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속의 아이들.jpg

 

처녀적엔 '눈' 정말 좋아했다.
대학 시절 첫 눈 내린 날 친구들과 포자마차 안에 있다가 소주잔에
눈송이를 받아 원샷하면서 행복해 하기도 했었다.
눈 내린 바닷가를 걸으며 환호성을 지르고, 눈 쌓인 설악산을
오르며 설경에 취하기도 했다.
그냥 내리는 눈만 봐도 가슴이 벅차 올라서 하염없이 눈을 맞으며
거리를 걸어다니기도 했었다. 그땐 정말 그랬다.

 

결혼 10년, 세 아이의 엄마, 마흔 셋인 지금은....
눈이...... 괴롭다.

물론 눈이 내리면 아이들과 창가에 매달려 소리 소리 지르며
행복해  하는 건 변함없다. 아이들과 눈 쌓인 비탈길을 사료푸대나
튜브를 타고 미끌어져 내리며 깔깔 웃기도 한다.
젊으나 나이  드나 눈은 사람을 벅차게  행복하게 하는 건 변함없다.
그러나 정말 즐길 수 있을 만큼 눈이 내릴 때만 가능한 이야기다.

 

지난주 수요일에 내린 눈은 내겐 첫눈이었다.
아침에 집을 나설 때만해도 말짱했던 하늘에서  정오무렵부터
흰 눈이 펑펑 쏟아지는데 광화문에서 한 사회단체의 초청으로
산타 자원봉사 활동중이었던 나는 함께 참석한 아들과
펄쩍 펄쩍 뛰며 좋아했었다.
그러나 눈 덕분에 행사는 겁나게 지연되었고, 선물을 들고
지원 대상 아동의 집까지 가느라 애를 먹었다.
행사를 잘 마치고 4호선을 타고 대야미역에 내리고 보니
도로는 눈으로 마비되어 있었고 우리 동네로 들어가는
마을버스는 운행조차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추운 칼 바람을 맞아가며 눈 속을 한 시간 여 걸어 집으로
가야했다.

 

눈은 그 다음날도 많이 내렸다.
우리집 마당으로 이어지는 비탈길은 눈이 조금이라도
쌓이면 차가 미끌어지기때문에 눈만 오면 비상이다.
모처럼 휴가를 얻어 꿀맛같은 시간을 기대하던 남편은
휴가날부터 쏟아지는 눈으로 내내 쉼없이 눈을 치우며
보내야 했다.

 

마당있는 집에 살면서 눈이 오면 불편한게 한 두가지가 아니다.
눈 치우는 일에 매달려야 하는 건 물론이고 사소한 일들도
어려워 지기 때문이다.
우선 신문이 안 들어오거나 오후 늦게야 가져다 준다.
골목과 집 앞 길이 빙판으로 변하면 시내에 나가는 일도
어려워진다. 이번에도 근 3-4일간 집에만 갇혀 지냈다.
아들이 다니는 학교는 작은 고개를 하나 넘어야 하는데
눈만 오면  차가 미끌어져서 마을 버스도 못 넘는다.
수요일엔 차가 아예 못 들어와 아이들이 한 두 시간씩
눈길을 걸어서 시내까지 나와야 했고, 그 다음날은
버스가 제 시간이 오지 못해서 열 시 넘어서야
등교를 할 수 있었다.

 

도로 사정이 조금 나아져서 시내에 나가려고 했더니
이번엔 오래 눈 속에 세워 두었던 차가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보험회사 서비스 센터에 전화를 했는데 신고 전화가 폭주해서
전화원 연결에만 근 3-40분이 걸렸다.
접수가 되고 나서 서비스 카가 출동하는데는 3시간 이상이 걸렸다.
그 덕에 며칠을 냉장고에 있던 오래된 식재료 녹여서 밥을 해 먹었다.

 

어른은 눈 치우랴, 매일 얼어버리는 개들과 닭들 물 챙겨주랴
바쁘지만 아이들은 내내 신이 났다.
눈 썰매장으로 변한 비탈길에서 썰매를 태워 달라고 매달리고
툭하면 밖으로 나가서 논다고 조르는 바람에
하루에도 몇 번이나 모자에 장갑에 외투에 방수 바지를 입혔다
벗겼다 시중을 들어야 했다.
든든하게 입혀서 내 놓기만 하면 그나마 좋겠는데 세살 난
막내는 내가 눈 속에서 데리고 놀아주어야 한다.
눈썰매도 같이 타 달라고 해서 함께 탔는데 아이들은 좋아해도
난 엉덩이 아파 죽는 줄 알았다.

 

눈과 아빠.jpg


이 노릇을 이틀 연달아 했더니 삭신이 다 쑤시고 아파왔다.
하루에도 수없이 적시는 장갑과 바지등을 말리고 다시 챙겨주는
일도 만만치 않았다.

 

멀리 나가지 않고 집에서 눈에 파 묻혀 즐겁게 노는 아이들을
보는 건 정말 행복했지만 이런 행복을 누리기 위해 치루어야
하는 댓가들도 적지 않다. 무엇보다 넘치는 아이들의
열정과 체력을 감당하기에 내 체력은 지극히 저질인데다
워낙 추위를 타는 체질이라 추운 곳에서 노는 일은
정말 싫으니 문제다.

 

눈 내린지 일주일이 지났어도 아직 마당은 온통 눈 천지다.
한낮에 조금 녹다가 저녁이면 다시 기온이 뚝 떨어지니
눈은 고스란히 얼어있다. 주말이 되명 강추위도 누그러지고
평년 기온을 되찾는다는데 왠지 이번 겨울엔 눈이 많은 것 같은
강력한 예감이 든다.

그래도 지금이 아니면 언제 또 아이들과 이렇게 눈 속을 구르며
놀아 볼까.
눈만 오면 개고생을 해야 하는 집이지만 결국은 그런 집이어서
이 집을 사랑하는 것이니 불평은 말아야지.

그래도 요즘 추워도 너무 춥다.
자고 일어나면 15도인 집안..
춥다, 추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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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순화
서른 둘에 결혼, 아이를 가지면서 직장 대신 육아를 선택했다. 산업화된 출산 문화가 싫어 첫째인 아들은 조산원에서, 둘째와 셋째 딸은 집에서 낳았다. 돈이 많이 들어서, 육아가 어려워서 아이를 많이 낳을 수 없다는 엄마들의 생각에 열심히 도전 중이다. 집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경험이 주는 가치, 병원과 예방접종에 의존하지 않고 건강하게 아이를 키우는 일, 사교육에 의존하기보다는 아이와 더불어 세상을 배워가는 일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고 있다. 계간 <공동육아>와 <민들레> 잡지에도 글을 쓰고 있다.
이메일 : don3123@naver.com      
블로그 : http://plug.hani.co.kr/don3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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