꽉 채우던 분노가 푸시시.. 바람소리를 내며 쪼그러 들었다.

내가 필규를 너무 과대평가 해 왔던 걸까. 저 녀석은 철이 없는거냐, 아니면 아직도

너무 순수한거냐. 핸드폰이나 게임기 사 달라는 것 때문도 아니고

텔레비젼이나 간식 때문도 아니고 열한 살 아들과 대판 싸운 것이 산타할아버지 때문이라니..

제 또래보다 늘 어려운 책들을 읽고, 아는 것도 많고, 이성에 대해 남보다 빨리 눈 뜨고

남녀간 교합의 원리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 녀석이라 가끔은 다 큰 녀석처럼 대해 왔는데

어떤 면들은 터무니없이 유치하고 어리니, 도무지 감을 잡을 수 가 없다.

 

필규는 집에 돌아와서야 내게 매달리며 사과를 했다.

'엄마.. 아까는 정말 죄송해요. 제가 잘못했어요'

'... 엄마도 어른스럽게 굴지 못해서 미안해. 그렇게 감정적으로 구는게 아니었는데..

니가 거짓말쟁이라고 공격하니까, 엄마가 제일 싫어하는 말이 바로 거짓말쟁이라는 말이거든..

그 말을 들으니까 엄마도 순간적으로 너무 화가나서 제정신이 아니었나봐'

우린 다시 서로를 꼭 끌어 않았다.

 

'필규야.. 우리가 가끔 영화를 찍는구나. 아까는 로드무비 한 편 찍었지?

제발 다음엔 훈훈한 홈 비디오나 찍자. 스릴과 공포가 난무하는 로드무비 말고..'

'네 엄마.. 앞으로는 코믹 퍼니 비디오만 찍자요'

녀석은 큭큭 웃었다.

 

한밤중 고속도로 갓길에서 벌어진 어처구니없는 로드무비는 이렇게 막을 내렸다.

큰 아이는 늘 내 기대와 예상과는 너무나 다른 행동으로 나를 한 순간에 카오스 속으로 빠뜨려 버린다.

11년째 겪고 있지만 아들이 던져주는 카오스를 난 여전히 슬기롭고 어른스럽게 헤쳐나오지 못한다.

아들과 똑같이 그 속에 들어가 진창을 구르고 드잡이를 하고서야 화해가 된다. 아아.. 부끄럽다.

그러나 어쩌랴. 아직 내 수준이 그것밖에 안 되는 것을..

그래도 지나고 보면 녀석때문에 울고 웃었던 기억이 제일 많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공이라서 늘 불안하지만 그래서 내 일상이 더 반짝거리는지도 모른다.

 

아아아. 올 12월엔 내게도 산타가 왔으면 좋겠다.

산타가 필요한 사람은 정말 정말 나란 말이다. 이 녀석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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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순화
서른 둘에 결혼, 아이를 가지면서 직장 대신 육아를 선택했다. 산업화된 출산 문화가 싫어 첫째인 아들은 조산원에서, 둘째와 셋째 딸은 집에서 낳았다. 돈이 많이 들어서, 육아가 어려워서 아이를 많이 낳을 수 없다는 엄마들의 생각에 열심히 도전 중이다. 집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경험이 주는 가치, 병원과 예방접종에 의존하지 않고 건강하게 아이를 키우는 일, 사교육에 의존하기보다는 아이와 더불어 세상을 배워가는 일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고 있다. 계간 <공동육아>와 <민들레> 잡지에도 글을 쓰고 있다.
이메일 : don3123@naver.com      
블로그 : http://plug.hani.co.kr/don3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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