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아이들에게 꼭 필요한 삶의 연습
화제가 되었던 ‘꽃보다 누나’를 뒤늦게 인터넷 TV로 몰아 보았습니다. 꽃누나들의 짐꾼으로 나섰던 이승기가 짐꾼이 아닌 누나들의 ‘짐’으로 전락하는 좌충우돌 해프닝이 참 재미있더군요. 훤칠한 훈남에 엄친아로 대표되는 이승기가 왜 ‘허당’이라는 의외의 별명을 가지고 있는지 알 것 같았습니다. 프로그램에 삽입된 이승기의 인터뷰 중에 마음에 남는 말이 있었습니다. 고등학생 이른 나이에 데뷔한 그는 줄곧 남이 짜주는 스케줄에 따라 움직였다고 합니다. 수행원들과 함께하는 바쁜 일정 속에서 ‘뭘 하고 싶다’라고 말하는 것은 민폐가 될 것 같았다고 고백합니다. 하지만 누나들과의 함께한 열흘간의 여행이 그의 인생에 큰 전환점이 되었고, 이제는 스스로 하고 싶은 일이 많아졌다고 합니다. 모든 것을 내가 알아서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자유여행이 이승기에게 많은 것을 알려준 모양입니다.
잔잔한 울림 끝에 우리 아이들이 생각났습니다. 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매니저 엄마가 짜준 스케줄 속에서 학원과 학원을 오가며 우리 아이들은 무얼 배우고 있을까요? “엄마, 나 이제 뭐해?”가 입에 붙은 아이들이 과연 어떤 어른으로 자라날 지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그것을 어떻게 하면 되는지 생각해낼 수 있는 힘은 하루아침에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 아닌걸요. 내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그 일을 하기 위해 필요한 물건, 사람, 장소 등을 미리 생각하며 준비할 수 있는 능력은 일상을 통해 훈습되는 것이지요.
제가 연구하는 하이스코프 유아교육 프로그램에서 아주 주목할 만한 특징 중의 하나는 아이들이 어떤 활동을 시작하기 전에 계획하고, 실행하고, 자기가 한 일을 돌아보며 평가하는 작업을 일과에 포함하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자유놀이를 시작하기 전에 하고 싶은 일, 하지만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머릿속으로 그려보고 그것에 대해 교사와 함께 이야기 하면서 자신의 놀이를 계획하는 것이지요. 언어능력과 자기 주변의 물건, 사람, 장소 등에 관한 내적 심상 형성 능력이 발달되면서 아이들의 계획 능력은 점차 발전하게 됩니다. 스스로 자신의 놀이를 계획하는 일은 아이들의 놀이가 갖는 무한한 배움의 잠재력을 조금 더 현실화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기도 합니다.
무언가를 계획하면서 아이들은 내가 원하는 것,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는 기회를 얻습니다. 주변 어른들이 아이의 관심과 욕구를 인정하고 존중하며 그것을 이루도록 도울 때 아이들은 자신의 놀이(배움)에 더 적극적으로 임하게 됩니다. 스스로 목적(목표)을 가지고 행동할 때 훨씬 더 강한 열정, 에너지 등이 발휘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무언가를 계획하는 일은 아이로 하여금 자기가 하려고 하는 일을 미리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 해보는 작업을 요구합니다. 필요한 물건, 장소, 사람, 상황 등에 대한 가능성과 작업단계의 인과관계를 생각해보고 장애가 되는 문제들을 미리 예상하고 준비해야합니다. 보통 만 3세경 아이들의 계획능력은 ‘인형놀이’ ‘블록놀이’ 같은 한 단계 사고에 머무르지만, 만 5세 정도가 되면 조금씩 구체화, 정교화, 세밀화 되면서 몇 단계의 실행 계획으로 발전합니다. 어떤 일을 진행할 때 어린 아이들은 보통 그 방법의 효율성 보다는 완성에 더욱 집착하게 마련이지요. 하지만 계획하기의 경험들이 쌓이면서 아이들은 심사숙고하여 보다 효율적인 방법을 생각하게 됩니다.
아이들 수준의 계획하기 작업은 그다지 대단한 것은 아닙니다. 아이가 놀이를 시작하기 전에 “오늘은 뭘 할 거니?” 질문을 던집니다. 통원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걸어오는 길이나 집에 돌아온 후의 간식 시간 같은 자연스러운 타이밍이 좋겠지요. 계획에 대한 질문은 아이가 생각을 담아 답할 수 있는 열린 형태가 바람직합니다. “뭐 가지고 놀 거야?” “어디서 놀거야?” 보다는 “오늘은 뭐 하고 놀 거야?” “어떻게 놀 거야?” 같은 열린 질문이 아이들의 사고를 더 촉진시키기 때문입니다.
묻고 나면 엄마(아빠)는 잠시 멈추고 아이의 생각과 말을 기다립니다. 어린 아이들의 계획은 몸짓, 행동, 언어 등의 다양한 방법으로 표현되는데 아직 계획하기에 익숙하지 않은 아이들은 보통 무언의 몸짓이나 행동, 단답형의 대답인 경우가 많습니다. 바닥에 놓인 블록 상자를 손가락으로 가리키기도 하고, 아무 말 없이 방에 가서 색종이 뭉치를 들고 오기도 합니다. 혹은 “인형.” “놀이터.”처럼 원하는 물건이나 장소만을 말하거나, “햄스터랑 놀 거야.” “딱지 만들 거야.”같은 짧은 대답을 하기도 합니다. 어쩌면 계획을 자꾸 번복하거나 계획한 것과는 전혀 다른 놀이를 할지도 모릅니다. 아이의 계획하기가 어떤 모습이건 간에 있는 그대로의 상태를 존중해줍니다. 한 두 번의 시도로 훌륭한 계획을 세울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무언가를 하기 전에 미리 생각해보는 습관을 키우자는 겁니다. 어른의 재촉이나 지나친 개입은 아이를 불편하게 만들어 오히려 생각의 성장에 방해를 줄 수 있습니다.
아이가 무언의 몸짓이나 행동으로 생각을 표현하면 엄마(아빠)는 “아~성재가 블록 놀이가 하고 싶구나!” “색종이를 가지고 왔구나. 색종이로 뭘 할 거니?” 같은 호의적인 언어 표현으로 아이의 선택을 알아주고 차분하게 의도를 파악해나갑니다. 그리고 아이가 어떤 일을 진행하는데 있어 구체적 단계를 생각해보고, 계획을 보다 세밀화, 정교화 해갈 수 있도록 지원합니다. 단순히 블록 상자가 눈에 보여서, 문득 색종이가 생각나서 그 놀이를 하는 것 보다는 놀이를 시작하기 전에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 머릿속에 내적 이미지를 만들어보도록 하려는 것이지요.
계획을 구체화 시킬 때는 아이로 하여금 필요한 물건이나 장소, 사람, 상황 등의 제반사항도 생각해볼 수 있도록 돕습니다. 색종이를 가지고 온 아이가 “나비랑 꽃을 접어서 창문에 붙일 거야.” 했다면 무슨 색 색종이가 몇 장이나 필요할는지, 색종이로 접은 나비와 꽃은 어떤 모습, 어떤 방법으로 창문에 붙일 건지 등에 대한 구체적인 준비물과 작업 단계를 함께 생각해보는 것이지요. 원하는 색의 색종이가 충분하지 않다면 잡지, 포장지 활용 등의 대안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색종이를 붙이고 난 후에도 미닫이 창문이 원활이 열리고 닫히는지, 혹시 다른 이에게 피해가 되는 일은 없는지 등 내 행동으로 인한 결과의 물리적, 심리적인 인과관계도 고려해봅니다.
계획을 실행에 옮기면서 아이들은 새로운 아이디어를 첨가하기도 하고 혹은 예상치 못한 난관에 부딪치기도 합니다. 계획이란 자신의 관심이나 욕구를 어떤 목적으로 구체화하면서 계속 수정, 보완해 나가는 과정이지요. 아무리 어린 아이들이라도 자기가 하고 싶은 일에 대해 생각해보고 그 안에서 문제를 수정, 보완하여 해결하려는 욕구가 있기에 계획하기는 유아기에도 충분히 가능한 작업입니다. 한 번의 놀이 계획은 하루의 계획으로 발전하고, 하루의 계획은 일주일, 한 달, 일 년, 그 이상으로 확장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자기 삶을 꾸려나가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능력임에도 불구하고 쉽게 습관화될 수 없는 것이기에 어른의 지원이 필요하지요.
언젠가 제천간디학교 전 교장 양희창 선생님의 부모강좌를 들으며 크게 공감한 내용이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은 자기 인생을 기획할 수 있는 능력과 나와 남을 배려하는 능력, 크게 두 가지라고 합니다. 사회가 조성하는 불안에 휘둘리지 않고 내 인생을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꾸려나갈 수 있는 힘과 어떤 일을 수행하는데 있어 나와 너, 우리 모두는 똑같이 존중받고 배려 받아야 함을 아는 것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덕목이라는 것이지요. 인생, 계획(기획), 배려 같은 단어가 다소 거창하게 보일지라도 가만히 생각해보면 일상의 작은 움직임에서 시작되는 게 아닐까요. 매일 조금씩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스스로 생각하고 계획하고 준비하면서 그 안에서 나와 남, 우리가 더불어 행복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일. 지금 우리 아이들에게 꼭 필요한 삶의 연습이 아닌가 합니다.
차상진 (sangjin.cha@gmail.com)
<참고문헌>
-Ann S. Epstein(2012), Approaches to learning, HighScope press.
-Ann S. Epstein & Mary Hohmann(2012), The HighScope preschool curriculum, HighScope press.
-Mary Hohmann(1991), Many faces of child planning, Extension, Jan/Feb 1991 Vol 5, No 4, HighScope educational research found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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