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의 편지.jpg

 

그러니까 긴 연휴가 끝나고 아들이 기숙사로 가기 전 날인 5월 6일,

"어이 아들, 어버이날 감사 편지는 써 놓고 갈꺼지?" 아들에게 물었더니..

"주말에 드릴께요"녀석은 심드렁하게 말했다.

"뭐라고? 그럼 어버이날 지나는거잖아?"

"아이참, 그럼 뭐 어때요. 기다려보세요"녀석은 빙글거리며 말하는거다. 게다가

"그런데 왜 어버이날은 노는 날이 아닌거죠?" 억울하다듯 내게 묻는 것이다.

어버이날에 니가 왜 놀아? 놀려면 내가 놀아야지!!

용돈도 받는 녀석이 이 나이 되도록 어버이날에 작은 선물하나 사 오는 법도 없으면서

휴일이 아니라고 아까와 하고, 고작 편지 한장 기다리는 애미보고 주말까지 기다려 받으라니

정말이지 이녀석에게 어버이날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거냐.. 툴툴거렸다.

그리고는 잊어 버렸다.

바빴던 토요일, 학교 일로 저녁 늦도록 토론에 참여하고 진이 빠져 집에 와서 쉬고 있는데

밤 늦게 아들이 "아참, 편지 드려야지요" 하며 방에 들어가더니 엽서 한 장 들고와 건넨다.

녀석 정말 쓰긴 했구만, 반가와서 얼른 집어들었는데...

- 엄마, 아빠에게

편지는 도대체 왜 존재하는 것일까요? 그냥 말로 하면 안되나? 멀리 있는

것도 아닌데.... 그냥 말을 종이로 하는 건데 도대체가 어디가

다른 것이죠? 마음이 달라지나? 뭐, 저는 잘 모르겠고 그냥 평소에

대화 하듯이 쓰면 최고일 것 같네요. 이 편지에 비장한 약속 같은

걸 적어 놓으면 100% 지키지 못할테니 그런건 안 적고,

뭔 '착한 아들이 될께요'같은 거짓말도 못하겠고, 핸드폰 조금

할게요.... 도 거짓말이네? 뭐야.... 적을게 없네? 자... 그럼

대충 어버이날 축하드리고 (아님 경하 드리고) (아님 감축 드리고)

앞으로도 만수무강 하세요 (무병장수 하세요) (천수를 누리세요) 이런 말로

채워도 좀 그렇고... 그냥 마음만 담는게 제일 낫겠네요.

어버이 되신지 어언 17년, 어버이날에 축하를 받으신지 대충 10년이

되가시는데 그 중에 7번 쯤은 '낳아주셔서 감사해요' 내용이

겠지만, 어린 놈들은 생각이 협소하군요. 맨날 그런 말이나

쓰고 말이야. 그런데, 신기하게도 의외로 그런 단도직입적인 말이

오히려 지구 세바퀴 빙빙 돌려 말하는 것 보다 의미전달이

잘 된다네요. 물론 당연한거겠지만. 제가 이 말을 하기까지

편지에서 벌써 세바퀴를 돈 것 같지만 말하자면 낳아주셔서,

키워 주시고, 사랑해 주시고, 까부는거 냅둬 두시고, 학교 좋은데(?)

보내 주시고, 늦게 자는 거 늦게 일어나는 거 뭐라 하시지만 내버려

두시는 거, 미리 대신 걱정해 주는 거... 등등 지금까지, 앞으로의

모든 일을 감사드려요. 제가 하는 모든 행동들을 응원해주시

겠죠? (아님 말고.. 흥.) 언제나, 영원히 저 사랑해 주시는

만큼 사랑해요. 아빠, 엄마.

아들 -

부엌에 서서 읽다가 읽다가.. 눈물이 뚝뚝 흘렀다.

녀석.. 무슨 너스레를 이렇게 장황하게 늘어 놓은 거야...

 그러면서도 사람 마음 울리는 재주는 있구만..

"필규야..." 울먹이면서 아들을 불렀다.

거실에 앉아 tv를 보던 아들이 벌떡 일어나 내게로 왔다.

"필규야... 엄마가 받아 본 편지 중에 제일 감동적이었어"

훌쩍거렸더니

"아이 참 우리 엄마, 또 우시네" 아들은 빙글거리며 나를 꼭 안아 주었다.

나는 아들의 따듯한 품에 안겨서 어린애처럼 눈물을 닦았다.

아들은 웃으며 다시 제자리로 가고 나는 보물처럼 아들이 편지를 읽고 읽고 또 읽었다.

이 아이는 우리를, 엄마 아빠를 아주 단단하게 믿어 주는 구나..

아들의 믿음을 얻고 있다는 것에 가슴이 뻐근하게 북받쳤다.

서로를 믿지 못해 힘들었던 날들이 참 길었는데, 그땐 도무지 이 아이의 앞날을 긍정할 수

없어서 무섭고 불안하고 어려웠는데 힘들게 지내 왔다고 생각하던 그 날들 동안 그래도 우린

늘 손을 잡고 있었구나. 싫다고 밉다고 소리칠 때도 너는 우리 손을 꼭 잡고 있었구나.

한 번도 그 손을 놓은 적이 없구나...

행복해서, 고마와서, 감사해서 울었다. 열 일곱 아들이 보여주는 그 마음이 뿌듯해서 울었다.

학교를 좋아하는 아들이 되었으면.. 자기가 좋아하는 학교에서 인정 받고 사랑받는 아이가

되었으면..부모를 좋아하고 가족을 사랑하는 아이가 되었으면... 제 자신을 좋아하는 아이로

자랐으면...

기도 했던 것들이 어느새 스르르 다 이루어져 있었다. 지독하게도 싸우고, 소리 지르고,

서로의 가슴에 생채기 내며 지내던 시간들 동안에도 아이도 나도 열심히 자라 왔었나 보다.

나는 마음껏 눈물을 흘리고 아들의 편지를 소중하게 품어 보았다가 남편을 불러 보여 주었다.

부엌에 서서 아들의 편지를 읽어 내려가는 남편의 눈빛이 아주 미세하게 변해 가는 것을

곁에서 지켜 보면서 그 눈빛과 가늘게 떨리는 눈가와 뺨의 움직임 만으로도 남편 마음에

일어나는 감정들을 고스란히 알 수 있어서 또 눈물이 났다.

".. 잘 키웠네"

편지를 다 읽은 남편은 내 등을 툭툭 두드려 주었다.

이 보다 더 좋은 선물은 없다.

다시 돌아온 월요일..

어젯밤 늦도록 '중용'에 나오는 어려운 한자를 외우느라 머리를 쥐어 뜯던 아들은 다시

기숙사로 떠났다.

아들 방을 정리하면서 다시 아들 생각을 했고, 아들의 편지를 또 꺼내 읽어 보았다.

아들 목소리가 들린다. 내 옆에서 떠들어대는 것 같다. 녀석의 글은 고대로 녀석의 말이다.

아, 참 귀여운 아이다.

정해져 있는 길을 떠나서 다른 길을 가고 있는 네게 미래란 자주 불안한 상상이 되기도 하지만

미래라는 것이 저 멀리 허공에 떠 있는 무엇이 아니란다. 지금 내 걸음들이 조금씩 만들어

가고 있는 것 일뿐.. 그러니까 지금 행복한게 소중하고 그 마음으로 열심히 가면 된다.

열 일곱의 너와 이렇게 지내고 있는 것이 우리는 정말 너무나 좋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에 꾸벅 절하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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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순화
서른 둘에 결혼, 아이를 가지면서 직장 대신 육아를 선택했다. 산업화된 출산 문화가 싫어 첫째인 아들은 조산원에서, 둘째와 셋째 딸은 집에서 낳았다. 돈이 많이 들어서, 육아가 어려워서 아이를 많이 낳을 수 없다는 엄마들의 생각에 열심히 도전 중이다. 집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경험이 주는 가치, 병원과 예방접종에 의존하지 않고 건강하게 아이를 키우는 일, 사교육에 의존하기보다는 아이와 더불어 세상을 배워가는 일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고 있다. 계간 <공동육아>와 <민들레> 잡지에도 글을 쓰고 있다.
이메일 : don3123@naver.com      
블로그 : http://plug.hani.co.kr/don3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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