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을 하면 엄마들은 개학을 한 기분이다.
학교가 감당해주던 많은 일들을 고스란히 안아야 하기 때문이다.
식사와 놀이, 여가, 공부, 친구, 다양한 체험까지...
한적한 시골 마을에 뚝 떨어져 있는 우리집에선 가볍게 걸어서 만날 친구도
주변에 없다보니 그야말로 눈 떠서 잘 때까지 우리끼리 부대끼며 지내게 된다.
나이가 주는 생체리듬과 관심사가 다른 세 아이는 각자 다른 방학을 보내고 있다.
열다섯 살 아들은 하루의 반나절은 잔다. 밤엔 늦도록 책을 보느라 몇 시에 자는지
알 수 없지만 정오부터 깨워도 오후 1시 넘어서야 간신히 눈을 뜬다.
방학에도 규칙적인 생활....따위는 애초부터 먹히지도 않았다.
나부터도 그닥 규칙적인 사람이 아니므로 몇 번 일찍 깨우려고 시도했다가
포기했다. 반나절을 자고 일어나야 아들은 움직인다.
눈 뜨면 컴퓨터 앞에 앉는다. 공식적으로 정해진 게임 시간은 일주일에
세 시간이지만, 매일 출석을 한다며 게임창을 열고 아이템을 얻고, 포인트를
쌓는 일에 열심이시다. 그래봤자 또래 아이들에 비해 게임을 하는 시간이
현저하게 적으므로 적당히 눈 감아 준다. 어짜피 개학하면 이 생활도 끝이다.
컴퓨터 앞에 앉는 시간이 끝나면 다시 소파에서 뒹굴거리며 만화책을 보거나
신문을 뒤적이고 TV를 본다. 본래 우리집은 주말에만 TV 시청을 하는데
방학과 동시에 아들은 이 규칙을 가볍게 무시하고 있다.
이 역시 그래봤자 공중파 4개 채널만 나오는 우리집이므로 적당히
넘어가 준다. 프로그램이 뻔하다보니 온갖 다큐와 시사 프로그램까지 섭렵한다.
개학하면 다시 평일 TV시청은 끝이다.
폭염과 장마가 오가는 여름은 풀도 극성으로 자라고, 집 안팎에 할 일이 넘치는데
아들이 좀 척척 나서주면 한결 수월할텐데 몸 움직이는 일엔 질색을 한다.
제가 먹은 그릇 설거지하고, 개밥과 물을 주고, 닭장에 물주고, 가끔 마지못해
더위 타는 개들을 샤워시키는게 고작이다.
햇볕 쬐는 것도 질색을 한다.
구리빛으로 탄 건강한 몸으로 자전거를 타고, 공을 차고, 농구를 하고, 땀을 흘리는...
그런 육체파 아들을 소망하던 내 꿈은 애진작에 버렸다.
운동도 잘 하고 책도 좋아하는..... 아들을 기대했던 것이 말도 안되는 판타지였다.
방학과 동시에 몸을 최소한으로 움직이며 생활하는 아들은 그나마 책은 많이 읽고
있으니 다행이다.
움직이지도 않는 것이 끼니때마다 맛있는 반찬 찾는다.
열다섯 살 아들을 움직이는 것은 게임과 책과 만화와 잠, 그리고 '고기'다.
엄마가 매일 동생들만 데리고 외출해서 집에 자기 혼자 남게 되는 일만 바라고 있다.
흥.. 속이 빤하다.
열한 살 둘째..
방학 중 모자란 공부를 하는 모습.... 은 볼 수 도 없다.
평소에도 공부를 일부러 시켜지 않는 엄마다보니 스스로 안 하는 아이에게
갑자기 이것 저것 하라고 할 수도 없다.
"일기는 쓰고 있는거니?" 한 마디 했더니
"엄마, 그건 제가 알아서 할께요" 한다.
알아서 한다는데 더 할 말이 없다. 그렇구나, 알아서 할꺼구나.. 하는 수 밖에..
열한 살 딸은 그동안 오빠가 누려오던 많은 것들에 딴지를 걸기 시작했다.
"엄마, 왜 오빠만 게임을 많이 해요?"
"게임 출석도 게임으로 봐야 하는 거 아닌가요?"
"왜 오빠만 아이팟 만져요? 나도 아이팟 만지면 안돼요?"
"저도 오빠 보는 만큼 웹툰 보고 싶어요"
이러다보니 큰 애와 자주 싸우게 된다.
아직까지 스마트폰이 없다는게 큰 스트레스인 큰 애는 그나마 게임 출석이니
아이팟 사용이니 하는 것들을 제 권리인양 여기고 있어서 동생이 제 권리를
침해한다고 느끼면 참지 못하고 펄펄 뛴다.
부당하다고 느끼는 것을 표현하고 따지는 모습은 순둥이 둘째에겐 분명
바람직 하기도 하고, 바래왔던 모습이지만 막상 갈등이 늘어나니
집안은 더 소란스러워지고 내 피곤함도 늘어간다.
일주일에 두 편, 그림 일기 쓰는 것이 유일한 숙제인 막내는 시키거나 확인하지
않아도 알아서 잘 한다. 게다가 글씨도 세 아이중 가장 이쁘게 쓴다.
어딜봐도 똑 떨어지는 영특한 아이다. 그런데 이 영특한 아이는 가끔 마치 사춘기
아이처럼 아무렇지 않게 사람 속을 뒤집어 놓는다.
좋고 싫은게 너무나 분명하고 제 의견을 여간해서 굽히지 않는 아이라서
수시로 세살 위인 언니와 한 판씩 붙는다. 나와도 자주 부딪친다.
어떤 상황에서도 제 생각을 조리있게 잘 표현할 줄 알다보니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다. 다 따지고, 주장하고, 확인하려든다.
이제 겨우 여덟 살 아이에게 설명하고 동의와 이해를 구하고 협상하고 설득하는
일에 진이 쏙 빠질때가 여러 번이다.
잘못한 일을 이해시키느라 열변을 토하고 있는 엄마에게
"저, 지금 그런 말 들을 기분 아니거든요?" 라고 한다거나, 말이 조금만 길어지는가
싶으면 "엄마, 그만 좀 해주실래요?" 한다거나, 언니와 번갈아 하기로 정했던 일도
"오늘은 안 하고 싶어요. " "누구나 안 하고 싶은 때 있잖아요. 저는 오늘이
그렇다구요" 하는 식이다.
물론 평소에는 녹을 듯 애교 많고 달콤한 딸이다.
그러나 기분이 상하거나 화가 나면 불같이 변한다.
사춘기 아이 셋과 살고 있는 기분이다.
한꺼번에 시달리고 한꺼번에 좋아지려나...ㅠㅠ
집안에서 아이들이 원하는 많은 일, 아이들이 누릴 수 있는 권리의 경계를
세 아이 모두 납득할 수 있는 선으로 정하는 것은 정말 어렵다.
점점 커가는 욕구들과 생각들은 어렵게 정한 규칙들도 다시 갈등이 되게 하는
이유가 된다. 잘 지내다가 한번씩 집이 떠나가게 싸우고 울고 불고
소리치고 억울해하고 난리다.
꿀같이 달달하게 어울리다가 한 순간 칼처럼 날카로와지고, 그러다
다시 안 볼 사이처럼 지긋지긋해 하는가 싶었는데 어느새 또 셋이
엉켜서 킬킬 거리고 있다. 그 와중에 나도 같이 널을 뛰듯 휩쓸리기도 하고
정신차려서 어른노릇 하기도 하면서 방학을 보내고 있다.
그래도 할 일 많은 집안일 툴툴 거리면서도 서로 번갈아 맡아주고,
더운 여름에 탈나지 않고 건강하게 지내는 것이 고맙다.
집이 너무 더우면 에어컨이 시원한 도서관에 가서 한 나절씩 책 읽다 오고
밤에는 같이 좋아하는 영화도 보고, 이따금 동네 카페에 가서 시원한 팥빙수도
사 먹고 온다.
밥 하기 힘들면 동네 단골 분식집에 가서 한 끼 해결하기도 하고,
출장 자주 다니는 남편이 식권이 많이 남았다고 하면 그 식권으로 먹을 수 있는
맛있는 짜장면을 위해 잠실까지 행차도 한다.
가족끼리 해외여행 간 친구도 많고, 동해로, 제주도로, 근사한 휴가를
즐기고 왔다는 이웃들도 많지만 우리는 멀리 나가지 않고 집과 도서관과
학교와 동네 안에서 더운 여름을 나고 있다.
입추 지나자 거짓말처럼 밤이 서늘해졌다. 절기란 참 신기하다.
아이들 방학도 절반을 넘어섰다. 이제 하루하루 개학이 다가오리라.
조금 더 애쓰면 다시 학교와 집을 오가는 일상이 시작되겠지.
바쁘고 고단했던 내 여름도 지나갈 것이다.
이렇게 지낼 수 있는 방학이 몇 번이나 더 있을까.
큰 아이가 고등학교만 들어가도 방학은 또 많이 달라질 것이다.
그러니까 매번의 방학이 사실은 유일한 방학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힘을 내는거다.
절반은 지났으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