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아이.jpg 

                                                                                 (시댁가는 길, 대관령 정상에서)

 

내 연중 스트레스 수치는 설과 추석에 가장 강도 높게 올라간다.
시댁에 가서 명절을 치루는 일보다 더 힘든 일이 없는 것도 아니건만 이 두 명절이 다가오면 가기 전부터 집에 돌아오기까지 겪는 스트레스의 그 진한 맛은 단연 최고다.

몸이 힘든것은 물론이지만 심적으로도 적지않은 압박을 받는다는 뜻이리라.

 

며칠 집을 비우기위해 해놓아야 할 일들을 챙기는 것 부터 다섯 식구 짐가방 싸는 일과 그야말로 떠나는 그 순간까지 장난치고 어지르는 아이들과 씨름을 해 가며 집을 정리하는 일 등등 어느것하나 10년째 만만한 일이 없다.

남들처럼 음식을 미리 해가는 것도 아니고, 막상 시댁에 가면 세 며느리 중 가장 일도 못하고, 덜하는 며느리이면서도 늘 이렇게 몸과 맘이 고단한 것은 10년 째 겪는 추석이지만 10년 째 변함없이 일이 많고 힘들기 때문이다.

 
시댁은 강릉이다.
강릉최씨인 시댁은 일가 친척들이 모두 강릉에 있어서 명절을 크게 지낸다.
우리는 작은집인 까닭에 추석 전날은 큰댁에 가서 일을 해야 하고, 추석 당일에는 새벽같이 일어나

큰댁에 가서 차례 지내고 산더미같은 설걷이 하고 산소에 가서 성묘를 드린다. 여기까지가 끝이면

좋겠지만  그 다음에는 주문진에 있는 큰시이모님 댁에 가서 인사를 드리고 근처에 있는 시외할머님산소에 올라가  성묘를 드린다.

시어머님은 아들 형제가 없어 어머니의 산소에 성묘를 드리는 일을 외손주 며느리들과 함께 준비하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추석 전날 큰댁에 가서 일을 해드리고 오면 우리 식구 먹을 음식도 해야 하지만, 시외할머니

 산소에 갈때 쓸 음식도 다 준비해야 한다. 그러다보니 늘 밤 12시가 넘을 때까지 일이 끝나지 않는다.

 

추석 당일엔 새벽같이 일어나 집을 나서면 오후가 다 기울어서야 돌아오곤 하는데 큰댁에 가서 차례 지내고 뒷설걷이 하고, 산소에 갔다가 다시 주문진까지 달려가 성묘를 올리고 오면 그냥 아무데나 눕고 싶을 정도로 고단하기 일쑤다.

그래서 어떤 해엔 어머님의 고집으로 밖에서 저녁을 사 먹고 오기도 했고, 집 근처 중국집에서 짜장면으로 저녁을 때우기도 했다. 며느리들이 다시 집에 와서 저녁 차리고 치울 일이 너무  힘들까봐 나름 배려하시는 것이다.


그렇지만 며느리들보다 어머님은 몇배나 더 힘들게 명절을 준비하시는 것을 알기에 불평할 수 가 없다.
먼곳에서 와야하는 며느리들 대신 장 보시고 밑 준비 다 하시느라 잠도 제대로 못 주무시곤 한다.
이번에도 추석 전날 함께 앉아 송편을 빚다가 쏟아지는 잠을 못이겨 어머니는 내 앞에서 꾸벅 꾸벅

 조셨다.
몸도 자그마하신 어머님이 늘 얼마나 많은 일을 해내시는지를 보면 입이 딱 벌어진다.
평생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고단하게 몸을 놀리는 것이 몸에 스민 분이라 안스럽기 그지없다.

힘들게 추석을 지내고 나면 다음날은 뿔뿔이 흩어져 돌아오기 바쁘니, 1년에 몇 번 온가족이 다 모여도  제대로 이야기하고 서로간의 정을 나눌 시간이 너무 짧다.

해내야 하는 일을 하느라 허덕이다가 헤어지는 셈이다.
늘 왜이렇게 명절이 힘들어야 할까.. 속상하다.
조상을 모시는 것도 좋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가족인데 가족끼리 오븟하게 모여서 정다운 시간을 보내는 일은 어렵고 자손으로서의 도리를 지키는 일에 다 매달려야 하는것이 늘 아쉽다.

명절은 어쩔 수 없으니 명절이 아닌날 함께 보여 지내면 좋으련만 전국에 흩어져 사는 형제들인지라 명절이 아니면 큰 맘 먹고 모이는 것도 어려우니 어쩔 수 없긴 하다.

 
그래도 물론 뿌듯함은 있다.
명절만큼 아이들이 자라고 있음을 또렷하게 실감할 수 있는 날이 있을까.
절도 제대로 못하던 아이가 사촌형제들 속에 당당히 끼어 넙죽 절 하는 모습을 볼 때도 그렇고,

언제  끝나냐고  짜증 부리던 아이가 의젓하게 차례가 끝날 때까지 기다려주는 모습도 기특하다.
아빠등에 업혀 산소까지 오르던 아이가 언니들 손잡고 씩씩하게 산을 오르는 모습도 고맙고,

큰 아이가  어느새  자라 막내의 손을 잡고 알뜰하게 챙기며 다니는 모습에도 가슴이 뭉클해진다.

워낙 저질인 체력은 아무리 힘든 일도 내색않고 척척 나서서 해 내는 형님과 동서 사이에서 늘 나를

허덕이게 하지만 부모님의 사정을 잘 헤아리고, 시댁에 오면 하나라도 더 힘이 되어드리고 가고

싶어하는 두 사람은 10년 째  나를 가르치는 스승들임을 왜 모를까.
고단한 품 일을 다니시면서도 힘들게 고추를 말려 빨갛고 고운 고춧가루를 만들어 주시는 어머님의

 정성도 고맙고 어린 사촌들을 진심으로 귀여워하며 놀아주는 조카들도 미덥고 이쁘다.

 

올 추석엔 날이 너무 좋아서 큰댁에 다녀오는 길에 들렀던 동해바다 풍경은 너무 너무 근사했다.
건강이 안 좋으신 시부모님이 계셔서 맘 놓고 우리끼리 돌아다니지도, 구경다니지도 못하지만

오고 가는 길에 누리는 강원도의 풍경은 세월이 가도 그 빛이 여전히 곱고 찬란하다.
대관령에서 아이들과 함께 내려다본 동해의 물빛과 강릉 시내의 풍경, 돌아오는 길에 들렀던 용평리조트에서 관광곤돌라를 타고 단풍이 물들기 시작한 산빛을 감상하던 기억도 소중하다.


수고했다, 애썼다 소리 한 번 할줄 몰라 늘 나를 속상하게 하던 남편도 이젠 시댁으로 가는 차 안에서 '애 많이 쓰겠네' 염려해줄만큼 자상해 졌으니 10년 세월이 그냥 흐른게 아니구나.

어머님 정성 담뿍 들어있는 고춧가루와 송편과 들기름들을 꺼내다보니 한 평생 자손들 챙기며 늘 자식들에 대한 그리움으로 살아가고 계시는 시부모님의 마음이 느껴져 짠해졌다.

나도 이 다음에 우리 필규를 1년에 고작 한 두 번만 볼 수 있다면 얼마나 그립고 보고 싶을까.

어머님 마음이 이 다음에 내 마음이라는 것을 알기까지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이젠 마음으로 시부모님과 시형제들을 품게 되었으니 그 세월이 내게 귀한 것을 안겨준 셈이다.

 

나는 다시 내 집으로 돌아왔다.
썰물처럼 자손들이 한꺼번에 빠져나간 시댁은 또 오래 적막이 감돌 것이다.
구정이나 되야 다시 찾아뵙게 되겠지만 부디 건강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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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순화
서른 둘에 결혼, 아이를 가지면서 직장 대신 육아를 선택했다. 산업화된 출산 문화가 싫어 첫째인 아들은 조산원에서, 둘째와 셋째 딸은 집에서 낳았다. 돈이 많이 들어서, 육아가 어려워서 아이를 많이 낳을 수 없다는 엄마들의 생각에 열심히 도전 중이다. 집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경험이 주는 가치, 병원과 예방접종에 의존하지 않고 건강하게 아이를 키우는 일, 사교육에 의존하기보다는 아이와 더불어 세상을 배워가는 일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고 있다. 계간 <공동육아>와 <민들레> 잡지에도 글을 쓰고 있다.
이메일 : don3123@naver.com      
블로그 : http://plug.hani.co.kr/don3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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