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교육

숫자를 읽을 수 있어요

조영미 2012. 11.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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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2_벼베기.jpg » 벼베기. 사진 조영미.  
 
글자를 모르던 시기에 큰아이는 고속도로 톨게이트를 색깔로 구분하였다. “유성은 하늘색이고, 서울은 주황색이야!”. 그 말을 듣고 톨게이트를 보니 정말 색깔이 달랐다. 해님이도 만 2살 때 유치원에서 산책을 가는 도중에 ‘유치원선생님’의 차를 찾아보라고 하자, 하얀색이 두 대 있었는데 선생님 차를 정확히 찾아내었다. 선생님 차에 대한 자신만의 느낌이 있는 것이다. 선생님이 이 일을 두고 “신기하다”라고 일기에 적어놓았다. 

아이들이 일찍부터 문자를 읽게 되면 사물을 관찰하기보다는 사물에 붙어 있거나 그 주변에 있는 문자에 주목하기 때문에 사물 자체로부터 자연스레 멀어지게 된다. 아이의 전 일생을 두고 볼 때 사물에 온전히 집중하는 시기는 아무래도 유아기 아닐까? 그 시기를 충분히 누릴 수 있도록 글자 지도를 일체 삼간다. 

그런데 문자를 굳이 가르치지 않더라도 요즘은 어느 곳이나 문자가 천지이기 때문에 아이들이 알게 모르게 문자에 익숙해지고 길들여진다. 숫자만 해도 그렇다. 아이들을 둘러싼 일상생활에 1, 2, 3 등과 같은 수 표기가 얼마나 자주 등장하는지 한번 떠올려보자. 달력, 시계, 아파트의 엘리베이터, 버스, 책 표지, 전화기, 휴대폰, 텔레비전, 오디오, 자동차 등등. 우리 인간이 만든 물건 상당수에는 숫자들이 적혀 있다. 요즘 아이들은 그 어느 때보다 숫자 표기를 접하거나 집중할 기회가 많다. 예를 들어, 아파트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해 기다리다보면, 아무래도 숫자판의 숫자의 변화에 관심이 가기 마련이다. 언제 저 숫자가 ‘1’로 변할까? 기다리면서 숫자가 차례차례 변하는 모습을 관찰하게 되는 것이다. 

만 4년 6개월경 해님이가 엘리베이터 안에 적혀 있는 ‘1’을 가리키며 “이게 뭐야?”라고 묻는다. 그러고 나서 그 옆에 있는 ‘2’를 가리키면서 똑같은 질문을 한다. 대답을 해주었더니, 자기가 입고 있는 바지를 쳐다본다. 마침 자기 바지의 한 쪽 가랑이에는 1이, 다른 쪽 가랑이에는 2가 적혀 있다. 각각을 정확히 가리키면서 
“그럼, 이게 일(1)이고, 이게 이(2)야?”
라고 묻는다. 수를 읽는 법에 관심을 보인 것은 처음인 것 같다. 

해님이가 아파트 생활을 일상적으로 하게 된 게 만 22개월부터이다. 계산해보니 대략 아파트의 엘리베이터를 들락날락한 지 30여 개월의 시간이 흐른 요즘 비로소 숫자를 어떻게 읽는지가 궁금해졌다. 하루에 두 번씩 엘리베이터를 이용했다고 가정하면, 1일 2(회)×30(개월)×한 달 30(일)=1800여 회 정도 엘리베이터를 이용한 셈이다. 그 기간 동안 아이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리면서 무얼 보아왔고 무얼 받아들여 왔을까? 궁금할 뿐 알 수가 없다. 

만 4년 7개월경 해님이가 스케치북에 숫자를 써 가지고 와서는 “이게 얼마야?”라고 묻는다. 101이라고 적혀 있다. “백일이네”라고 말해 주었더니 “와, 엄청 크다”라면서 또 쓴다. 주로 0, 1, 7 모양이 들어 있다. 아이 머릿속에 1, 0, 7 등의 이미지가 들어와 있나보다. 그 중 7은 좌우가 뒤바뀌었다. 

수.jpg
 
아침에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10층에서 기다린다. 1층에서부터 엘리베이터가 올라온다. ‘10’이라는 숫자가 나타나고 이어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들어서면서

“엄마, 일하고 영. 내가 쓸 줄 아는 글자만 있네.”

흐뭇해한다. 
학교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맞은편에 버스가 한 대 지나간다.

“엄마, 일, 영, 일. 일영일 번 버스네.”

라고 말한다. 숫자 읽기에 부쩍 관심이 많아졌다. 휴대전화나 전화기의 숫자를 누르면서 읽는 것도 놀이가 되었다.

수를 읽으려고 할 때 모르면 엄마에게 달려와 묻는다. 그게 제일 빠르고 쉬운 방법이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아이가 나름대로 수를 읽는 방법을 개발하고 있다. 

4년 9개월 경 일이다. 엘리베이터를 탔다. 처음 보는 다른 집 아이도 같이 탔다. 그 아이가 6층을 눌렀다. 우리는 10층이라 해님이가 '10'을 눌렀다. 엘리베이터가 점점 올라간다. 해님이가 혼자서 숫자판의 '1'부터 "일"이라고 읽어간다. 그러더니 '6'에서 "육"이라고 읽고는 이어 "육층이네"라고 말한다.

해님이는 같이 탄 아이가 몇 층에서 내리는지 궁금했나보다. 숫자를 읽을 수 있다면 단박에 6층이라는 것을 알겠지만, 6이 ‘육’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수를 읽는 방법을 자기 나름대로 찾은 것이다. 1이 ‘일’인 줄은 아니까 차례대로 수를 읽는 것이다. ‘이’, ‘삼’, ‘사’, ‘오’, ‘육’. 그렇게 해서 ‘6’이 ‘육층’임을 알았다. 이제는 숙달된, 수를 연달아 세는 기술에 기대어 숫자를 읽은 것이다.
 
4년 9개월 경 신문 광고에서 우연히 '4'를 보고는 그 숫자를 어떻게 읽는지를 궁금해 하는 눈치이다. 가만히 보니, 손가락을 꼽으면서 '일', '이', '삼', '사'라고 스스로 말하고서는 “사네"라고 말한다. 옆에서 보건대, 1, 2, 3, 4 순으로 숫자의 이미지가 머릿속에 간직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머릿속으로 각 숫자의 이미지와 수말을 연속적으로 대응시켜 본 후에, 네 번째에 나오는 ‘4’에 ‘사’를 연결시킨 것이다. 4의 이미지는 기억하고 있는데 막상 4가 혼자 있을 때에는 어떻게 읽어야하는지가 금방 떠오르지 않는다. 이미지와 수 세기를 연결하여 수를 읽는다.

나름대로 숫자를 읽으려고 노하우를 발휘하는 것을 보면 신통방통하다. “아이들은 지적인 능력에서 어른과 동등하다. 늘 새로운 것을 추구하기 때문이다”라는 교육실천가 코르착의 통찰마냥, 아이는 자신의 수준에서 늘 새로운 노하우를 스스로 시도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만약에 내가 ‘이건 사라고 읽고, 이건 오라고 읽고, 이건 칠이라고 읽는 거야’라면서 반복적으로 알려 주어 아이가 수를 읽을 수 있게 되었다면, 앞의 시도들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만큼 자신이 스스로 뭔가를 만들어내는 기회가 줄어들었을 것이다. 이 생각에 이르니, 함부로 앞서서 가르칠 게 아님을 새삼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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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미
현재 공주교육대학교 초등수학교육과 교수로 있으며,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수학교육과에서 교육학(수학교육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자연과 함께, 스스로 피어나는 교육’을 추구하는 15년제 대안학교 "꽃피는학교"의 유치과정과 초등과정에 아이들을 보내면서, 아이들의 생활 속에서 열심히 ‘수학’을 찾아보는 취미를 갖고 있다.
이메일 : ymcho@gjue.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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