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교육

영어 조기 교육의 부메랑

이정희 2013. 06. 21
조회수 14657 추천수 0
“선생님! 저는 영어가 지긋지긋해요. 이런 노래는 정말 시시하구요! 내가 ‘영어 때문에 돈을 얼마나 축내고 깨먹었는지’ 선생님은 모르시죠! 다섯 살 때 영어유치원에 다니면서 엄마가 영어 과외까지 시켰어요. 그런데 지금은 과외 끊었어요.”
“지선아! 그래도 선생님 설명에 주목해야지? 수업시간이니까 딴 짓하지 말고 영어노래를 친구들과 함께 불러보자!”

초등 3학년생 지선이는 영어시간이 되면 주의 산만한 아이로 돌변하는 증세를 보입니다. 선생님과의 대화 장면에서 아이는 엄마가 평소 자기에게 말한 것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습니다. 영어유치원을 보내면서 취학 전 이미 영어 과외를 시키느라 부모는 사교육비에 과도한 지출을 한 것입니다. 투자에 비해 아이가 공부에 몰두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엄마가 평소에 던진 푸념조의 표현이 아이의 뇌리에 새겨진 것으로 보입니다. 

얼핏 보면 지선이는 누구보다 영어교육을 위해 유아기부터 뒷받침을 잘 받은 것 같지만, 학교생활에서 그 부작용을 겪고 있는 사례입니다. 흔히 외국어 교육은 어릴수록 효과적이라는 무조건적인 ‘믿음’이 있습니다. 그 때문에 많은 부모는 자녀교육을 위해 때 이른 “교육투자”를 감행하거나 유아교육 현장에서 조차 바람직하지 않은 시도를 합니다. 예컨대 어떤 학부모는 원어민 영어유치원을 선택하기도하고, 일반 유아현장 (유치원 또는 어린이집)에서는 학부모들의 요구에 맞추어 영어프로그램을 특별활동 시간에 배치합니다. 또한 ‘유능한’ 엄마들은 집에서 소위 “엄마 표 영어” 학습시간을 갖기도 합니다. 

취학 전 이런 다양한 시도들이 아이의 영어 능력을 쌓아 가는데 과연 얼마나 도움이 될까요? 조기교육 또는 선행학습은 아이에게 학습 면에서 동기유발 능력을 저하시킨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지선이의 딴청 부리기 역시 조기 영어의 부작용을 여실히 보여준 셈입니다. 

우리 사회의 조기 영어교육 열풍에서 벗어나려면, 학부모님들이 외국어 실력의 중요성보다 언어의 본질 자체를 파악하는 것이 당면한 급선무입니다. 즉, 영유아기 자녀에게 영어 습득을 강요하기보다 모국어의 습득이 우선임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자녀의 지적 교육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는 논리와 함께 정확한 발음을 위해 어려서 영어를 시작하면 효과적이라고 여기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발상입니다. 

언어학적인 관점에서 모국어의 발달은 옹알이부터 만 6-7세 사이에 그 토대를 마련합니다. 사람에게 언어는 의사소통의 기본 수단으로써 자신의 생각을 파악할 수 있게 하며 감정의 움직임을 표현합니다. 그 뿐 아니라 언어를 통해 사고 구조가 만들어지며 사람의 자의식이 생겨납니다. 다시 말해 사람은 자의식을 지니게 된 다음에 다른 사람과 소통하는 것이 아니라, 의사소통을 하면서 자의식이 싹트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독일의 철학자 요한 고틀리프 피히테는 사람이 언어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사람을 만든다고 말합니다. 결국 언어는 그 사람의 근본 존재의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의 정체성은 외국어가 아니라 모국어를 통해서 건강하게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자녀의 사교육비 지출을 줄여서 노후 대책을 하고 있는 ‘현명한’ 부모들이 늘고 있다지만, 아이의 외국어 교육에서 ‘현명한’ 부모의 교육적 처사는 취학 전까지 이런 시작을 아예 안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모국어의 토대가 단단해지기도 전에 외국어 학습 환경에 노출시키는 것은 무엇보다 아이의 내면 발달 - 정체감과 자의식의 형성과정에 유익하게 작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Q. 아이가 만2,5세입니다. 저는 직업상 거의 모국어 수준으로 영어를 잘 구사합니다. 엄마로서 제 능력을 교육적으로 조금이라도 활용하면 좋을 것 같아서 질문합니다. 놀면서 자연스럽게 아이가 엄마와 영어로 소통하도록 유도하면 안 되나요? 집에서 단순한 생활영어라도 쓰면 안 되나요? “엄마 표 영어”는 무조건 안 좋다는 뜻인가요?     

A. 엄마의 순수한 생각은 잘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아이입장에서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모국어의 습득은 아이를 둘러싼 일상 생활환경에서 이루어집니다. 다른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와 특히 엄마가 사용하는 언어가 다르면 아이는 커다란 혼란을 겪게 됩니다. 

혹시라도 엄마가 마치 한국어를 모르는 외국인처럼! - 아주 “철저하게” 영어로만 말한다면 아이는 서서히 “이중 언어”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즉 영어를 모국어 수준으로 하게 됩니다. 정말 이것을 원하시나요? 또한 만6세 정도까지 이런 언어 환경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시나요? 아빠도 영어실력이 그 정도가 되면, 역할을 바꾸어 시도해보셔도 좋습니다.

아이의 정서 발달에 가장 좋은 것은 엄마는 모국어(= 엄마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모국어가 안착되어 하나의 언어 구조가 잘 만들어진 다음, 외국어 교육이 이루어지는 것이 순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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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독일 마르부르크 대학교에서 독어독문학 박사 과정까지 마치고 귀국, 이때부터 한국교육의 문제점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아이들의 창의력, 상상력, 자질 발현을 중요시 여기는 교육학자. 사회변화는 교육문화의 개선에서 시작된다는 확신으로 슈타이너의 발도르프 교육 서적을 번역하고 강의하다가, 뒤늦게 독일 슈투트가르트 발도르프 사범대학에서 슈타이너 인지학과 발도르프 교육학을 전공했다. 2000년부터 (사)한국루돌프슈타이너인지학연구센터를 이끌며 번역서로 <아이들은 머리로 배우나>, <정신과학에서 바라본 아동교육> 등이 있다.
이메일 : charirang123@hanmail.net       트위터 : steinercenter      
홈페이지 : http://steinercenter.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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